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먹고 사는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라잎스페이퍼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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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잎스페이퍼는 2022 지역문화예술교육 기반 구축 지원사업 참여 단체의 먹고사는 이야기를 담은 뉴스레터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주와 더불어 이들이 가진 관계, 태도, 관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각 단체의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입니다. 7월 29일부터 11월 25일까지 매주 금요일 두 팀의 이야기를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본 뉴스레터는 청년협동조합 뒷북의 조합원 충현, 소똥, 혜진이 기획하고 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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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꿈 단체사진. 왠지 100년 전에 찍은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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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꿈 인터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남기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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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이: 미경, 수미, 열, 재남 * 인터뷰어 : 충현, 소똥 * 인터뷰 편집: 충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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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누군가에게 ‘자립은 의존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다. 지금 세상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스스로 마땅히 해낼 수 있는 것을 하되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것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자립의 형태이다.
더불어꿈은 공식적으로 2010년에 설립됐지만, 1998년부터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신문을 만들어왔다. 주로 사라져가는 마을의 모습이나 이야기를 취재했는데, 더불어꿈의 대표 재남은 이 작업들이 결국 사람과 관계하고, 사람을 남기기 위한 일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더불어꿈의 재남, 미경, 수미, 열과 이야기 나누며 ‘비빌 언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자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속도로가 마을을 두 동강 낸 탓에 각종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저 참고만 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 변화를 만들고, 30년간 살던 마을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이 아쉬워 핸드폰으로 서툴게 사진을 찍는 노인을 위해 미디어 교육을 진행한다. 25년 전 신문을 만들던 아이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더불어꿈을 찾아오고 있다. 자립은 의존이다. 의존한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더불어꿈과 관계하며 자립했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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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남
제가 먼저 할게요? 우리 단체는요, 이름이 ‘더불어꿈’이에요. 처음부터 더불어꿈으로 시작을 한 건 아니고요, 지역에서 엄마들하고 아이들하고 품앗이 교육을 시작했어요. 마을의 이야기들을 글로 쓰는 품앗이 교육을 시작했고, 교육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글을 저희가 신문으로 담아보자 해서 1998년부터 어린이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때 엄마들이 학부모 편집위원으로 참여를 해서 어린이 신문을 제작하다가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된 거예요. 대학생들이 되면서 그 청년들이 이제 본인들이 운영을 하겠다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되게 어려움이 있었어요. 학생이 어떻게 상근하는 것도 아니고 학교 수업 듣다가 엄마한테 전화 받고 이러니까 이게 서로 너무 힘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이제 저희가 ‘더불어꿈’이라는 이름으로 비영리 단체를 만든 거예요.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켜서 새롭게, 신문이라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미디어 매체를 같이 교육하고 제작하는 단체로 다시 거듭난 거죠. 2010년도부터요. 제가 대표입니다.
충현
그럼 지금은 기본적으로 대표님이 계시고 다른 멤버들도 있나요?
재남
있죠. 그때그때 프로젝트로 붙어서 하는 청년들과 그 부모 세대의 어른들이 있어요. 지금 청소년이 한 20명 되고, 청년은 한 15명, 청년들은 이제 결혼도 하고 이랬거든요? 단체에서도 결혼했어요. (웃음)
충현
오~ 할 일 다 하셨네요.
재남
제가 그래서 지금 뿌듯해요. (웃음) 저희가 무슨 행사할 때 올 수 있는 청년 한 15명 되고. 중장년하고 어르신들은 저희가 지원 사업 통해서 같이 했던 분들이라 더 많죠. 근데 이제 회원의 형태는 아니고요. 그냥 활동 회원으로 하는 분들 해서, 적어도 한 50~60명 정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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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
되게 큰 단체네요. 지금 있는 이 사무실 공간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거죠?
재남
공간에서는 거의 회의만. 저희 같은 경우 아카이브를 하다 보니 그 지역에 많이 가요. 저는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면 그 대상에 대한 고려를 많이 해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요. 미디어 매체가 문화 소외계층이 있는 쪽이 더 필요하다 생각을 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굳이 굳이 선택해서 같이 협업을 하기도 했거든요. 최근에는 일산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마을 가운데 길이 들어온 거예요. 문산 고속도로. 그 길이 쫙 마을을 그냥 가로질러서 났어요. 그러면서 마을이 두 동강이 나고 여러 가지 소음부터 해서 피해가 있는데 이게 어르신들이 말을 못 한 거예요. 그냥 참고 있었죠. 거기에 저희가 취재를 갔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애들한테 너희들은 참고 살지 말라고. 본인들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얘기할 곳이 없었다고. 그 이야기를 아이들이 기사화해서 좀 수면 위로 드러냈거든요. 그래서 시의원들하고 얘기할 기회도 마련되고요. 결국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잘 해결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분들한테 우리 미디어가 소통의 도구가 돼야겠다고 생각을 하죠.
미경
저는 양미경이고요. 더불어꿈에서 강사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나는 누구인가… 저는 아이가 하나인데, 저희 아이는 여기서 태어났지만 여기서 자라지는 않았어요. 세 살 때부터 한 5년을 미국에서 보냈어요. 왔을 때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제가 일부러 한국말을 안 가르쳤거든요? 애를 데리고 학교를 갔는데 학교 담임선생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안 받았으면 좋겠다.
소똥
왜요?
미경
한글도 잘 모르고, 남자아이고, 12월생이고. 그래서 안 왔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그러시더라고요. 내 나라 내 땅에 와서 담임이 이런 얘기를 하다니, 걔를 받아주는 학교를 좀 찾아다녔었어요. 근데 마땅히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한 달 동안 집에 데리고 있었거든요? 그러고 다음 해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서도 쉽지가 않았어요. 문제가 있는 애가 아니었고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정말 칭찬 많이 받았던 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그러더라고요. 학년이 지나면서 아이가 닫히는 게 보여요. 생각을 얘기할 수도 없고 떠들 수도 없고 가만히 앉아있어야 되고. 받아쓰기 때문에 맨날 선생님이 때렸기 때문에 매일 걔랑 나랑 밤새 받아쓰기 하는 게 일이었어요.
충현
진짜 때렸어요?
미경
말이 안 되죠? “오늘 몇 개나 맞았니?” 다 맞았대. 그러면 제가 속으로 “다른 애들도 (매를) 다 맞았겠구나.” 이런 거 있잖아요. 잘 봤다 그러면 애를 칭찬하지 않고 주변 애는 몇 점 받았는지 물어보기 급했어요. 근데 어느 날 내일이 시험인데 우리 아이가 내일 시험인 걸 다 제쳐놓고 잘 못 하는 아이랑 같이 공부를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느냐, 물어봤더니 “다 잘하면 안 돼? 다 잘하면 되잖아.” 학교에서 윤리적으로 다 행복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미경
제가 우리 아이한테 좀 배웠어요. 내가 얘를 줄 세우고 있구나. 얼마를 갖고 어디에서 살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얘는 성인이 된 지금도 그 생각을 해요. 아픈 사람이 있으면 왜 아픈지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저희 엄마 아빠가 아프셨을 때 고민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항암을 갈 것이냐 자연 치유를 할 것이냐. 책을 열 몇 권을 쫙 쌓아 놓고 매일 밤을 새우면서 읽고 있는데 우리 애가 그러더라고. “30%씩이나 살 수 있다면 해야지.” 제가 일주일을 밤을 샜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판단을 내려야 했거든요. 제일 위에 맏딸이었기 때문에 결과도 제가 수용을 해야 되고 그랬을 때 저희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책 다 갖다 버렸어요. 그리고 했거든요? 내가 애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제가 도리어 애한테 배우면서 여지껏 와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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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저는 수원에서 살다가 이사 온 지 이제 2년 됐어요. 거기서는 아이들 입시학원을 했어요. (웃음) 거의 한 20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여기 왔는데 학원을 오픈해도 아이들이 없고 모집이 안 되니까 삶이 여유로워진 거죠. 정신적으로도요. 그러다 보니까 가지고 있는 역량은 많지 않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어디든지 뛰어들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마침 오랜 친구인 서재남 대표가 “나를 일단 도와서 해보는 게 어떻겠니?” 제안을 했어요. 그렇게 제안을 받아서 돕다 보니까 재미도 있고, 진짜 주입식 교육의 한 담당자로서 살다가 여기 와 가지고 공동체에서 이런 활동을 한다는 게 신기했어요. 하루하루가 즐겁고, 나도 행복해지지만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구나. 저는 여전히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지만, 자꾸 배우려고 하고 나누려고 하고 그렇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충현
고양에는 오랜 친구인 서재남 대표님이 계셔서 오신 거예요? 수원하고는 거리가 있잖아요.
재남
아파트가 당첨되어서… 제가 계속 부러워하죠. (웃음)
수미
본질, 삶의 본질입니다.
충현
더 이상 설명이 필요도 없는 이유네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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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저는 박열입니다. 독립투사 맞습니다~ (웃음)
충현
많이 들으셨나 봐요?
박열
맨날 듣는 얘기예요. 이름 때문에 학교 다닐 때도 좀 힘들었어요. 옛날에 학교 때 출석부가 있잖아요. 꼭 수학 시간이나 무슨 문제 풀어야 되는 시간대 같은 때 있잖아요? “오늘은~” 그러면서 이걸 쫙 피는데 두 글자니까 가운데 이름이 딱 비어 있잖아! 눈에 딱 띄는 거야. “어! 박열, 나와서 풀어!” 미쳐버리는 거야 아주 그냥~ 한두 번이 아니니까.
재남
무조건 공부해 와야 돼. (웃음)
박열
이름에 대한 에피소드는 정말 많고, 저는 사진 전공을 했어요. 개인 사업도 하고, 프로덕션을 오랫동안 했어요. 올해로 사회 생활한 지가 34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지겨워가지고 있던 참에, 이 일을 하게 됐죠. 미디어로 해서는 웬만한 일을 진짜 많이 했어요. 젊을 때는 진짜 밤새워서 일하는 게 차라리 편하고, 해가 떠 있으면 집을 안 갔으니까.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애들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애 낳은 날도 야근하고 있었어요. 새벽 2시에 회사로 전화 왔더라고요 애 낳을 것 같다고. 이제 진짜 나온다고. 그래서 택시 타고 갔더니 나왔어 이미. 그래서 이제 그때 봤고. 애들 키운 거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일에 미쳐서 살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일할 때 되게 재밌었어요.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은 ‘럭키 목욕탕’이라고 있어요. 거기 28번이 내 락커였어요. 집에를 안 갔다는 얘기지. (웃음) 우리 어머니가 나 보고 싶으면 어쩌다가 한 번씩 오셔가지고 양말이랑 속옷 갖다주고.
충현
진짜 바쁘게 사셨나 봐요.
박열
그쵸.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만 하고 살다가 결국은 꿈을 놓치고 살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됐어요. 3, 40대는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도 못하고, 언젠가 나의 재능을 따로 좀 발휘해 봐야 되겠다고 했었다가! 이런 이제 공동체를 통해서 미약하게나마 아는 바를 감히 알려드리고 있죠. 연령대가 있으신 분들이 참여를 많이 하시니까 그분들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그러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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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꿈이 꿈꾸는 공동체, 마을은 어떤 모습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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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남
저는 이 활동을 지금까지 하는 이유가 사람만이 남기 때문이에요.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게 더불어꿈에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미디어는 도구가 되는 거죠. 다양한 세대가 마을 안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함께 이루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중요시 여기거든요. 그 가치를 지켜가기 위해서 악역도 많이 맡았어요. 더불어꿈이 지향하는 공동체는 세대를 다 포함하는 사람 중심의 활동, 공동체입니다.
충현
더불어꿈에서 하시는 아카이빙 활동도 길게 보자면 사람을 다 남기는 일이잖아요?
재남
그거에 굉장히 확신이 있죠. 실제로 여기서 성장한 청년들이 지금 멘토로 활동하기도 하고 또 지금 직장 일로 활동을 못 하는 친구들도 명절이나 생일 때 다 연락 와요. 우리 딸이 “엄마 아들 해, 아들!” 이렇게 얘기할 정도죠.
충현
자식이 많으시네요. (웃음)
재남
그래가지고 길게 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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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특성화사업 통해 진행하시는 수업을 소개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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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꿈이 직접 찍은 수업 사진. 열정이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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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
다행이네요. 모집하는 게 어렵지는 않으셨나 봐요?
재남
일단은 우리가 지역을 선정하면 그 지역 주민들 대상으로 사전 모임을 해요.
충현
사전 모임이요?
재남
예를 들어서 화전동이면 화전동에 있는 공동체나 주민 자치위원들이나 이런 분들한테 제안을 해가지고 사전 모임을 해요. 오셔가지고 저희 취지를 말씀을 드리고, 의견들을 듣는 거죠. 어느 정도 욕구들이 있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고,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을 한다면 진행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진행을 하는 거죠. 진행을 하면 주민자치회나 장소를 지원해주는 곳과 협약서를 써서 지원도 열심히 받구요.
재남
그래서 나중에 이분들하고 사진전도 하고요. 글로 기록집을 내기도 해요.
수미
어떻게 보면 문화유산이 될 수 있는… 너무 크게 얘기한 건지 모르겠지만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해요. 사라져가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지켜줄 수 있고 기억을 남겨줄 수 있는 부분이에요.
재남
지금 이게 소문이 나가지고요. (웃음) 다른 지역에서도 다른 동에서도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충현
우와, 네 분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되게 자랑스러워하시는 게 느껴져요.
재남
자랑스럽죠.
수미
뿌듯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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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가장 많이 되뇌게 되는 말이나 생각이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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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본캐는 무엇인가요? 자신의 본캐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캐들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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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남
저는 어쨌든 본캐는 ‘더불어꿈’ 대표죠. 따지고 보면 청소년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라는 게 제 삶의 반 이상은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하고 부닥칠 때가 내가 가장 나의 본 모습? 음. 그런 것 같아요. 사람하고 만났을 때, 특히 이제 그중에 청소년하고 만났을 때 가장 행복한 모습이 제 본캐에요.
충현
부캐는요? 더불어꿈하고 상관없는!
재남
더불어꿈하고 상관없는 거요?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너무 바쁘니까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갖는 시간을 좀 갖고 싶다. 내가 할머니가 돼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찾아보자. 그래서 닥종이 인형을 배웠어요. 한지로 해가지고 인형을 만드는 거거든요. 그거는 정말 몇 시간이고 이렇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인형 하나 만드는 데 3개월 걸리거든요. 그거를 어느 날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이거 하다가 수업도 늦은 적도 있어요. 하면서 되게 행복했어요. 그 시간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요즘은 또 바빠서 못해요.
수미
저 같은 경우에는 본캐와 부캐가 최근 들어와서 바뀐 케이스예요. 저는 학원 하는 그 일을 하면서 출근과 동시에 내 놀이터에 왔다는 생각으로 살았거든요. 너무 즐거운 거야. 아이들 오면 찝쩍찝쩍 건드는 것도 재밌는 거고, 아이와 나누는 모든 대화. 모든 걸 다 얘기해 줘요. 근데 여기 와서 그 본캐가 부캐로 넘어가고, 지금은 더불어꿈 하는 게 더 즐거운 거예요. 이게 이제 본캐가 돼버리고 부캐가 학원 일이 돼버렸어요. (웃음) 스스로 며칠 전에도 그 생각을 계속했거든요. “나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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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
아파트 당첨되신 게 천운이셨네요. (웃음)
미경
저는 아마… 이런 활동 안 했으면 집에 있었을 거예요. 돌아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냥 집에서 살림하고 시간 보내고 그러고 살았을 것 같아요. 2009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해서 여지껏 오면서 내가 달라지는 모습을 느끼게 되죠. 수업을 안 했으면 전국을 다닐 일도 없었고 고양시로 돌아가는 일도 없었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었고 집에 있었겠지? 매일매일 뭐 해 먹을까 하고 있었겠지? 그랬을 것 같아요. 더불어꿈 덕분에 훨씬 더 풍부해졌다고 생각을 해요. 본캐는 아마 집에 있었을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충현
본캐는 집에 있는 사람인데도 밖에서 즐거움을 찾으신 게 신기해요.
미경
네, 재밌어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활기차고 눈동자가 살아있다. 맞는 것 같아요. 집에서 있었으면 진짜 매일매일 “아이~ 뭐 해 먹나. 삶이 삶이 아니다.” 이러고 있을 텐데 저는 지금 빈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거든요? 애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바쁘지 않았으면 굉장히 바닥으로 떨어졌을 거예요. 근데 사람들이 저는 안 앓을 거라고 생각을 하더라고요.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전혀 안 그럴 거다. 근데 이래서 공황장애가 오는구나, 이래서 우울해진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강한 사람은 없구나 세상에. 정도의 차이지… 그냥 바빠서 좋아요. 다 잊어버려서.
충현
끝맛이 씁쓸한데요. (웃음) 혹시 박열님도 더불어꿈으로 본캐를 찾으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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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그런 게 없지 않아 있죠. 거의 한 30년 가까이 일을 했다가, 이제 일을 줄이고 직원들 이제 퇴직시키고 나 혼자 있으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프리랜서 개념으로 작업을 하다가 그마저도 이제 일을 줄여가지고, 이제 뒷방 늙은이구나… 이러고 있었는데, 대표님이 좀 같이해보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전 좋았죠.
재남
하하.
박열
제가 좀 건방지게 아는 ‘척’을 해도 돼서 좋죠. 사실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좀 귀찮은 부분이 없잖아 있긴 하거든요. 전에는 사무실에 직원들이 있으니까 시키면 다 되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해야 되니까! (웃음) 좀 피곤해지더라고. 엊그저께도 촬영을 가야 돼서 장비를 빌려왔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 한두 시간 메고 다녔더니 어후,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재남
고생하셨어요.
박열
그래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충현
“옛날에 고생했지”가 아니라, “옛날에 고생 안 했는데 나 왜 이렇게 고생하지?”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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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식사는 안녕하신가요? 먹는 행위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예술을 통해 먹고 살만 하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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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
좋아하죠. 같이 먹는 거 좋아하죠. 워낙 식구들이 많았고 저희가 사형제라 항상 부족하게 먹었고 늦게 가면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처절하게 먹었어야 되는데 (웃음) 결혼하고 나서 정작 혼자 먹으니까 맛이 없더라고요. 엊그저께 저희 회식했거든요. 하루 종일 수업을 하고 와가지고 완전히 다운되기 직전이었는데 회식한대서 “가야 돼! 늦게라도 가야 돼!” 너무 맛있는 거예요.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요. 식구가 필요하구나. 혼자 있는 청년들이 얼마나 외로울까?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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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단체를 계속 유지하고 잘하려면 우선 본인들이 돈을 많이 버는 수밖에 없어요. 두 분이 딱 들어왔을 때 느꼈던 감정이 뭐였냐면 옛날에 내 후배들 독립영화 한다고 했던 친구들 보는 느낌이 있어. (웃음) 게네들 독립영화 한다고 그래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게네들을 모아다가 삼겹살 사줬어. 나도 없는 돈에 회사에서 봉급 받는 주제에.
수미
박봉이었을 텐데 그때는.
박열
삼겹살 사주고 그중에 한 명이 몬테카티니 영화제 스페인에서 상을 받았어요. <햇빛 자르는 아이>라고 그래가지고. 거기를 가야 되는데 비행깃값이 없어서 내가 또 없는 돈에… 씨….
수미
슬픈 이야기야. (웃음)
박열
“이게 다다….” 그러고 줘가지고
수미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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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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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남
저는요… 손주 나올 때까지. (웃음)
미경
샘 얼마 안 남으신 것 같은데? 잠시만.
수미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안 되십니다앙~
재남
아니 근데 더불어꿈은 계속되고요. 제가 그래요. 애들한테 얼마든지 너네가 원하면 더불어꿈 물려주겠다. 교육하다 보면 아이들은 자기가 커서 더불어꿈 대표 되는 꿈을 갖기도 하거든요? 청년들이든 누구한테든 더불어꿈을 줄 생각이 있고요. 근데 지금 시기적으로 조금 힘든 시기니까 이것만 지나면 누군가한테 이주고 저는 손주 키우면서 살 겁니다! (웃음)
충현
대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으시네요.
재남
넘겨줘야죠. 사실 청년들이 운영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한때는 운영 분과도 만들어주고 많이 맡긴 적도 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워크숍을 하면서 ‘나에겐 더불어 꿈이란?’ 했더니 ‘애증이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렇구나. 너희한테 애증이구나. 그래서 그럼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랬더니 이제 다 이제 놓고 싶다 하는데 한 명이 “선생님, 그럼 제가 해볼게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걔가 대표로 해서 사회적기업까지 했는데, 어느 날 얘가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미경
잠적.
재남
중요한 시기에 잠적을 했어요. 커뮤니티 공간 위탁을 하나 받아야 될 시기였는데 연락이 안 돼요. 그때 대표를 바꿨죠. 지금 그 친구는 네이버에서 일해요. 그래가지고 보내줬어요. 그만한 아이였는데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거지…
미경
저는 이 일 계속하고 싶고, 건강이 허락해야겠죠. 안 아프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미
저도 건강하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열
저도 건강만 허락되면 하고 싶습니다! (웃음) 여기 선생님들이 하시면 저도 계속할 거고, 원체 가만히 있지를 좀 못해요. 불안해요. 그래서 계속 아마 건강하면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충현
여기는 그래도 다행히 애증이 아닌 것 같은데요?
재남
네네. 애정을 갖고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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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만약 당신이 라잎스페이퍼의 진행자가 된다면 다음 팀에게 어떤 질문을 해보고 싶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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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남
저는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궁금한 거 같아요. 각자의 갖고 있는 도구든 자원이든 그걸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박열
가장 보람됐을 때가 언젠가? 뭐 이런 거 한번 물어보면 좋지 않을까. 교육을 하면서 행복을 얻으셨는지, 아니면은 무엇을 얻으셨는지 그런 거 좀 궁금합니다.
충현
알겠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해볼까 하는데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고프셨을 텐데.
수미
난 배 안 고파요~
박열
재밌었어요.
수미
젊은 분들을 만나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좋은 거 같아요.
박열
거짓말이지! (웃음)
충현
부정을 안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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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꿈 인터뷰: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남기는 일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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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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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소재용, 이충현, 더불어꿈
- 녹취록 작성 : 엄희은
- 장소: 더불어꿈 사무실
- 인터뷰 발행일: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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