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특별한 우리 동네 여성들의 이야기
여덟 명의 작가가 매달 1편의 글을 씁니다.
매주 금요일 2편의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이번 주는
기심의  에세이 "가슴을 활짝 열고 수영
쓰다의 에세이 "세상을 우리 품 안에"를 보내드립니다. 
 기심 
호기심과 이기심 사이를 오가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있다. 여성들과 이것저것 '작당모의' 하기와 혼자 '사부작사부작' 도전하는 시간을 즐긴다.  

중년 여성, 트렌드와 줏대 둘 다 잡으면서 나이 들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나이 드는 걸 실감한다. 늙는 건 포기를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주변 말에 조급증 나는 에코페미니스트.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매번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지구와 다른 생명을 떠올리며 하나씩 도전!

가슴 활짝 열고 수영

하면 좋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가 싫다

운동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운동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몸을 이겨서. 만보걷기, 주 1회 산행을 결심하지만 며칠뿐이었다. 이쯤 되면 운동 안 하는 건 본성이다. 내게도 운동장 사다리를 오르고, 오징어게임, 고무줄을 하며 높이 멀리 빠르게 뛰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이 운동은 내게 멀어지고 싫어졌다.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느꼈던 긴장감과 숨 가쁨이 그립다.

환갑 기념 호캉스에 초대되었다

띠동갑, 다섯 살 위, 나 세 명이 만나는 모임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할 무렵에 만나서 얼른 아이들 ‘홀로서기’ 이룩하자며 만들었다. 내년이면 아이들 모두 성인이 된다. 아이들이 홀로서는 날만을 꼽았는데 이제는 “우리 인생이나 홀로서기 하자.”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

그중 한 명이 올해 환갑이 되었다. 코로나를 겪으며 안 해본 건 하나씩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호텔 숙박권 결제를 마치고 가자고 했다. 선 결제, 후 동의 시스템이다. 탐험 정신이 투철한 그이와 했던 많은 일들이 적지 않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지만, 무색무취의 일상에 신선함과 활기를 선사했다. ‘수영하기’가 필참인 호캉스가 성사되었다.

호텔 숙박권이 생겨 몇 번 이용한 적 있는데 잠자고, 밥 먹고, 주변 산책하기에 그쳤다. 주눅 드는 자아가 등장해서 찬란한 호텔 인테리어와 부대시설은 불편만을 선사했다. ‘홀로서기’의 최대 장점은 셋이 뭉쳐 두려울 게 없어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최전선을 누린다고 죄책감도 주눅 들새 없이 즐거웠다.

한 번 입자고 수영복을 사기는 아까워 언니에게 빌렸다. 하늘을 보며 수영장 베드에 누워 한껏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내 몸보다 한 치수 작은 언니의 수영복으로는 가슴이 펴지지 않았다. 크기가 작아 아래위로 심하게 당겼고 뽕으로 자신감을 채워야 하는데 부족했다. 수영장 풀에서는 수영하며 누려야 하는데 현실은 발버둥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호캉스 덕에 수영이 하고 싶어졌다. 내게 수영장은 아이들 수영장 등록을 위해 새벽에 줄을 서는 곳이었다. 생존 수영이 되고, 물놀이의 유흥을 즐기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랐다. 정작 내가 배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몸을 드러낼 자신도 없고 이 나이에 해서 뭐하나 싶었다. 무엇보다 운동을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 낼 결심이 어려웠다. 호캉스 이후 생각을 바꿨다. 나도 안 해본 거 하고 살자.

수영복 구입을 위해 세일 코너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중도 포기하지 않을 장치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수강료보다 더 대가를 치렀다. 좋아하는 청록색 수영복 신상을 ‘거금’ 들여 샀다. 장비빨이다. 5월에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 8월에는 화려한 야광 비키니를 입고 바다에 누워 하늘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영장 물에 발 담그지도 않고 이내 비키니를 검색했다.

 

수영장에서 물 찬 제비처럼

겨털을 밀었다. 평소에는 자연스러운 몸의 일부라고 그냥 두었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김연경도 한다는 겨드랑이 하얗게 만드는 시술을 받을까’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내 몸이 부끄럽다고 여기지는 않았는데 첫날 수영복을 입으며 볼록 나온 배, 경계가 흐릿한 허리와 엉덩이, 작은 가슴이 아쉬웠다. 다른 사람 몸과 나를 비교했다. 나만 그렇게 다른 사람 몸을 살펴보는 게 아닐 거라며 다른 이를 평가한 걸 속으로 미안해했다. 몸에 대한 평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영장에서는 몸매가 아니라 물을 덜 먹는 게 중요했다. 어깨에 미치지도 않는 수심에서 뜨지 못해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저녁 9시 수영반에서 연령과 성별이 다양한 사람들이 초급으로 시작했는데 며칠 만에 유려하게 수영을 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실력순으로 출발하는 수영장에서 수강생 중 중간쯤의 나이인 나는 만년 꼴찌였다. 실력은 나이와 성별에 비례하지 않았다. 우리 반에서 가장 앞에 서는 사람은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내 앞은 텅텅 비고, 뒤로는 선두에게 쫓겼다

수영장을 다닌다고 말하자 여럿이 뜨지 않아서 수영을 등록하고 한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강사는 목이 터져라 알려줘도 내 몸은 강사 말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덜어내기 위해 혼자 나머지 수업했다. 유튜브 수영강습을 보고 또 보고 자유 수영 시간에 별도로 연습했다. 달라지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어도 좋아하는 색깔이, 비싼 수영복이 나를 잡아주었다. 강습 시간보다 미리 가서 다른 반 수업 모습을 살펴봤다. 나같이 물먹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었다. 나만 나를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뜨겠지.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라고 외웠다.

 

내가 새벽반 수영 등록을 해줬던 우리 집 청년들

“너희들은 수영 배울 때 어렵지 않았어? 따라가느라 곤란하지는 않았어?”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첫날부터 1등이었다고 했다. 흥! 살면서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나를 잘 모르고 살았나 보다. 동네방네 묻고 틈날 때마다 연습한 석 달이 다 되어가던 때 어차피 급하게 마음먹는다고 빨리 나갈 수 없으니 앞이 텅텅 비어도 포기하지 말고 레인 끝까지 쉬지 않고 가보지 싶었다. 그러자 신기하게 물에 떴다. 알고 보니 이미 나는 뜨고 있었는데 자꾸 멈추면서 가라앉는다고 했다. 석 달 만에 앞사람에게 추월의 긴장감을 안겼다.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배영으로 진도가 나갔다. 배영은 쉬웠다. 비키니 입고 바다에서 하늘을 본다는 상상을 수없이 한 이미지트레이닝 덕분이었나 보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내가 대견하다. 이제는 물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롭다고 느낀다. 몸에 대한 시선도 수영에 들인 시간만큼이나 편안해졌다. 수영은 실력과 관계없이 운동 싫어증을 날려준 종목이다. 수영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신난다. 올여름 비키니 입고 바다에 가자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당장 올해가 아니어도 언젠가 봤던 배 나오고 가슴 처진 백발 할머니 그림처럼 당당하게 바다 수영을 즐기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내 환갑 기념으로 홀로서기 멤버를 바다 수영으로 초대할까.

기심의 이전 에세이는 '기계 좀 다루는 여자'
           다음 에세이는 '책과의 거리는 멀지만, 글은 쓰고 싶어' 입니다.
 쓰다

장애아 엄마라는 타이틀을 삼십사 년째 복대처럼 차고 산다. 그거 말고도 나를 보여줄 이름이 참 많았는데 어느새 가장 큰 명패가 돼버렸다. 또 평생 다른 이의 삶을 쓰다가 정작 내 이야기는 잊어간다. 나의 이름, 나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 편히 풀어놓을 좋은 자리를 만났다. 모두에게 고마울 뿐이다. 심지어 인생이 나에게 선사한 고통조차도.


일류 삼강의 파란만장 세상 유람기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역사를 새로 쓰는 큰일은 말할 것 없고 개인 삶을 흔드는 작은 사건도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난 6개월 사이 신상에 큰 변화를 겪으며 죽기 전에 어디든 내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장애아이 엄마라는 타이틀을 떼고 나를 말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강씨 성 가진 세 명의 남자와 유씨 성을 가진 여자가 함께한 세상 유람을 통해 장애아이를 키우는 가정의 특별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긴 세월 그 평범함을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온 나를 엄청 우쭈쭈하는 잘난 척 에세이 되시겠다.

세상을 우리 품 안에

두 번의 미국방문-서부의 대자연과 바닷가 작은 마을 그리고 샌프란과 LA

 

미국 서부의 대자연을 경험하기 위해 떠났던 97년 여행에는 친정엄마 정숙 씨와 시어머니 점례 씨, 그리고 이제 막 두 돌을 넘긴 94년생 둘째까지 모두 여섯 명이 함께 했다. 영국을 다녀온 지 2년이 지났지만 큰 애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일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동안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특수교육을 치열하게 받았고 나이 들며 생활언어도 조금씩 늘어나 기본수준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차도, 인도 구분 없이 무작정 뛰어가거나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눈 맞춤을 피하는 행동들이 줄어드는 대신 자리에 앉아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9박 10일의 장거리 여행은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효과를 확인하는 현장이 될 거라는 기대와 양가 두 어머니가 아이들을 함께 돌봐주리라는 믿음이 너무 커서 출발 전부터 자신감이 쓸데없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환상은 곧 깨지고 말았다. 외국에서는 두 어른도 내가 물적으로 심적으로 돌봐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그나마 영어 잘하는 빠릿빠릿한 머슴(?)과 건장한 30대의 내 체력, 떠나기 전 촘촘하게 세운 여행계획과 무엇보다 우리 가족만의 렌트 카 여행이었기에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이 아직 생기기 전이어서 ‘우리의 날개’라고 광고를 해대던 대한항공으로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LA에 내려 렌트 카를 픽업한 후 하루 머물며 LA 시내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둘러보고 다음 날 그랜드 캐니언으로 갔다가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와 일박하고 데스 밸리를 거쳐 요세미티로 이동한 후 캠핑 장에서 자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시내를 구경한 뒤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미국 서해안 1번 국도를 타고 다시 LA로 와서 귀국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주의 유명 관광지를 이어 미국 서부를 둥글게 한 바퀴 도는 계획을 짜고 숙박지와 렌트 카, 비행기를 예약하면서 이대로 진행될지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출~~바알’을 외치는 남의 편을 믿기로 했다. 두 번의 해외여행 경험은 실속있게 짐을 꾸리도록 도와주었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해줬다.

 

TV나 책으로만 보던 미국 서부의 대자연은 일단 그 규모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 많던 두 어머니가 그랜드 캐니언이 눈앞에 열리자 입이 얼어붙어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모습을. 천방지축 두 아들 녀석은 그 와중에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나는 그 멋진 광경을 흘깃흘깃 볼 수밖에 없었고. 과거 바다였다는 데스 밸리는 다른 외계 행성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만큼 기괴하고 낯설면서도 아름다웠다. 달리다 보면 차가 과열될 만큼 기온이 높아(평균 50도 내외) 중간 휴게소에서 반드시 차를 멈춰야 했다. 데스 밸리에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통과하는 가장 높은 도로인 타이오가 패스(3,031미터)를 지나야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한국의 작은 고개 정도로 생각해 일몰이 다 됐음에도 그냥 진행했다가 두 시간을 넘게 내려가는 바람에 도착했을 때는 사방이 칠흑 같아서 캠핑지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10시간 가까이 차로 이동한 뒤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밥하러 나가다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만났다.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전나무숲 아래서 쌀을 벅벅 씻는 모습이라니...나는 천생 무수리로 타고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따라 로스앤젤레스까지 내려가는 1번 국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라이브 길에 등재될 만큼 환상적이어서 언제든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총 1,055㎞로 하루 만에 주파하기 어려운 길이라 산타 바버라 바닷가 롯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가는 동안 들러봐야 할 구경거리가 어마어마했지만 비행기시간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 LA의 베벌리 힐즈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여느 관광코스처럼 평범했다.

2000년에 다시 다녀온 9박 10일의 미국여행은 남편 출장길에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와 근처 바닷가의 작은 도시 몇 개를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특히 산타 크루즈에 사는 오래된 중학 동창을 만나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회포를 푸는 일정도 포함됐다. 외국인과 결혼해서 거의 서양인이 돼버린 친구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애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관대했다. 아이를 자꾸 단속하는 나에게 괜찮으니 놔두라고 해서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렌트 카에 두 녀석을 싣고 샌프란시스코시 일주도로를 따라 트윈 픽스, 코이트 타워, 금문교, 유니온 스퀘어, 마일록 비치와 전철 종점인 피셔맨스 와프에서 보이던 앨커트레즈 섬 등을 구경하고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산타 클라라와 산 호세, 스탠포드 대학을 둘러보며 둘째에게 꼭 여기 와서 공부하라는 애꿎은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첫째가 채우지 못할 공부의 한을 영리하고 야무졌던 작은 아이에게 전가한 것이다.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겠다고 해맑게 대답하던 여섯 살짜리 둘째는 내년이면 서른 줄에 들어서는 청년이 되어 오늘도 돈 벌러 직장에 나갔다. 수족관과 골프코스로 유명한 몬트레이와 17마일 드라이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으로 재직했던 바닷가 예쁜 도시 카멜 바이더씨는 남편도 함께 다녀왔다.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여행지 풍경은 솔직히 우리가 느끼는 감동과 다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둘째에게 97년과 2000년에 다녀온 미국여행을 물었더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다만 숲을 기어 다니던 개미 떼와 중국을 다녀온 거 같다고 대답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그렇게 기억하는구나! 그렇다면 큰아이는 어떤 느낌과 생각으로 우리와 여행한 걸까? 나이가 훨씬 들었다고 하지만 장애 때문에 제 나이에 맞는 생각과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를 일방적으로 끌고 다닌 건 아닌지 잠시 고민이 왔다. 곧 큰애도 가족의 한 일원이고 가족 모두의 행복이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큰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일상이 해외에서는 가족 하나하나를 배려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아들이고 가는 곳마다 “I’m sorry, he has Autism(미안합니다, 자폐아예요)”을 외쳐야 했지만 우리 가족이 온전해진 듯 마음은 훨씬 편안해졌다. 다만 네 살배기 둘째가 혀짧은 발음으로 어디 가든 먼저 “아임 쏘리, 히 해져 오티즘”을 말하는 바람에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로키산맥을 따라 오르내린 캐나다

 

99년에는 캐네디언 로키를 따라 유명 관광지인 밴프 국립공원과 재스퍼 국립공원을 탐방하고 밴쿠버와 캘거리, 시누이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살고 있던 최대의 한인 타운 코퀴틀람을 들렀다. 이때도 9박10일을 다녀왔는데 미국 서부의 대자연과 또 다른 캐나다만의 넉넉하고 웅장한 산과 호수, 설경, 숲과 나무를 질리도록 즐겼다. 땅덩어리 대비 인구가 워낙 작다 보니 대도시 말고는 사람 보기가 어려워 어디서든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편 인종차별도 적지 않아 실제로 캘거리 공항에서 렌트 카를 빌릴 때 우리가 당하기도 했다. 예약대로 차 열쇠를 내주기만 하면 되는데 계속 기다리라며 배차를 해주지 않았다. 밖에서 한 시간 넘게 떨며 기다리다가 매니저 나오라고, 인종차별로 고소한다고 사무실을 한바탕 뒤집은 후에야 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못생긴 여우 같던 어린 백인 계집애가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애가 포함된 동양인 가족이라고 일부러 무시한 것이었다. 살기 좋기로 유명한 밴쿠버는 워낙 알려져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밴프에서 제스퍼로 옛 도로를 따라가며 만난 호수들, 레이크 루이스와 캐나다 지폐에도 등장하는 레이크 모레인, 석회와 빙하가 섞여 완전한 옥빛이던 페이토 호수와 계절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는 머린 호수, 에메랄드 호수 그리고 빙원을 걸어 다니는 컬럼비아 대빙하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계곡과 국립공원의 자연이 이십여 년이 넘은 지금도 어제 본 풍경처럼 고스란히 떠오른다. 친절하고 상냥했던 사람들과 예쁘게 꾸며놓긴 했지만 유난히 실내가 추웠던 숙박 시설, 깨끗한 공기와 물, 그리고 개발한 듯 개발하지 않으며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자연 속에서 큰아이는 편안하고 차분해 보였다. 한창 개구지던 동생이 다른 곳으로 뛰어가면 데려가서 끌고 오거나 동생을 꼭 껴안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캐나다 여행 이후 큰애한테는 ‘자연의 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자연 속에서 아이는 장애를 틀을 벗어버리는 듯했다.

오랜만이야, 프랑스! 올라, 에스빠냐!

 

여행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성장하게 만든다. 2001년, 대지의 정열을 따라 떠난 9박 10일의 프랑스, 에스빠냐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제 40줄에 접어든 우리와 소년기에 들어선 두 아들과의 화합을 가톨릭, 이슬람, 그리고 유대 문명이 조화를 이룬 스페인을 돌면서 이뤄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에어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가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로 환승한 후 렌트를 해서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말라가, 세비야와 코르도바 같은 스페인 남부와 중부도시를 거쳐 마드리드에 와서 시내와 프라도 박물관을 구경한 후 다시 파리로 와서 근교의 베르사이유(라고 하면 프랑스인들은 전혀 못 알아듣는다. ‘벡싸이예’ 란다) 궁전을 방문하고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6년 만에 방문하는 유럽 땅이지만 그때와 전혀 다른 곳이어서 새롭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당시 유명하던 아랍 소매치기들에게 차에 탄 채 지갑이랑 여권을 빼앗길 뻔한 일을 당했다. 첫 숙박지인 한인 민박의 형편없는 대우와 바가지에 이를 갈며 시내 쪽으로 숙소를 옮기고 관광도 하기 위해 렌트 카를 타고 지도를 살피며 실실 가고 있었는데 잠시 신호로 멈춘 틈을 타서 거의 강도짓을 하려는 걸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가방을 붙잡고 발로 차며 차 문을 닫고 소리를 지르는 난리를 부려 떨어내 버렸다. 그때 주변에 서 있던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냉랭한 표정을 절대 잊지 못하겠다. 남 일처럼 바라보며 외면하던 그들 때문에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정이 뚝 떨어졌다.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 여권이랑 비행기 표, 돈을 잃어버렸다면 여행이고 뭐고 돌아올 비행기도 못 탈 판이었다. 다행히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날씨도 따뜻하고 사람들도 순하고 친절해서 떨어졌던 정을 다시 붙일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호기심천국에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던 둘째도 형이랑 가족을 챙기기 시작했고 첫째는 더 얌전하게 우리 곁을 맴돌았다. 물론 긴장이 풀릴 만하면 한 번씩 사고를 쳐서 우리를 다시 조이기도 했지만.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만난 알함브라궁전과 달빛 아래 빛나던 알바이신 지구, 세비야 대성당과 코르도바의 모스크, 말라가에서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보이던 북아프리카 땅,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던 광대한 올리브밭과 포도밭이 스페인을 더욱 빛나게 했다. 작열하던 대낮의 햇볕을 받으면 피에스타가 왜 필요한지, 스페인 사람들이 왜 그리 정열적인지도 이해 가능했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베르사이유는 궁전 관람보다 한인 민박 아주머니의 배려와 친절이 더 인상에 남는다. 아이들 교육에도 관심이 컸던, 넉넉하던 그분은 지금도 벡싸이예에 계실까? 하루 정도인 베르사이유 일정이 동부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그리고 안달루시아, 라만차 지방을 훑었던 스페인 여정 못지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다. 좋은 여행의 기억에는 반드시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쓰다의 이전 에세이는 '자, 셈하지 말고 일단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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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오르다 by 몽실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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