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만개한 벚꽃이 막 흩날릴 때일 거예요.
사월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만개한 벚꽃이 막 흩날릴 때일 거예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지금은 벚나무, 매실과 살구와 사과와 복숭아 나무, 목련, 산수유, 만리화… 모두 꽃 지고 푸릇푸릇한 잎을 가득 달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눈부신 시간이 흐르고 이제 누가 누구였는지 알기 어려운, 개개의 고유함보다 푸르름이라는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지고 있어요. 그 풍경이 지금 소묘네 육묘를 보는 듯도 합니다.
    오랜만에 '이치코의 코스묘스'가 돌아왔어요. 2024년 연말정산 이후니까 올해는 처음이네요! 이번 글에는 소묘의 기둥인 육묘(삼삼,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의 극적인 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순간들 뒤로 다시 이어지는 날들. 그 사이를 함께 오래 걸어요.
_Q 당신에게 극적인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_A1 모르겠습니다. 살다 보니 그냥 여기까지 왔습니다.
_A2 인생이 온통 드라마인걸요. 삶 전체가 극적인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A1과 A2 모두 곤란한 답변입니다. 무기력할 정도로 재미없거나 지나치게 피곤한 인생을 달가워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부분 A1과 A2 사이에서 삶의 궤적을 만들어갑니다. 둘 사이라고 해도 그 중앙을 기준으로 정규분포를 이루는 건 아닙니다. A1쪽으로 상당히 치우친 그래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극적인 순간은 드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극적劇的이라 부르지도 않았겠죠.
 
극적인 사건이라고 하면 긴박한 상황을 연상하게 됩니다. 사전의 뜻을 봐도 그렇습니다. "극을 보는 것처럼 큰 긴장이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 얼마 전 시즌이 끝난 여자배구가 그렇게 극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김연경 선수였습니다. 배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름을 모를 수 없는 배구의 황제, 김연경 선수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20년을 한국 배구의 최고 선수로, 세계 무대에 진출한 뒤에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린 영웅다운 마무리였습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했습니다. 거기다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MVP를 모두 휩쓸며,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물러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쪼매 더 하셔도 되는데..ㅠㅠ)
 
우승의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김연경 선수가 속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가 정규리그 때 워낙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줘서 금세 승부가 날 줄 알았습니다. 흥국생명이 1, 2차전을 연달아 이길 때만 해도 5차전까지 갈 줄은 몰랐습니다. 상대였던 정관장 레드스파크스의 반격이 매서웠습니다. 5차전마저 마지막 5세트까지 가는 초접전 끝에 승부가 났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었던 5세트 경기를 지켜보며 얼마나 긴장되고 조마조마했는지.. 올해 봄배구는, 누가 그러더군요,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 먹는다고, 정말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을 만큼 극적인 순간들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만약 내가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세트에 코트 위에 있었다면 그 엄청난 압박을 견딜 수 있을까? 어림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TV로 구경만 해도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쭈뼛거리고 심장이 요동치는데 코트에 선다고? 택도 없는 소리를..
 
박혜미 작가님의 <사적인 계절>은 풍경 같은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섬세한 시선과 세밀한 묘사로 아름답게 그려낸 일 년 사계의 장면과 함께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마치 그림처럼 독자의 시선을 머무르게 합니다. 오늘의 계절은 어땠냐고 묻는 듯한, 그리운 친구의 안부 편지나 선물 같은 책입니다. 전혀 극적일 것 같지 않은 이 다정하고 세심한 책에 (적어도 저에게는) 아주 극적인 순간이 하나 있습니다. 63쪽부터 시작되는 2011년 여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비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식하려는 듯 퍼부었"습니다. 걱정에 잠 못 이루다가 비가 잠잠해진 틈에 방문한 반지하 작업실은 이미 물이 무릎까지 차 있습니다. 수압으로 인해 열리지 않는 문을 간신히 열었을 때 멀리서 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책들이 둥둥 떠다니는 작업실 책장 꼭대기에 잔뜩 움츠려 있던 고양이는 반항 한번 없이 작가님 품에 안깁니다. 온몸을 떨며 울어대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작가님은 몇 번이고 말합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작가님의 고양이 오레오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언덕 위에 있어서 비에 잠길 일 없다는 주인의 말을 믿고 오레오를 작업실에 두고 왔던 작가님은 얼마나 걱정스러웠을까요. 그러다 찾아간 작업실 입구에 물이 차 있는 걸 봤을 때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요. 오레오가 작가님 품에 안기는 순간은 (고양이라면 일단 감동할 준비가 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순간입니다.
 
도서관옆집의 육묘들도 제각각 극적인 순간들 있습니다. 막둥이 시월이는 입양과 파양이라는 드라마적 사건을 겪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시월이를 데리고 내려가 입양자의 집에 아이를 내려놓은 뒤 빈 캐리어만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시월이를 입양해줘서 고맙다는 생각, 시월이가 잘 지낼까 하는 걱정, 이제 시월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뒤섞여 혼란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안도의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었죠. 하지만 딱 100일 만에 그 마음은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입양자가 시월이를 못 키우게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세상의 모든 욕을 간신히 참고 뱉어낸 한마디는 지금 당장 시월이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집에 시월이가 하루라도 더 있는 게 싫었습니다. 시월이를 데리고 온 입양자에게 파양에 이유가 어디 있어, 니가 나쁜 사람이야! 라는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시월이를 다시 보았을 때는 역시나 안도의 마음이 제일 컸습니다. 시월아, 이렇게 다시 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치코와 미노는 길에서 구조되는 과정이 드라마였습니다. 시내 어느 골목길에서 눈두덩이와 코가 다 짓무른 채 가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다 얼굴을 비비고 있던 치코를 보자마자 큰일 났다 싶어서, 옆에 있던 치코의 엄마한테는 미안했지만 바로 둘러업고 병원을 달려간 일은, 다급한 상황이긴 했어도 극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위태롭게 살아가는 길냥이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병원에서 5박 6일 머무르며 말끔하게 치료받는 동안 완전 개냥이가 되어버려 다시 엄마 곁으로 돌려보내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운명의 데스티니인가? 'comoedia'적 요소가 잔뜩 강조된 운명이긴 했지만요. 치코가 도서관옆집에서 개그 캐릭터를 담당하게 된 건 필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 만남부터 그렇게 희극적이었으니까요.
 
미노를 구조할 때는 마치 재난영화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우주를 떠도는 돌덩이와 지구의 충돌을 다룬 두 편의 재난영화가 있습니다. 1998년에 개봉한 <아마겟돈>은 주인공의 용감한 희생으로 지구와 행성의 충돌을 막아냅니다.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재난영화는 이러한 해피엔딩스러운 결말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핵심적인 극적 요소가 바로 재난의 극복일 테니까요. 반면 2021년에 개봉한 <돈 룩 업>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며 지구를 박살 내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고양이 구조라는 장르적 관점에서는 <아마겟돈>처럼 미노를 성공적으로 구조하는 것이 마땅하나, 당시 상황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돈 룩 업>의 혼돈이었습니다.
🌿 [우리가 모르는 낙원] 무루 신작 에세이 사전연재 예고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작가의 신작 에세이를 준비 중입니다. '무루의 이로운 그림책 읽기'가 부제로, 5년 동안 더욱 깊어진 무루 작가님의 그림책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5월 20일 출간 예정으로, 레터 구독자 분들에게 세 편의 글을 미리 전하려 합니다. 
5월 1일(목)부터 매주 목요일 3회에 걸쳐 찬찬히 만나주세요. 함께 보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꼭 소문내 주시고요 ;) 그럼 다음 편지는 무루님의 글로 띄울게요!
🌸 [사적인 계절] 원화전 X 카페책자국(제주)
사슴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잘 마쳤습니다. [전시 풍경 보기]
제주 종달리의 아름다운 공간 카페책자국에서 작은 전시를 이어가요. 원화 12점과 함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보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제주에 계시는 분들, 또 좋은 계절에 제주를 찾으시는 분들께 사적인 풍경 선사해 주기를 바라요. 많이 찾아주세요 :)
• 일정: 4.30(수) - 5.26(월) 10:30-18:00(화 휴무)
• 장소: 카페책자국 (제주시 구좌읍 종달로1길 117)
✏️ [작가의 방] 4~5월 예약하기
•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4월의 두 번째 편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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