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현관을 나서며 쌀쌀해진 날씨에 선선한 충격을 받는 요즘입니다. 재택근무를 사랑하고 반바지를 사계절 동안 입는 사람이라 외기 변화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어쨌건 앞으로도 저는 반바지를 입고 이곳저곳을 활보할 테고(반바지의 기능은 체온을 낮추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가올 맹추위가 그리 두렵지도 않습니다만, 이번 겨울은 어쩐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낯설다고 할까요? 서른 번 넘게 재회한 겨울이 낯설다고 하니 어딘가 모순 같습니다. 어쩌면 낯선 것은 겨울이 아니라 겨울이 찾아오는 속도일지도 모릅니다. 성큼성큼, 겨울의 보폭은 무척이나 넓습니다. 요즘은 모든 게 빠르게 다가옵니다. 새로운 기술과 즐거움과 콘텐츠가 나오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가요? 잊혀지는 속도는 또 어떻고요. 세상이 빨리 바뀌니 계절도 빨리 바뀌는 건가? 사람이 분주하니 지구도 분주해지는 건가?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이렇게 몇 주가 지나면, 아니 며칠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하얀 눈이 아침 현관문 앞에 도착해 있겠죠. 마치 지난 봄, 여름, 가을이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매끈하고 새하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겁니다.
어린 나는 책장에 꽂힌 위인전을 아무거나 하나 골라 펼쳐 봅니다. 운이 좋다면 그 안에서 노랗고 붉은 단풍잎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좀 더 운이 좋다면 지난 설날 외할아버지께 받은 빳빳한 만 원권 지폐를 발견할 것이고, 아주아주 운이 좋다면 형이 몰래 숨겨 놓은 세뱃돈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옆에도 책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장 속 책 하나를 펼쳤을 때, 그리고 그 책을 휘리릭 펼쳤을 때 무언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다면, 전 그것이 어느 날 넣어두고 잊은 오만 원권이 아니라 단풍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십 년 전의 가을을 온전히 담고 있는 그 울긋불긋한 색의 단풍잎들, 아주 작은 손짓에도 쉽게 바스러지며 흩어질 그 연약한 추억들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때 그 책 속의, 앨범 속의 단풍잎들은 누가 다 넣어두었던 걸까요?
이십 대의 초반 무렵, 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소재한 석관동에 살았습니다. 그곳은 제게 퍽 신비로운 곳이었습니다. 당시의 제게 소설과 영화와 음악은 이 세계만큼이나 실재하는 또 다른 세계였고,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또는 그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신비롭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전 저 멀리 무대에 선 아이돌을 짝사랑하는 사춘기 중학생처럼 수줍었던 거예요.
또 그만큼 부지런했던 거예요. 그 학교의 학생도 아니면서 캠퍼스를 얼마나 많이 걸어다녔던지요. 그것은 어떤 목표를 가진 의식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일매일의 의례와 같은 무의식적 행위에 가까웠습니다. 굳이 어떤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린 예술가들의 신비로운 얼굴을 보며 어떤 영감을 얻는 것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저는 눈이 초롱초롱하고 기발한 개성을 뿜어내는 예술가들은 거의 보지 못했고, 대개는 과제와 시험, 알바와 밤샘으로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주욱 내려온 학부생들을 마주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대한 동경과는 별개로, 어느 시점부터는 마치 의례처럼 그곳을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곳의 풍경을 선연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좌측 구관 캠퍼스의 낡고 음산한 건물과 그 앞에 늘어선 자전거들, 고등학생처럼 무거운 백팩을 메고 다니던 학생들, 신관이 있는 우측 캠퍼스에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연못이 있었고, 그 못 맞은편으로 올라가면 의외로 흙이 거칠고 나무가 빽빽한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철봉에 매달렸다가 정형외과 신세를 졌었습니다. 그 이후 철봉은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어느 새벽 무렵엔 나무에 등치기를 하는 아줌마를 따라 경쟁하듯 등을 부딪치며 운동의 효과에 의문을 품었던 기억도 납니다. 신관과 구관 캠퍼스 사이엔 의릉이라는 왕릉이 있었는데, 그 숱한 산책 동안 단 한 번도 단체 견학이나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보지 못한 걸로 보아 철종이나 현종 같은 시시한 왕의 무덤이었을 게 분명하고요. 매일 오후 다섯 시 혹은 여섯 시 무렵이면, 의릉 앞 광장에는 약속이나 한 듯 석관동 주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노인들은 벤치를 데우며 담소를 나눴고 아이들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으며, 엄마들은 뛰노는 새들을 지켜보며 저들끼리 속닥였습니다. 한 시간 정도 정처 없이 걷던 저는 그 거리의 소음을 온몸으로 맞으며, 완전히 침묵에 빠진 채 석양으로 향했습니다. 석양이 향하는 쪽에 집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을은 아주 오랫동안, 아니 영영 끝나지 않고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겨울이 코앞이에요. 지금 제게 선명히 남은 이 기억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어린 대학생이었던 저는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그 거리를 거닐었지만 남은 것들은 그렇게 어딘가 우습고 한없이 쓸쓸한 풍경뿐입니다. 그리고 이 우습고 쓸쓸한 것들이 아직도 나의 가슴 한 켠을 뭉글하게 적셔옵니다.
아마 이 기억들이 나의 단풍잎이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나타나고 빠르게 사라집니다. 오늘 내린 단풍은 내일 아침 당장 성실한 경비원 분의 송풍기 바람에 휘날려 날아갈 거예요.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위인전 속의 그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넣어둔 이는 누구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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