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자랑하고 싶은 회사,연봉,직업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즈~언혀 부럽지가 않어.” 네. 정말이에요. 가진 게 많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그대가 부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꽤 있으시더군요. 어떻게 출근하는 아침이 행복할 수 있냐고요. 저는 무엇 때문에 일터와 일이 즐거울 수 있는 걸까요. 심지어는 ‘기쁘다’는 단어를 붙이는 만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기본욕구(결핍성에 욕구)와 메타욕구(성장 혹은 자아실현 욕구)로 나뉩니다. 피라미드의 맨 위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자리를 차지하죠.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능력을 발휘하고, 창조성을 실현하며, 성숙해 갑니다. 저에게도 일은 그런 의미입니다. 일은 제 정체성 안에 포함되어 존재를 발견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일이 실현되기 위해 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존재를 통해 일이 드러나야 합니다.

저는 곧 져버릴 벚꽃이 환하게 웃는 때를 놓치지 않고 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 아름다움을 친구들과 함께 누리길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아가 해쳐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라면, 저만의 창조성을 가지고 기쁘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직장이든, 직업이든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 때, 무엇을 먼저 질문해 봐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존재의 본질과 목적을 상실케 하는 도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입니다. 부디 그대의 일이 그대라는 존재를 해치질 않길 바랍니다.

2019년 6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를 나온 이유는 부끄럽게도 대표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니가 하는 게 뭐가 있다고 이거 하나 못해?" 지금 생각해보면 대표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11개월 동안 하루에 3~4시간 자고, 하루에도 수십 번의 전화와 미팅, 술과 커피에 충분히 적셔져야 돌아가는 업무, 이기적인 사람들 마음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니, 나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작 1년을 채우지 못한 건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일(Work),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일이 너무 하고 싶다. 퇴사 직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일하기를 게을리하거나 멈춘 적은 없다. 매거진을 만들기도 하고, 쓰고 있는 외주 원고도 하나 둘 늘었다. 그런데 일이 너무 하고 싶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꼭 묻는다. 그럴 때마다 주저없이 아.무.거.나. 다 잘 할 수 있으니 일 좀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느새 일은 식욕, 성욕처럼 하나의 욕구가 된다.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단어 중에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가 있다.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에게 노동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란 걸 암시한다. 노동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자 삶의 원동력이 된다.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을 이룬다.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인간인 것이다. 이 단어를 곱씹다보니 내가 지금 격렬히 일하고 싶은 이유를 알게 됐다. 실존하는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한동안 '크리에이티브 라이터'라고 나를 소개하고 다녔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직함이었다. 하고 있던 일을 한 단어로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글을 쓰는 노동은 동일했지만 어떤 글은 SNS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어떤 글은 대본으로 읽혔으며, 또 어떤 글은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아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보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공한 사람이다"

- 밥 딜런(Bob Dylan)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침마다 일터로 출근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 허탈하고도 어이없어할 써티들이 있겠지만, 남들이 다 하는 그런 행위에서 생존함이 느껴진다. 실존하고 싶고 생존하고 싶다. (이런 예가 맞을 지 모르겠는데,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이 끼어들 수 없는 그 살아있는 경험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지속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취업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일하고 싶다. 나 여기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다.

외계인이거나 외국인이거나 위인이 아닌 이상, 우리 학창시절은, 초등학교 6년, 중•고교 시절 6년, 총 열 두 해입니다. 소수를 제외하고, 12년 동안 등•하교 과정을 고분고분 따릅니다. 물론 때때로 결석도 하고 지각도 하겠지만, 엄청난 인내력입니다, 12년 동안 등•하교를 지속하다니요.  

또, 그 중 다수는 대학과정을 이수합니다. 약간의 자유를 얻습니다, 성인이 되었으니까요. 허용된 영역 내에서 자기 시간표를 관리합니다. 주어진 학점 내에서, 개설된 강좌 내에서, 시간과 열정을 배분합니다. 이 또한 대단히 수고롭습니다. 학칙이 요구하는 졸업요건에 자신을 도킹시켜 졸업장을 따냅니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시도합니다. 구직 과정에서 다양한 거절을 경험합니다. 물론 몇몇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취업이 술술 잘 풀리기도 하지만, 취업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변형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축하를 받습니다, 취직에 성공합니다, 뽀갰습니다. 일을 시작합니다. '9 to 6'라는 새 요건에 맞추어 봉급자의 삶을 영위해 갑니다. 

동네철학이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혹시, 우리는 십수년간 '일'을 하기 위해 연습해 온 것은 아닐까? 6+6+4+α년의 긴 학업 과정이 노련한 봉급생활자를 프로그래밍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성실히 이수해온 제도권 교육 끝에 놓인 직장생활이라는 각본, 그 각본은 과연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쓰인 것일까, 학교 종이 땡땡땡, 종소리로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의 무수한 반복이라는 타임루프를 겪은 끝에, 비로소 우리는 '일'에 적합한 인류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질문. 

지난 써티랩에선,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우리 주체성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저는 이번 4월호에서도 비슷한 결의 사유를 제안합니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 받은 우리라서, 아침마다 찾아오는 '일'로 인해서, 우리 주체성을 돌보는 데에 소홀하진 않았을지요. 또한 우리가 하는 '일'과 나의 '주체성'은 얼마나 닮았을까요. 누군가에게는 이 주문이 도움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부디 행복하세요!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의 MZ세대 조기퇴사자 현황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신규입사자 중 조기퇴사를 하는 비율은 평균 28%라고 합니다. 이는 2019년 평균 퇴사율 17.9%에 비해 2년만에 10% 이상 늘어난 수치이고요. 그리고 기업들이 말한 MZ세대의 조기퇴사 이유로는 ‘ 개인 만족이 훨씬 중요한 세대라서’를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개인의 만족이 더 중요하면 왜 안 돼?라고 먼저 묻고 싶지만) 이렇게 퇴사율이 급증하는 사회에 살고있는 우리는 만족의 기준을 무엇으로 설정해야 하고, 무엇이 불만족스러울 때 퇴사 부저를 눌러야 할까요? 그리고 이 기준을 왜 설정해야 할까요?

일에 대한 철학이 분명한 사람은 일을 하며 자신에게 중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직장생활에서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일이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일의 의미를 자신의 성장에 두는 사람은 감정보다 생각과 논리에 따라 일을 한다.

<일의 철학>_데이브 에번스, 빌 버넷

인간 관계, 업무 과중, 불공정한 평가와 보상, 체계 없는 업무 등 회사에서 힘든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나를 힘들게 하죠. 하지만 불행과 퇴사의 이유는 아닐 수 있습니다. 나만의 우선 가치를 정한다면 직장생활에서 행복과 불행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가르고, 퇴사가 필요한 순간을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 바람 잘 날 없는 직장에서 나만의 기준을 세운다면 부는 바람대로 이리 저리 휩쓸리는 것이 아닌, 그 바람을 이용해 불필요한 잎을 떨어뜨릴 수도 있겠죠.

제 직장 생활의 만족 기준은 사회적 가치와 성장인데요. <일의 철학>에서 말한 ‘좋은 직장을 만드는 요소 네 가지’는 저에게 현명한 퇴사 판단을 도와줍니다. 종종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래의 질문에 떠오르는 답이 있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은 환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에 어떤 의미를 둘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만의 커리어 곡선을 주체적으로 그릴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출근 길 중간에 무작정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봄볕이 너무 따스해서 이대로 사무실에 앉아 있으러 갈 수 없어 작은 탈주를 시도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 길래 여기서 우르르 내리는 걸까 늘 궁금했던 발걸음을 따라 내린 곳은 한남동. 제일 바쁜 출근 시간이 막 지난 평일 오전이라 한적한 동네를 까르르 까르르 경쾌하게 누비는 발걸음을 따라 한창 때의 목련도 보고 주린 배도 채우고 나니 문득 미술관 생각이 났습니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리움 미술관도 저의 일탈을 알았는지 딱 한 자리 여유가 있더군요. 양껏 목련을 눈에 담고 걸어서 5분 거리의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을 예약하고 야무지게 오디오 가이드까지 챙겨서 고미술품들을 소장중인 M1 전시관으로 향했습니다. M1 전시관은 특이하게도 4층부터 내려오면서 관람하게 되어있는데 고려 청자부터 조선 시대의 백자와 회화들, 그리고 불교 예술 작품들까지 알차게 구성되어있습니다. 평소에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함흥차사 느긋하게 관람하는 편인데 이 날은 오디오 가이드가 거기에 한 몫을 더했습니다. 위치를 인식해서 내 앞의 작품을 설명해주는 똑똑이 가이드 덕분에 음성을 다 들을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다양한 무늬와 용도의 도자기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보면 문득 이걸 만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된 작업을 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손끝으로 빚어낸 결과물이 수백년을 지나 여태까지 남아 전시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들이 머릿 속을 가득채운 건 아마 일하며 지친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날씨가 좋다는 건 핑계고 실은 일하러 가는 게 힘에 겨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는 걸 이 글을 적으며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한 층을 다 둘러보고 나니 나선계단이 저를 맞이해줍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조차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꾸며두었더군요. 이 계단을 따라 한 층 한 층 내려올때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 게 아쉬울 만큼 그저 가만히 앉아 바라보고 싶은 공간입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질 땐 여유롭게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공간으로 반나절 피로(避勞)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