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컨트리(XC)팀에 합류한 첫날 우리는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학교 밖을 달린다는 사실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때까지 나는 출발선과 달려야 할 경로가 명확한 운동장 트랙만을 뛰어온 사람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우직하게 달리는 일도 처음이었다. 다만 이 생경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래달리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한국에서의 달리기는 언제나 단기적인 것에 불과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러니까 체육대회가 있는 날 ‘반짝’ 나의 실력을 발휘하고 나면 그만이었으니까.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태권도를 그만두면서부터는 운동과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으니 (태권도에서는 준비운동으로 도장을 몇 바퀴씩 돌곤 했다. 매일 줄넘기나 뜀틀 넘기, 이어달리기, 피구 같은 격한 운동을 1시간씩 조진 결과 초등학교 때만큼 건강이 좋았던 적도 없다)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당시 나의 운동 실력은 형편없었다.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운동하지 않은 결과였다.

아무리 기본 실력이 있어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있지 않으면 오래 달릴 수 없다. 러닝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오래달리기는 근성 싸움이다. 100M 달리기의 경쟁자가 트랙 위에 나란히 선 ‘누군가’라면 5km, 10km 마라톤에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나다.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건, 스스로가 얼마나 올바르게 자신을 타이르고 통제할 수 있는지, 그것의 여부다. 몇십 분이 넘도록 이어지는 극한의 달리기에서 나 자신을 몰아세우고 감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와의 진득하고 지난한 싸움을 요구하는 그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해밀턴 고등학교에 반년을 더 다니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1학기 XC팀에 가입한 현지 학생 대부분이 2학기 트랙 팀에도 함께했다. 코치와 제법 익숙하게 대화하는 걸 보니 그 이전부터 줄곧 육상팀을 해 온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애들은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 학교에 나오는 날이면 거의 매일 쉬지 않고 뛴다는 소리다. 나는 그 애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노력도 쌓으면 실력이 되니까. 그 애들이 매년 피땀 어린 노력으로 다져온 실력을 내가 이길 수는 없는 거였다.

첫날 해밀턴 고등학교의 주차장에서 나와 뛰기 시작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기 시작했다. 그 애들은 물론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차이가 나와 그 애들이 지나온 시간의 밀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내가 노래를 듣는 건지, 노래가 나를 듣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정신이 어찔어찔했다. 살면서 러닝이란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모든 게 낯설고 새롭고 지치고 숨이 막혔다. 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같은 육상팀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나는 금세 뒤처졌다. 현지 학생들이 주를 이룬 무리는 벌써 저만치를 앞서가고 있었다. 나와 말차를 포함한 교환학생 무리가 그 뒤를 불안정한 속도로 따라가고 있었다. 말차도 나만큼 힘든 모양이었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현지 학생들의 무리가 점처럼 보일 정도가 됐을 때, 우리는 이미 무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후였다.

폐활량에 한계가 온 우리는 그 뒤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목에서는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고 걸으면서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무들이 어찌나 울창한지 머리 위로 드리워진 파란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걷는 횟수와 시간이 늘어갈수록 앞서가던 교환학생 무리도 점처럼 작아지더니 끝내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말차와 나는 아랑곳 않고 걸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집들이 늘어선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서운 속도로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들로 울창한 길목이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어둠이 만물을 덮고 있을 때 우리는 여전히 계획 없이 걷고 있었다. 숲길로 향한다는 것도 모르고.

우리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시점은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다시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길목 한가운데 들어섰을 때였다. 인가가 급속히 줄어들고 어두운 숲길이 양옆으로 펼쳐졌다. 사람은 물론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 전화의 플래시 기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울창한 나무들과 쭉 뻗은 길만이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외딴곳에서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만이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그때 뼛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 오던 공포란 책 『앵무새 죽이기』에서 주인공 남매가 핼러윈 행사가 끝나고 완전히 어두워진 밤길을 홀로 걸을 때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실제로 남매는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두 사람이 걷는 홀로 걷기.

책에서처럼 칼을 든 사람이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했다. 그만한 깊이의 어둠이 드리워진 길이었다. 설상가상 말차의 휴대 전화 배터리가 다 되어 플래시 하나로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몇 번이고 왔던 길을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길이 너무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는 이미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말차와 나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걷기로 했다. 호스트 엄마인 주디에게 연락했다면 일이 수월하게 풀렸겠지만, 당시 미국에서 휴대 전화를 개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나는 연락처에 그녀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널찍한 길목으로 들어서니 가까운 곳에서 컹컹거리는 소리가 미친 듯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왼쪽으로는 컴컴한 숲이, 오른쪽으로는 숲으로 둘러싸인 외딴집이 보였다. 대여섯 마리가 넘는 개들이 집 앞마당에 모여 우리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개들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경고와 경계와 위협이 스며있었다. 말차와 나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진을 치고 있는 개들 때문에 어차피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을 테지만, 그 집은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흡사 버려진 집 같기도 했다. 어떡해. 말차는 공포에 찬 목소리로 내게 알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서로를 꼭 붙든 채 덜덜 떨리는 손을 감싸 쥐었다.

컴컴한 숲길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대여섯 마리의 개가 위협적으로 짖어올 때 우리가 느낀 공포는 과연 압도적이었다. 인생에서 그때만큼 큰 공포를 느낀 적도 드물 것이다. 그때 주디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주디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코치에게서 우리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문제는 말차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조차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불 꺼진 집과 대여섯 마리의 개들과 울창한 숲뿐이었다. 나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디는 우선 전화를 끊고 마을을 돌면서 우리를 찾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얼마간의 안도와 함께 주디가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문득문득 휩싸였다.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아가던 우리는 기적같이 도로를 찾을 수 있었다. 대로변이 아닌 교외 고속도로 같은 썰렁한 곳이었지만 우선 주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로가 보여요.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큰 건물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정말이지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길 건너편으로 집 한 채(역시 불이 꺼져 있었다)가 보였고 사방은 숲길에 둘러싸여 있었다. 컹컹 짖는 개들 대신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이따금 우리를 지나쳐 갈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주디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주변에 도로 표지판 같은 게 있냐고 물었다. 플래시로 이곳저곳을 비춰보니 과연 우리보다 키가 큰 세모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거기 쓰인 도로명을 읊었다. 철자까지 받아적은 주디는 곧장 우리를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제야 우리는 긴장으로 조여있던 몸을 조금씩 느슨하게 풀 수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 건지 주디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덜컹덜컹한 숲길을 몇 번이고 지나쳐야 쳤다.

그 뒤로 동네를 달릴 때 XC팀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달리기 실력이 하루 만에 일취월장했다거나 그런 기적이 일어난 건 아니다. 둘째 날부터 코치가 달리기 루트를 바꿨기 때문이다. 동네 외곽으로 빠지지 않고 학교 주위를 크게 빙 돌기만 하면 되었다. 전날 말차와 내가 크루를 놓치고 동네를 헤맨 탓인지 그렇게 바꾼 듯했다. 그런 이유로 그 공포의 숲길을 다시 뛰거나 걷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묵묵히 학교 주변을 달릴 뿐이었다.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여전했지만,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느 속도로 어느 정도를 뛰어야 할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의 어느 날, 나는 (공포의 숲길과 그 정신적 고통이 맞먹는) 인생 첫 마라톤을 나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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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구독자님1:

“안돼! 달려! 일어나! 벨! 넌 할 수 있어! 일어나!”

익명의구독자님2:

“와 육상까지 ㅋㅋㅋㅋㅋ 점점 더 흥미진진해집니다 리얼 하이틴 라이프..!”

익명의구독자님3:

“정작 한번도 활동한 적이 없었다는 과학동아리가 왜 이리 웃긴 걸까요☺️ 사진이 있어서 그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었고 이런 말 하기엔 조심스럽지만 미국에서의 땋은 머리.. 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