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고닉, 이영아 옮김, 마농지, 2023

 

편집자가 되고 나서는 타인의 삶을 엿볼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간 반비에서 나온 훌륭한 인문에세이들 덕분인지, 투고 원고의 대부분이 글쓴이의 삶이 녹아든 에세이거든요. 정성이 담긴 글을 읽는 일은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읽는 사람으로서 제가 가진 언어가 얼마나 빈약하고 한계가 분명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원고에 담긴 한 개인의 삶을 소재로만 납작하게 읽어내고, 풍성한 사유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기도 하고요. 제 앞에 놓인 삶의 기록과 노동의 결과물을 더 풍성하고 꼼꼼하게 읽어내기를 기대하며 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간 에세이스트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고닉이 전해주는 자기 쓰기에 관한 신랄한 통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일라이 클레어, 하은빈 옮김, 동아시아, 2023

 

장애와 돌봄을 다루는 철학책을 편집하고 있는 요즘, 장애학 관련 도서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흥미롭고 탁월한 신간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 눈에 들어온 책은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이었어요. “극복과 치유 너머의 장애 정치”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장애와 치유를 주제로 불구의 몸-마음에 대해 쓴 책이라고 합니다. 장애, 퀴어, 계급의 교차점에 대해 사유한 전작인 『망명과 자긍심』을 읽으면서, ‘체온’이 전해지고 촉각으로 감각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글이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번 책도 전작처럼 저자의 탁월한 사유와 체온이 전해지는 글쓰기를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으며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알렉사 라이트, 이혜원·한아임 옮김, ORCABOOKS, 2021

 

아주아주 오래전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엘리펀트 맨」을 봤습니다. 다발성 신경섬유종증 환자 ‘존 메릭’의 실화를 바탕으로, 장애로 인한 외형 때문에 프릭쇼에서 활동하며 세간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엘리펀트맨’의 이야기를 담아냈지요. 그리고 『괴물성』에도 ‘코끼리맨’ 조셉 메릭이 등장합니다. ‘인간 괴물’의 한 사례로서요. 『괴물성』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재현되어온 괴물들의 역사를 통해 ‘정상’이라는 개념을 탐구하는 책입니다. 비정상, 기괴함, 광기, 타자성 등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재현되어 왔는지를 밝히는 이 책을 통해, ‘괴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연습을 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 「엘리펀트 맨」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감상해보고요.

지난 8월 25일, 다른몸들에서 주최한 ‘질병서사포럼’에 다녀왔어요.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의 저자 리단 작가를 비롯해,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출간한 여섯 저자들이 패널로 나오셨는데요. 이날 장바구니에 담은 책 중 몇을 소개합니다.

안희제, 동녘, 2020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저자는 크론병으로 투병 중이며, 여기에서 출발해서 한국 사회가 장애와 질병을 대하는 태도, 소위 ‘청년’에게 요구되는 불가능한 기준, 돌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까지 나아갑니다. 포럼에서 안희제 작가는 책을 쓰면서 소위 ‘질병서사’로 불리는 책은 거의 참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책은 장애운동과 학생운동의 맥락 안에서 쓰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지점, ‘질병’과 ‘장애’를 어떻게 함께 말할 것인가였어요. 보통 질병에 관한 이야기는 회복-건강으로 나아가는 서사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요. 『난치의 상상력』이 기존 서사에서 벗어난 방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하늬, 아몬드, 2023

 

이하늬 작가의 첫 책은 『나의 F코드 이야기』로, 자신의 우울증 투병기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책, 『나의 조현병 삼촌』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합니다. 환자의 가족(조카), 기자, 정신질환 당사자……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삼촌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 책입니다. 빨리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 때문인데요. 리단 작가의 차기작으로 중증 정신질환에 관한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근래 수년간 그래도 비교적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 경증 환자들에 견주어, 조현병을 비롯해 정신증을 경험하는 중증 환자들의 삶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조현병 삼촌』은 소재나 입장, 태도 면에서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는 책이리라 생각되어 좋은 참고가 될 듯해요.

양선아, 한겨레출판, 2022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는 저자의 유방암 투병기를 담은 책입니다. 암은 이제 한국에서 상당히 흔한 병이 되었고, 내가 암 진단을 받거나 투병하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될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투병 중에 어떤 경험을 하는지, 어떤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잘 들리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 책은 그런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쓰여 있는 동시에 먼저 투병의 길을 간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지침과 조언 역시 담고 있다고 합니다.

캐롤 린드스트롬 글, 미카엘라 고드 그림, 노은정 옮김, 오늘책, 2022

 

지난 8월 31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북토크를 진행했어요.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김지은 선생님,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의 무루 작가님께서 패널로 참여해주셨는데요, 90분 동안 글과 그림으로 이뤄진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의 세계를 정말 신나고 세밀하게 탐사한 느낌이었어요. 중간중간 다양한 좋은 그림책, 아동청소년문학을 소개해주셨고요! 저는 열심히 받아적느라 바빴는데요, 그중에서도 『워터 프로텍터』라는 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2021년 칼데콧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송유관이 파괴하려는 물과 땅을 지키고자 하는 인디언 소녀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말과 그림으로 그려내요. 시내, 호수, 강, 폭포처럼 흐르는 눈물…… 물이 모든 생명의 세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표현이 ‘맞서 싸우는’ 행위에 더 큰 위엄과 힘을 실어줍니다.

그 외에도 책타래에서도 소개한 적 있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 동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우리가 보이나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일하고 활동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들려주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리고 아동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해온 김환희 선생의 『옛이야기와 어린이책』 등 다양한 책이 풍성하게 이야기되었어요.

일라이 클레어, 하은빈 옮김, 동아시아, 2023

 

교차성이라는 개념이 알 듯 모를 듯 할 때,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으면서 ‘교차성 정치’란 이런 거구나 조금이나마 깨닫고 느낄 수 있었어요. 선천적 뇌병변을 가진 장애인, 퀴어, 트랜스젠더, 노동계급이라는 자신의 다중적인 정체성에서 장애학, 퀴어학, 여성학……이 교차하는 사유를 끌어내는 문장들이, 무엇보다 그 새로운 글쓰기가 너무 아름답고 멋지고 재밌었어요. 일라이 클레어가 그러한 자신의 ‘몸’을 성찰하는 방식 또한 잊을 수 없고요. 그런 그의 다른 저작을 읽을 기회가 생기다니,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눈부시게 불완전한’이라는 매력적인 형용모순 같은 제목 그리고 이 책을 옮긴 하은빈 번역가가 “얼룩덜룩한 책”이라고 칭한 것에도 마음이 설레네요.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은 myy님, 우리 같이 읽을까요?!?😸(...tbc)

마크 피셔, 대런 앰브로즈 엮음, 박진철·임경수 옮김, 리시올, 2023

 

한국에서도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등으로 주목받은 뛰어난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의 새 책이 출간되었어요.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를 “쾌락주의적 우울증”에 빠져들게 한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통찰에 너무(너무) 공감하면서 읽었는데요. 이 책 『k-펑크 1』는 마크 피셔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블로그에 쓴 글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피셔를 설명하는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그의 주요 활동 무대가 블로그였다는 것이에요. ‘k-펑크’라는 이름의 그의 블로그는 2000년대 초반 큰 인기를 얻었고, “영국에서 출간된 대부분의 잡지보다 우월한 1인 잡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비평가, 활동가, 작가들의 블로그 보기를 즐기기에, 마크 피셔가 십수 년 전 자신의 블로그에 개진한 담론과 비평을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2020년대에도 블로그가 공론장의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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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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