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겠는데?

Fathers’ Note

어느덧 썬데이 파더스 클럽의 서른 번째 레터입니다! 이번 레터는 아들 셋 아빠 정우 님이 보냅니다. 이번 원고를 마감하며, 정우 님이 “부모님이나 이모님, 가족들의 도움을 받는 분들이 부럽고, 특히 한부모님들은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전해왔습니다.

아내가 첫째 아이를 데리고 제주로 갔다. 장인어른까지 모시고 갔으니 3박 4일 여행이 휴식보다는 위아래로 의전을 수행해야 하는 출장에 가깝겠다. 물론 여행 자체만으로 힐링이겠지만 힐링의 주체는 아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내가 아이들과 제주로 갔다’라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현관 앞까지 배웅을 했겠지만 ‘아내가 아이와 제주로 갔다’인 상황이라 전혀 설레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머지 두 아이들을 혼자 책임져야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어느덧 육아 경력직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육아 이력서라는 게 있다면 ‘비즈니스 디밸롭먼트’나 ‘어카운트 매니지먼트’ 정도의 단어는 나의 레쥬메에 무리 없이 끼워 넣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회사생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신입으로 입사해 이 일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주어진 업무를 정신없이 하다 보면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된다. 슬며시 자신감이 생긴다. ‘이거…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겠는데?’

아이들을 조금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조금 일찍 퇴근해 다시 아이들을 데려오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날, 계획대로 아이들을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집에 들여보냈다. 여유 있게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자리에 앉고부터 쫓기기 시작했다. 쌓인 일을 허겁지겁 처리하면서 계속 시계를 본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금세 다가왔다.

퇴근길에도 온통 시간을 계산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픽업하고 집으로 온 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칠 때까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 아직 저녁 메뉴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초조함에 침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늘 데리러 오는 엄마가 아닌, 아빠가 어린이집 현관에 서 있는 걸 보고 둘째와 셋째는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금방 차에 올라탔다. 하필이면 퇴근시간이라 막힌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집에 도착해 아이들에게 손을 씻으라 하고 얼른 밥솥에 쌀을 올린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연다. 다행히 냉동고에 아내가 사놓은 닭곰탕 두 봉지가 있다! 얼른 뜨거운 물을 받아 대충 해동하고 가위로 윗부분을 잘라 냄비에 담는다. 중간중간 아이들의 눈치를 본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곰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아이들은 슬금슬금 부엌으로 눈길을 보낸다. 상을 차린다. 밥솥은 취사가 완료되었다며 뜨거운 김을 뿜어낸다. 얼른 곰탕을 그릇에 담고 밥을 말아 아이들 앞에 내었고 아이들은 고맙게도 김치 반찬 하나로 국밥을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웠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과 아침으로 시리얼을 대충 챙겨 먹고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막내가 손바닥으로 코 밑을 스윽 훔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바닥을 낚아채서 보니 축축하다. 막내의 코에는 콧물이 맺혀 있었고 급하게 연차 휴가를 신청하는 나의 눈에는 습기가 맺힌다. 두 줄이 뜬 자가 검사 키트를 들고 보건소로 달려가 PCR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 막내는 확진 판정을 받았다. 보름 전 나머지 가족들이 전부 확진되었을 때 끝까지 음성이더니, 이 녀석 이러려고 여태 버텼구나.

아내에게 상황을 알렸다. 아내도 정신이 없었다. 제주에서 실시간으로 일정을 짜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다음 목적지를 검색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음 밥집을 검색하고 있단다. 두 아들과 함께 자가 격리에 들어간 나 역시 당장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저녁 또한 누가 차려줄 리 만무하니 적어도 다음 끼니와 그다음 끼니까지 미리 생각해야 된다.

중간중간에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했고, 밀린 회사 일의 우선순위도 정리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나 자신의 체력 안배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힘을 뺄 땐 적절하게 빼고 있어야 나중에 힘을 쓸 수 있으니까.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면서 몇 시간 앞을, 며칠 앞을 내다봐야 했다.

아이들을 며칠씩 혼자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쉴 수 있을 때 한 명이라도 제대로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를 하나 데리고 있으나 둘을 데리고 있으나 셋을 데리고 있으나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두 명만 돌본다고 2/3 만큼만 힘든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나머지 부모도 1/3 만큼만 힘든 것도 아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차피 고된 일이라 더 고되고 덜 고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 가벼운 마음으로 며칠씩 출장을 갈 수 있었고 아내도 가끔 며칠씩 휴가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나름의 깔끔한 인센티브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내가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도 지쳐있었고 집에만 있던 나도 지쳐있었다. 둘이 거실 소파의 양 끝에 멀찍이 떨어져 주저앉았다. 지난 나흘은 둘 중 한 명도 제대로 쉬지 못한 시간이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휴식이라는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나에게 네가, 너에게 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제때 돌아와 준 아내와 큰아들이 반가웠다. 나흘 동안 한 끼 걸러 한 끼 국밥을 말아준 아빠를 원망하지 않고 맛있게 척척 먹어준 두 아들도 고맙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내 육아 이력서에 항목 하나를 추가해 본다. ‘리스크 매니지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