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추구미'라는 단어가 횡행하기 시작했다. (무려 2일차 시간절약 코너에도 썼으니.) 이제는 그 단어가 아예 밈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최초적 의미의 추구미는 건재하다. 트위터를 하다 보면 영화, 뮤직비디오 스틸컷이나 핀터레스트에서 주웠을 법한 이미지들을 모아놓고 나의 추구미라고 선언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전에는 비슷하게 '손민수', '카야병', '크리스탈병' 등이 있었다. 그러나 추구미가 생겨나면서 앞선 용어들을 상당히 미학적으로 포장하고 포괄할 수 있게 됐다.
요즘 시대에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자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은 타인도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매끄러운 이미지 상품들이다. 저물녘 바닷가 파도의 부서짐(그러나 사진가, 카메라 기계, 보정 프로그램의 시선으로 가공된), 아이돌의 새로운 티저 이미지(훌륭한 자기관리의 결과물을 포함한), 비슷한 색상과 분위기로 묶인 일상적 사진들(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충분히 편집된).
아름다움이 앞서 열거된 '이미지'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아름다울까? 어제 본 영화의 슬픈 결말? 시간과 효율에 딱 들어맞는 일 처리? 향긋하고 맛있는 커피? 귀여운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여름의 햇살? 이것도 아니라면 건강, 자유, 도덕, 진리, 선함, 사랑, 우정? 또는 죽음과 삶? (너무나 뜬금없지만 퇴사해서 자유를 얻으면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 추구미는 단순히 손민수처럼 타인의 개성을 따라 하는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추구미는 주체가 스스로 미적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자기 만족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추구미'를 통해 스스로 아름다워지기를 추구하는 주체는 자신의 결여를 이미지 속 대상에 덧씌우고, 또다시 자기애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소비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