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2023. 12. 16.
미술비평 뉴스레터 에포케 레테(epoché rete) 
[스물 한 번째 뉴스레터] 시대를 타진하는 감각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판단은 어떻게 사고를 가로지르는가?
근거는 기대보다 얄팍하고, 확신은 쉽게 흔들린다. 사고思考를 방해하는 수많은 요인이 지척에 깔려 있어 우리는 쉬이 길을 보지 못하고 쫓기듯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는 그 마침표를 더 빨리, 더 쉽게 찍으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렇게 내려지는 판단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에포케 레테’는 ’정지, 중지, 보류‘를 의미하는 epoché와 신경망을 의미하는 rete를 결합한 명칭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느슨히 이어진 연결망을 통해 대화를 지속하고자 한다. 시시각각 나를 침투하는 속단의 유혹을 접어두고 우리, 잠시 생각하자. 그 생각의 끝에 떠오를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겠으나 그 무게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수 있도록.

에포케 레테의 스물 한 번째 레터는 시대를 타진하는 감각에 대해 다룬다. 김민주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비평가들의 주요 견해들을 제시하며 예측불허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동시대 미술을 읽어내는 첫 번째 단추를 꿰어낸다.  박예린은 감염병 시대에 시각성이란 후각과 미각이 거세된 개념이었음을 주장하며, 이를 되찾는 포스트-코로나 시기의 시각성이 무엇일지를 질문한다.

[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총체성인가 종말인가]
[ 코로나 후유증: 보는 것을 다르게 감각하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총체성인가 종말인가

김민주

I.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정치 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은 포스트모더니티를 광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의해서든 사이버 공간에 의해서든 이미지에 의한 문화적 공간의 총체적인 포화로 특징짓는다. 그는 “모든 것이 충분히 시각적인 것과 문화적으로 익숙한 것으로 번역되는” 상태에서 “미적 주목 자체가 지각의 삶으로 이전되고 있다.”며 후기자본주의를 포스트모던 감각의 새로운 삶이라 주장했다.1) 덧붙여 그는 후기자본주의 시장의 지각 체계와 연관되는 소비로부터 모든 형태의 여가에 이르는 것들을 미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되며 이로써 진정으로 미적인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쇠퇴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 감각 체제하에 이뤄진 예술적 상황을 제임슨은 패스티시(pastiche), 즉 혼성모방과 ‘깊이 없음’이라는 특징으로 노스탤지어 영화를 예시로 든다.2)


    제임슨의 관점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의 포스트모던한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미술에서의 ‘깊이’를 ‘표면’이 대체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는 그의 책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1984)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는 모더니즘의 대표 작품으로 반 고흐의 <농부의 신발>을 예로 든다(도 1). 고흐의 <농부의 신발>은 작품 내에서 “죽어있는 사물, 그저 물화된 상품”임을 거부하고 “감춰진 의미를 거부하기 위해 이 작품을 산출한 최초 상황을 정신적으로 재구성”한다.3) 즉, 작품의 제목과 회화를 통해 우리는 단편적으로 “지속적인 빈곤, 경작을 위해 허리가 휘어야 하는 척박한 토양의 세계, 농촌적 불행의 모든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4)

(도 1) 빈센트 반 고흐, <농부의 신발>, 1886
(도 2) 앤디 워홀, <다이아몬드 먼지 구두>, 1999
    반면 깊이에서 표면이 대체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으로 앤디 워홀의 작품을 예로들어 설명한다(도 2). 책의 표지이기도 한 본 작품에서 앤디 워홀의 다이아몬드 구두는 우리에게 결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작품을 보고 단순히 짐작하여 특정한 장소에서 발견된 구두라거나, 고흐의 작품처럼 유추 가능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즉, 제임슨에 따르면 해석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텍스트의 복구가 불가능한 사물, 최초의 상황이 부재하는 이미지, 피상적이거나 편평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식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그는 그 원인이 모더니즘 이후 주체의 죽음 혹은 개인주의(및 부르주아)의 종말에 있음을 주장한다.5)


    제임슨이 주장한 글이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시대적 경향과 자신만의 예술관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그렇다면 예술이 예술인가 아닌가’ 나아가 ‘예술인가 아닌가 =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의문점은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단토가 언급한 예술의 종말 시대 아래 하나의 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난 지금의 시대를 과거 미술사적 계보 안에서 흐름을 읽어내고 비평가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오늘날의 예술에서의 예술적 가치를 밝혀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 동시대 미술을 읽어낼 첫번째 단계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비평가들의 주요 견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참고 이미지) 앤서니 카로, early one morning, 1962

. 포스트모더니즘, 미니멀리즘 조각에 관한 견해들

    로버트 모리스는 1966년 『아트포럼에』에 출간되었던 자신의 글 「조각에 관한 소고 Notes on Sculpture」에서 미니멀리즘의 단일 형태는 자율적이면서 즉물적이라 주장했다. 그는 보편적 예술의 감수성은 “각각의 역사와 문제, 그리고 각 예술이 제공하는 경험은 개별의 관심사와 연관”되어 있다며 조각의 본질에 대해 “조각에서의 자율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은 그것이 그림과 공유하는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공간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조각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특성을 설명한다.6) 그는 이러한 조각의 본질과 더불어 회화에서의 감각과 조각에서의 감각의 차이를 주장하며 예술 감성은 자율성과 비환영주의적 요소에 의해 접해진다고 보았다. 


    모리스의 작품에 대해 마이클 프리드는 ‘연극성(theatricality)’이라는 용어로 비판점을 내세운다. 프리드에 의하면 사물의 즉자적 현존(presence)은 비예술의 조건이며 연극적인 예술은 작품의 공간과 관객을 나누며, 모던 예술이 추구해왔던 자율성은 와해되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7) 더 나아가 그는 인간형이상학주의에 연관된 미니멀리즘의 또 다른 문제를 주장한다. 미니멀리즘 조각은 예술의 감각적 경험을 일반적 경험으로 치환하고 예술의 존재 가치를 무화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험을 일반화하고 혼동하여 관객을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어 그의 경험을 진실을 압도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린버그가 주장한 모더니즘의 목적이 상기된다. 그린버그가 주장한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은 연극적인 미니멀아트와 비연극적인 모던아트 간의 투쟁으로 읽혀진다. 이는 프리드의 입장에서 ‘현존(present)이냐 현존성(presentness)이냐’, 혹은 ‘순간적이고 가시적인 경험, 신념, 감각이냐 혹은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경험, 신념, 감각이냐’라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미니멀리즘의 연극성을 비판하는 입장과 하먼의 견해는 다르다.  프리드는 연극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보았다면, 하먼의 경우 연극성이란 예술의 필요조건이라 보았다. 그는 외부 객체와 나의 복합체가 곧 예술 작품이며, 복합체로서의 예술 작품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지각하고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8) 또한 하먼은 상관주의적인 견해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개념이 아니며 주관적인 욕망 혹은 목표가 개입되는 것도 아니다. 감각적 성질을 알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환원되지 않는 것을 포착하는 것이다. 즉,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실제가 드러나는 순간 감각적 성질과 실제적 사물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곧 아름다움인 것이다.

  

    정리하면, 그린버그는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매체의 순수성과 자율성, 회화의 평면성에서 찾았고, 프리드는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연극성과 인간형이상학주의적 요소를 비판한다. 하먼의 경우는 연극성은 필수 조건이며 환원되지 않는 아름다움, 실제적 사물과 감각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아름다움이라 보았다.

. 동시대미술, 그리고 매체

    현재 전시장에서 설치나 미디어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떠한 전시는 작품을 감상하고 나올 때 문득 사회운동가인가 예술가인가, 예술가로서 사회적 메시지를 획기적으로 전달한 것인가’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예술가로서 사회운동가적인 요소를 빌려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예술 본연의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으로 회귀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의 주장처럼 정말 예술 종말의 시대가 온 것일까. 나아가 이는 ‘동시대에 있어서의 예술의 종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뻗어 나가게 된다.


    미국의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는 동시대를 매체 정보의 벼룩시장이라 언급했다. 대중매체를 말하는 media와 비슷한 듯 다른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의 medium이 이제는 구분이 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이다. 과거 사진과 플럭서스 그룹의 비디오 매체를 시작으로 현재와 미래 예술의 영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비록 기록의 포화상태라 볼 수도 있고, 발터 벤야민의 입장에서는 아우라가 상실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사적 입장에서만 이 같은 포스트미디어 매체를 반대할 순 없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그린버그에 의해 정의된 물리적 매체의 특성과 구별되는 새롭게 성찰한 매체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매체 특정성을 구성하는 원리의 “첫 번째로는 변별적, 자기 변별적으로 그 지지물들의 물리적 성질로 단순히 함몰되지 않는 관습들의 겹침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둘째로는 매체의 내적 복합성을 파악하게 하는 것은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아닌, 바로 한 매체를 지지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상위 질서들의 시작-로봇, 컴퓨터-”이다. 이처럼 그는 포스트-매체 시대의 새로운 매체 조건으로 ‘변별적 특정성의 형식’을 제시한다. 여기서 기술의 상위 질서란 흔히 말하는 기술적 지지체가 아닌, 기술적 토대(기술적 토대에 의해 발현되는) 위의 상위 질서들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디어 매체가 전통적인 매체의 특성과 획기적인 동시대 매체가 결합된다면 동시대 미디어아트는 계속해서 대중들의 시선과 미술사적 가치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주제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술의 총체성인가 예술이 종말인가’에 대한 답은 이분법적으로 단정 짓긴 어렵다. 그러나 할 포스터의 주장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절이 아닌, 모더니즘의 확장이며 이같은 선상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장과 더불어 예측불허하고 무한히 팽창하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마르크스주의』, 김유동 역 (한길사, 2000), 45.
2)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 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역 (문학과 지성사, 2022).
3) 위의 책, 45-50.
4) 위의 책에서 제임슨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실체의 진리의 존재성과 이의 표현성 및 획득성을 확신한 해석학의 시대이며 모던이란 본질과 외양을 나누고 내면은 외면으로 표현되고 해석을 통해 우리는 탐구대상의 깊이를 파악하고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이다.
5) 아서 단토의 경우 장르 구분이 애매하고, 지각적인 성질만으로는 예술의 가치성을 말하거나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리스 이후 예술의 거대 담론을 이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원주의에 기반한 ‘예술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주장해왔다.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 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에서는 이같은 ‘역사적 불연속성’에 대해 제임슨 또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걱정스러운 병리적 증상은 역사적 소멸”이라 주장하며 사물화(thingfication)를 통한 역사화를 강조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예술의 역사적 형식주의를 주장하며 “회화 예술의 독특함을 감소시키는 것은 재현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이라며 매체의 순수성과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칸트의 견해를 빌려 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초월적인 영역으로부터 매체에 고유한 내부적 속성으로 이전하며, 예술적 가치에 판단을 ‘무관심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같은 순수한 취미 판단에 둠으로써 예술의 이념적 도용을 막을 것을 주장한다.
6) Rob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Art Forum 4:6 (Feb 2016): 226.
7) Micheal Fried, "Art and Objecthood," Art Forum 5:10 (1967): 20-23.
8)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갈무리, 2022), 40.

코로나 후유증: 보는 것을 다르게 감각하기

박예린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가장 실감나게 하는 것은 최근 몇 년 간 이동과 접촉이 제한되어 왔던 우리의 몸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일 것이다. 원격의 납작한 감각으로는 벌충하고 대체할 수 없는 그간의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듯, 최근의 전시들은 물리적 맞닿음으로 전달되는 감각의 의미를 재-사유하고자 한다.1) 때문에 작품을 본다는 행위는 물리적 공간과 달라붙어 새삼스럽게도 연극적인 것이 되었다(도 1).

(도 1) 《Step X Step》 설치 전경(촬영: 홍철기), 사진 출처: 코리아나미술관 인스타그램

    기호학자이자 이미지 이론가인 미케 발(Mieke Bal)은 시각의 우월성을 상정하는 시각적 본질주의(visual essentialism)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2) 그녀는 시각성의 비순수성을 인정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보는 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촉각, 후각, 청각 등이 공감각적으로 동원될 뿐만 아니라 기존 지식 체계가 관여한다고 주장했다. SNS와 범람하는 이미지들, 화상 회의 플랫폼 덕분에 끝없이 느껴지던 감염병의 시대에 시각적으로는 반쯤이나마 연결될 수 있었다면, 후각과 미각은 고도의 생리적 영역으로서 물리적 거리가 벌어진 상태로는 결코 온전히 해소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아무리 정교화된 가상 세계도 현재의 기술로서는 현실의 육체가 느끼는 감각, 특히 냄새나 맛 같은 전기적 신호를 완벽하게 모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후각적, 미각적 경험은 탈신체화되고 비물질화된 몸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서 신체가 지니는 의미를 가장 절감하게 했다.

    이처럼 코로나 시기에 우리가 경험한 시각성이 특정한 감각에 의해 특유한 것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몸의 부재와 더불어 사람들이 많은 곳일수록 비말을 가리는 마스크를 통해 경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 본다는 행위가 후각과 미각이라는 감각이 차단된 채로 작동했기 때문에, 이전 시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재구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본다는 행위는 작품의 이미지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며, 작품을 온몸으로 (특히 후각, 미각 등 그간 격하되어 온 감각으로) 감각하는 것에 가까워졌다.


    후각은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그러했듯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이다. 그런데 주지하듯 코로나 바이러스는 후각과 미각을 앗아가는 후유증을 남기고 가는 병원체였다. 그렇다면 코로나 시기는 일종의 망각의 시기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작품들이 매체성을 잃고 단순한 이미지로 환원되어 버리는 기이한 시기였던 것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그 기억을 복기해낸다는 것의 의미는 물론 작품의 매체성으로 다시금 되돌아간다는 측면에 더불어, 그간의 망각의 본말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후각과 미각을 사용한 작품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감상에 있어 해당 감각이 지닌 함의를 고려하는 것이다. W.J.T.미첼(William J.T. Mitchell)의 말대로 시각(vision) 자체는 시각적 매체가 아니며, 우리가 시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매체와 구분짓는 것은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제시하듯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실천(practice)”이기 때문이다.3)

1)  아마 가장 두드러진 사례들은 《Step x Step(코리아나미술관, 2023.9.14-11.30)에서와 같이 기술로부터 본유의 몸으로 회귀하여 그 움직임의 가능성을 탐색하거나, 조각충동(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022.6.9-8.15), 《기억・공간(아르코미술관, 2023.4.14-7.23), 오프사이트(아트선재센터, 2023.8.18-12.14), 스토커(SeMA 창고, 2023.10.5-10.29)에서처럼 물질적인 작품이 전시되는 물리적 공간을 의식하기도 한다.
2) 그녀의 비판은 제목이 시사하듯 시각문화(visual culture) 영역을 겨냥한다. Mieke Bal, “Visual Essentialism and the Object of Visual Culture,” Journal of Visual Culture 2 (2003), 5-32.
3) W.J.T.미첼, 시각 미디어는 없다, 미디어아트의 역사, 올리버 그라우 편집, 주경란 역 (미진사, 2020), 3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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