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신학자 #84 상상력이 풍부한 플라톤은 잊으세요
#85 나는 부동의 원동자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86 어긋난 허벅지 관절
#87 로완 윌리엄스의 글쓰기
#88 장 칼뱅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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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
편집자 B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무언가가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 어긋난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합니다. 급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아쉬운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게 된’ 야곱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고대인들에게 허벅지 관절은 사람을 지탱하게 만드는 사람의 기초, 더 나아가 인생의 근원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야곱의 어긋난 허벅지 관절은, 어쩌면 그의 삶 전체가 뿌리째로 어그러졌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평생 ‘어긋난 허벅지 관절’을 가진 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삶의 근원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자신의 삶을 절뚝거리게 만든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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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모든 겉치레를 몰아내어 평온한 상태가 된 야곱은 먼저, 자신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혼자 뒤에 남아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이는 누구나 하나님의 모습에 가까이 가기 때문입니다.
_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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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뻔했던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와 이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렸던 이삭에게는 왠지 모를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삭의 이야기는 다른 족장들에 비해 성경에 상당히 짧게 등장합니다. 오히려 이삭의 자손 중 한 명인 야곱의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도 중요한 부분이 있겠지만, 이번에는 야곱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였습니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은 팥죽 사건과 아버지에게 받는 축복 사건으로 인해 갈등이 깊어집니다. 야곱은 결국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랜 기간을 머무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과 깊은 갈등이 있었던 형 에서와 화해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서가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먼저 보내 지금까지 있었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에서가 자신을 만나러 4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으레 겁에 질려 자신의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눕니다. 한 떼를 먼저 보내 몰살을 당하면 다른 한 떼와 함께 도망가려고 했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시행하기 전 야곱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형을 위한 예물을 택한 떼를 먼저 가게 한 다음에, 자신과 함께한 모든 사람들도 앞서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는 홀로 얍복 나루에 머뭅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그는 야곱을 이기지 못했고 야곱의 신체 중 한 부위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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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yarek)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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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부위가 ‘허벅지 관절, 넙적다리, 환도뼈’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인 “야레크(yarek)”입니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됩니다. 이 일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이었는지, 그 이후로 짐승의 엉덩이뼈를 먹지 않는다고 전해집니다(창 32:32).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은 왜 어떤 사람이 야곱의 ‘야레크’를 쳤을까 하는 점입니다. ‘야레크’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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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도 야레크가 가진 기본적인 의미가 ‘사람의 기초, 인생의 근원’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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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의 생각에 ‘야레크’는 사람이 지탱하고 설 수 있는 그리고 걸을 수 있는, 더 나아가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의 기초였습니다. 그리고 확장된 의미로 인생의 근원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 야곱의 야레크를 치심으로 인해 끝까지 이겨보려고 노력하는 야곱을 중심을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끌어가게 하시기 위해 그의 중심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근원을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평생 겸손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일평생 지울 수 없었던 그 신체의 흔적은 하나님을 찾기에 충분했습니다. 잊을 만하면 자신의 야레크로 인한 아픔을 보며 그는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사건은 야곱에게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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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곱에게 아픔의 자리였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생명의 번성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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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허리(yarek)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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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야레크를 다치는 고난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족장들에게서 이어진 자손의 약속을 가슴 아픈 고난의 자리에서 이루어 내셨습니다. 굳이 성경에 표현된 단어가 “야레크”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인 “야곱의 자손”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인간의 모든 상상을 뛰어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교만함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중심을 무너뜨리셨던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 사람의 어떤 환경도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믿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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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단어가 사용된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보면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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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yarek)를 칠지어다(겔 21:12).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yarek)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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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서 “야레크”는 “허리, 넓적다리, 볼기”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언서에 나타난 이 두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회개’라는 공통된 주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레크로 인해 아픔을 겪었던 것은 야곱에게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아픔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예언자들의 시대에 그들은 회개를 하며 왜 허벅지 관절을 쳤을까요? 앞서 야곱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했던 하나님의 관점을 그대로 적용해 보면 됩니다. 첫째는 그들의 중심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다는 것, 그래서 회개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삶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너져야만 함을 야레크를 치며 다시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그것으로 인해 삶의 중심과 근원이 하나님이었을 때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다시 생각나게 하였을 것입니다. 야곱 한 사람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역사를 이제는 민족 전체가 생각하며 하나님 관점으로 다시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 바로 회개하며 야레크를 쳤던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레크를 맞으면서 중심이 무너진 야곱은 평생 절망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았지만, 그는 이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아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또한 야곱은 치명적인 아픔을 경험했고, 그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의 인생을 통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야레크로부터 생명을 탄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야레크를 치며 때마다 삶을 돌이켰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오늘날 우리의 야레크를 생각하며 신앙을 점검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셨던 일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점검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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