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신학자
#97 장 칼뱅, 위로의 편지
#98 칼뱅은 '칼뱅주의'라는 말을 증오했다
#99 수산나 웨슬리에게 ‘체험’은 필수였다
#100 100호 특집!
#101 존 웨슬리, '칭의'를 말하다

🎁 100호 기념, 피드백 이벤트(발표: 2월 22일)

이달의 신학자 100호를 기념하며 피드백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이달의 신학자 뉴스레터를 함께 읽어 오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추첨을 통해 다섯 분께 책 『신학이란 무엇인가 Reader』를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하단 FeedBack 클릭).

독자님, 안녕하세요.

하늘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기 힘든 장소를 하나만 고른다면, 저는 장례식장을 택하겠습니다. 굳이 세어 본다면 백 번은 족히 갔던 곳이지만, 여전히 어렵고 무거운 곳입니다. 그곳은 공기마저 나머지 세상과 다릅니다.

 

사람마다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조용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누군가는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다고, 누군가는 너무 함께 침울에 빠져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조문하는 사람에 따라, 유가족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요.

 

저는 특별히 가족을 잃은 사람을 만나면, 나사로의 죽음을 대하셨던, 그리고 그의 떠남을 슬퍼했던 가족을 마주하셨던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원망할 때, 주님은 그를 다그치거나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울고 있는 유가족을 보며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 죽은 나사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고, 계속해서 비탄에 잠기셨지요. 바울 역시도 로마 교회에 쓴 편지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명한 바 있습니다.

#97 장 칼뱅, 위로의 편지

칼뱅이 살았던 16세기 유럽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워낙 긴 시기였고, 격동의 세기였으며, 넓은 지역이었기에 속단하기를 어렵습니다만, 당시 유의미한 움직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신 스토아 학파라는 운동이었지요.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근간으로 했던 이 움직임의 한 중간에는 유스투스 립시우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일타 저자였던 립시우스는 죽음이나 그를 대하는 태도가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립시우스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살던 마을이 완전히 약탈당했습니까? 허탈함 속에서 먼지 구덩이 가운데 앉아 그저 땅에 동그라미만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인간의 운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전쟁, 폭정, 살육, 죽음만이 우리를 노리며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어느 하나도 당신의 뜻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두려워할 수 있을지언정, 어느 하나 막을 수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갈지언정, 어느 하나 피할 수 없습니다. … 반드시 들이닥칠 운명 가운데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운명이 나아가는 방향에 우리의 마음을 맞추는 길밖에 없습니다.”

립시우스에게 죽음을 포함한 모든 몸과 마음의 고통이란 모두 운명에 달린 일입니다. 인간은 필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걱정과 도망 모두 무의미하다고 하지요. 이 가운데 유일한 위안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 립시우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는 아마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슬퍼하는 대신 그 필연에 마음을 맞추라고 단언했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조언은 극도로 잔인합니다. 어디 가서 저런 이야기를 했다간 뺨이나 맞기 십상이겠지요. 그러나 16세기에는 다수가 수긍하고 따르려고 노력했던 사상이 이런 모습의 운명론이었습니다.

이토록 시대가 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칼뱅의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칼뱅의 위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칼뱅을 보호하고 엄호하고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고 부족한 그의 생각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거나 배울 점은 없는지 한번 살피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편지는 1541년, 칼뱅이 31세였을 때 쓴 서신입니다. 아직 가족을 잃은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에는 어린 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라고 하면, 칼뱅이 이미 명성을 쌓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핵심 개신교 인사들이 칼뱅과 의논하기를 원했고, 많은 신자들이 여러 어려움은 가지고 오며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편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클로드와 선생님의 아들인 루이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완전히 압도된 상태로 보냈습니다. 저는 오직 비탄하면서 매일을 가득 채웠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여러 방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제 영혼을 지켜주시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저는 거의 없는 사람처럼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반쯤 죽은 사람처럼 되어, 제게 맡겨진 책무를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칼뱅의 글을 읽을 때면, 저는 그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너 혹시 T야?” 그러나 그에게도 부드럽고 섬세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신자의 안부도 묻지 않고, 자신의 근황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첫 문장부터 자신이 얼마나 침울했는지 늘어놓습니다. 하루도 아니도 여러 날을 온전히 슬픔 가운데 허우적거렸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중시한 사람인데, 시체처럼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만큼 비통해 했는지 설명합니다.

“먼저 저는 가장 탁월했고 충실했던 친구, 저와 너무나 가까웠던 친구를 빼앗겼기에 그토록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큰 슬픔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아들이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정말 인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으로 꽃필 그런 시기에 이 세상을 떠났기에 그러했습니다. 누구보다 장래가 기대되는 청년이었기에, 누구보다 저를 잘 따랐던 청춘이었기에 그러했습니다.”

칼뱅은 자신이 슬픔에 빠진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합니다. 첫째로는 자신이 루이와 너무도 가까웠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미래가 기대되는 청년이 몹시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칼뱅은 이렇게 자신의 비참함을 풍성히 표현한 뒤, 위로의 말로 넘어갑니다.

“저는 타인의 슬픔을 대할 때 결코 저의 강인함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한 선하심으로 제게 허락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이미 제가 제 자신의 침울 가운데 빠졌다가 거기서 건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 그래서 저는 이 짧은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치료하시고 고쳐주실 때 사용하신 위로를 선생님과 원합니다.”

“더불어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죽을 사람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또 강인한 마음의 소유자이고,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라면 애통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칼뱅은 자신이 타인의 슬픔을 마주하는 방식을 설명합니다. 스스로의 견고함을 뽐내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 역시도 깊은 우울 가운데 허우적거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 끌어내주셨다고 말합니다. 칼뱅은 그저 자신이 주님께 받은 위로를 나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하나님이 자신을 회복하실 때 선물해 주신 위안을 전해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그 위안은 무엇일까요?

“가장 확실하고, 유일무이하게 굳건하고 분명한, 결코 시들 수 없는 위로의 원천이 있습니다. 바로 선생님 마음속에 있는 경건이라는 정서에서 위안이 흘러나옵니다. 저는 이미 선생님의 영혼 속에 이 경건이라는 샘물이 넘치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탁월하신 그분,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가르치신 바를 마음속에 되새길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십시오.”

산 위에서 아래로 위안이 흘러 내려오기 위해서는, 꼭대기에 샘물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칼뱅은 이 샘물의 이름이 경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고,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그 경건이 참 위로의 출발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말 속에는 평안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을 스스로 묵상하는 일,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다지는 일이 결국 핵심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이 경건에서 나오는 위안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칼뱅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위로 신학을 펼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소유였던 루이를 선생님께 한 계절 동안 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잠시 맡기셨던 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 또한 주님께서는 성급하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우연이란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충동으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오직 정의롭고 고결한 일만을 예지하시고, 결정하시고, 이행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오로지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것만을 주십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주님께서는 응당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시고 통치하실 자격이 있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루이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는 주님 곁으로 갔을 때 이미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일부임을 참된 증거로 증명한 뒤였습니다. 주님의 자녀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이미 맺은 상태였지요. 그러하기에 루이는 단순히 우리에게서 떠났다고만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루이라는 아름다운 나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이 땅에서 맺었고, 그 후로 여기에서 떠나 하나님 나라로 옮겨 심어졌습니다.”

“네, 루이는 과연 이 한순간에 불과하고 순식간에 희미해져 버릴 삶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멸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결코 루이를 영원히 잃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한 부활 가운데 다시 만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두 형제와 우리들을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모두를 온전히 그 위대한 영광 가운데 하나로 묶어주실 것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여러 계절을 겪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매년 만나고, 또 헤어집니다. 이 계절들 가운데 하나님은 때로 무언가를 빌려주기도 하시고, 다시 가져가기도 하십니다. 칼뱅은 그렇게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유였다고,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그저 빌려 쓴다고 설명합니다. 케케묵은 위로처럼 “다 하나님의 뜻이니 받아들이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좀 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주님 되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루이를 잃었다고만 생각하지 않기를 조심스레 권면합니다. 루이는 꺾여 버린 꽃도 아니고, 잘려버린 나무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이 땅에서 탁월하게 만발했던 루이가, 지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옮겨 심어졌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칼뱅, 수신자, 루이는 모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된 연합을 누릴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하지만 칼뱅의 위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칼뱅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과, 지금 루이가 있는 곳과, 미래에 만날 소망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제게 아들을 잃은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아버지로서 품고 있는 사랑을 떨쳐 버리거나 억누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하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에게 모든 비탄은 내려놓으라고 말씀드릴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바위처럼 살아야 한다는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간다움은 버려야 할 가치가 결코 아닙니다.”

칼뱅은 수신자에게 슬픔을 내려놓지 말라고 합니다. 어느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다르게, 우리는 돌이 되어 모든 감정에서 탈출해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슬픔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 중 있는 감정입니다. 가족이 죽었다면 당연히 이별을 비통해 해야 하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고 하지요.

이 편지는 자신의 슬픔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칼뱅으로. 그리고 칼뱅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정한 위로는 경건 안에 있음을 피력한 뒤,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다스림, 부활 소망을 외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신학이 소중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울어도 괜찮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슬픔, 크고 작은 이별을 맛봅니다. 그 침울 가운데 어떻게 위로를 찾을지, 또 어떻게 위안을 전할지에 있어서 정답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칼뱅처럼 함께 참으로 슬픔 가운데로 나아가고, 칼뱅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 함께 기억하고, 칼뱅처럼 고통을 온전히 끌어안기를 권하는 일, 그 일은 우리 역시도 잠잠히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독자님과 소통하며 함께 <이달의 신학자>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달의 신학자 뉴스레터를 함께 읽어 오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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