노래하지 않는 나는 뭐가 되지?
2020. 09. 15 |  웹에서 볼래요

[쓰레기통 옆에 있는 셸리. 상단에는 "책장 위 고양이 season 2",
"2w. 버리고 싶은"이라는 문구가 기입.]
언젠가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언젠가와 미래의 언젠가를 이야기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삶에 깊이 새겨졌던 기억들과 언젠가 도래하리라 믿는 훗날의 어떤 시간들을 공유합니다.
#37. 노래하는 사람
11월이면 정든 우리집도 안녕이다한남동에 있는 아메바 공동 작업실에 입주하게 되면서 근처로 이사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지난달에 우리집은 계약을 마쳤고내가 들어갈 집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지금껏 스무 군데는 더 본 것 같은데아직까지 딱 이 집이다’ 하는 집은 없었다오늘도 두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아무래도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무슨 일 하세요?”
 
집주인이 대뜸 묻는다.
 
음 그런 것도 중요한가요?”
그럼요저희 집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집 아니에요전에 계시던 분도 교수님이셨고이번에 살다 나가신 분들도 다 잘돼서 나가셨어요터가 좋아서 들어오시면 대박 나실 거에요.”
그렇군요여기 애완동물은 가능한가요?”
동물이요동물은 안 돼요.”
아쉽네요저희 집은 세 마리가 있어서잘 봤습니다.”
 
다들 잘돼서 나가는 터라기에 내심 욕심도 났지만 할 수 없다니뇨아모봄비는 내겐 자식이다내가 살기 좋은 집인지 만큼 그들이 살기 좋은 집인지도 중요하다아쉽지만 다음 집퍽 마음에 드는 구조에 멋진 옥상을 가졌는데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다강아지 두 마리를 안고 오르긴 쉽지 않을 것 같다또다시 집주인이 묻는다.
 
근데혹시 무슨 일 하세요?”
저 음악 하고 있어요.”
그래요저희 지금 세입자분도 음악 하는 분인데.”
그러네요음악 장비들이 있어서 놀랐어요.”
저분도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근데혹시 유명한 분이신데 제가 몰라보는 건가요?”
아니에요잘 모르실 거예요.”
 
원래 다 묻는 건가이전까진 묻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어보니 월세인 경우는 집세가 밀릴 수도 있고 해서 많이 물어본다고 한다전에 본 집의 세입자는 모델이었는데몇 달씩 세가 밀려서 주인이 머리가 아팠다고그래서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한다고 한다나도 프리랜서인데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
 
직업은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데 편리한 정보가 된다조카 가영이는 막 말을 시작했을 때 이모 두 명의 이름이 예은인 것에 혼란을 느꼈고우리는 둘을 구분해야 했다그렇게 나는 가수 이모가 되었다직업이 이름이 된 것이다그맘때쯤 나는 가영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 적이 있다.
 
어머안녕하세요정말 팬이에요!”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모!” 하고 가영이가 신이 나서 달려와서는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모는 노래하는 사람이야!”
 
노래하는 사람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깨끗해지는 문장이었다노래하는 사람한 번도 나는 스스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단순하고 명확한 표현이었다나는 노래하는 사람이고가영이는 이모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뿌듯해했다나 자신을 가수라고 소개하는 것에 언제나 부끄러웠던 나는 그날만큼은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야.’
 
그것만큼은 진실이다노래를 잘하는 사람유명한 사람유명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 같은뭐가 더 필요한 문구가 아니다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 것이다.
 
그런데.



노래하지 않는 나는 뭐가 되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열아홉 살에 데뷔해서 13년이 지났고그 전에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어서 내게는 유일하게 가져본 직업이다열두 살 때부터 가진 꿈이고내 전부다가영이 엄마인 고은 언니는 나를 가수 이모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다예은이가 언제까지 가수 할지도 모르는데 왜 직업으로 사람을 부르냐는 것이다맞는 말이다많은 가수들이 무대를 떠나고 새로운 길을 찾는다솔직히 나도 모르겠다나는 언제까지 노래를 할 수 있을까.
 
가끔은 다 버리고 싶다양양 바닷가 어딘가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짓고 매일 서핑하며 살고 싶다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존감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고 싶다인스타그램도 버리고사랑받는 나도사랑받지 못하는 나도 다 버리고 내가 나를 좀 사랑하고 싶다하지만 아직은 음악이 좋다노래하는 게 좋다노래하는 순간을 버릴 자신이 없다.
 
언젠가는 내가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려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버려지는 걸지도 모른다그때 미련 없이아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고 즐거웠다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내려놓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날이 아주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아주아주천천히.
핫펠트 작가의 말
요즘 신박한 정리’ 라는 프로그램에 빠져 있습니다원래 뭘 잘 못 버리는 성격인데 열심히 버리고 있어요.

, 9월 10일에 제 새 싱글 “La Luna”가 발매되었습니다시간 날 때 한번 들어주세요꾸벅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웃고 있는 핫펠트 작가]
셸리의 말
재밌지 않소? 작일 《에세이》에서 박종현 작가의 기타를 사랑하는 《찐빵》은 무대에서 기타에 마이크까지 다 치워버리고 홀로 남아 춤을 추는》 몽상을 하였소. 그런데 금일 서한에서 핫펠트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소. 가끔은 다 버리고 싶지만, 노래하는 순간을 버릴 자신이 없다고. 그래도 버려야만 할 때 미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만 그날이 아주아주천천히》 오면 좋겠다고 말이오.

나 셸리, 그대에게 보내기에 앞서 두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며 음악을 하는 이, 무대에 오르는 이의 심성은 서로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를 생각하였소. 그러나 다시금 생각건대 이는 핫펠트 작가나 박종현 작가 같은 이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오. 기실 버리기 위해서는 지니고 있어야 하고,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일말의 애착이나마 품고 있다는 것이니,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고, 버리기 싫어도 버려야 하는 이치가 어찌 두 사람에게만 속하겠소?

각설, 위 《작가의 말》에서 보이듯 핫펠트 작가의 새 《싱글》이 발매되었다 하오. 그간 내 서신에서 그대는 주로 글을 통해 핫펠트 작가를 만나온 바, 이제는 음악으로도 만나보는 일이 어떻겠소? 《뮤비》를 동봉하며, 이만 총총.

추신. 핫펠트 작가가 《뮤비》 촬영과 글쓰기를 병행하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는 듯싶던데, 게시판에 들러 응원의 말을 남겨주는 게 어떠하오? 아래 《오늘 편지 어땠어요?》라는 《링크》를 누르면 게시판으로 이동하오.

[단안경을 끼고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셸리]

[단안경을 낀 셸리]
북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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