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10대 시절의 BGM은?”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누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초면인 사이도 있어 낯가리는 참에 음악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리니 금세 분위기가 풀어졌다. 누구든 10대 시절 들었던 음악은 강렬하게 남는가 보다. 사람은 평균 33세부터 새로운 노래를 듣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지금까지 들어온 음악이 내 평생의 취향을 좌우할지도 모를 일이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MP3를 바꿔 듣고, 야자 시간에도 선생님 몰래 노래 듣겠다고 교복 와이셔츠 안에 이어폰을 집어넣던 기억도 나만의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영화 <싱 스트리트> 주인공 ‘코너'의 형 ‘브랜든’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는 음악을 모독하는 일이라며 길길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코너’는 첫눈에 반한 ‘라피나’라는 모델 지망생과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보려 밴드를 급조하고, ‘듀란듀란’의 노래를 커버한 테이프를 형에게 들려준다. ‘브랜든’은 동생이 커버한 노래를 듣고 카세트테이프를 밟아버린다.

브랜든: 남의 음악으로 걜 유혹하겠다고?
코너: 이제 시작했잖아. 배우는 과정이지.
브랜든: ‘섹스 피스톨즈’는 배워서 한 거 같아? 그건 아니지. 네가 도둑놈이냐?

아니, 남의 노래 부르는 게 어때서⋯. 그렇지만 그 형에 그 동생인 건지, 그 말을 들은 ‘코너’는 공책을 펴고 작사를 시작한다. 그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내가 소리바다와 당나귀를 누비며 나를 표현할 언어를 찾아 헤맬 나이에, ‘코너’는 자신만의 음악을 뚝딱 만들었다니. 아무리 영화라지만 부럽고 질투 나는 재능이다. 어쨌든 삶과 음악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알아챈 10대라는 점에서 좀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있겠다. 영화 <싱 스트리트>는 ‘코너’와 그 친구들이 만드는 음악을 통해, ‘코너’라는 한 인간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나도 이 아름다운 영화에 기대어, 내 유년의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여 봤다.

‘The Riddle of the Model’은 라피나의 ‘위험한 눈'을 떠올리며 ‘코너’가 처음으로 만든 노래다. ‘라피나’에 대해 아는 것은 그의 이름과 모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모를 때 더 궁금하기 마련이야”라며 가사를 써내려 가는 ‘코너’의 뒤통수는 딱 한 번 때려주고 싶은걸. 누군가를 품어 주기엔 그릇이 작아 그 사람을 잔뜩 숭배하고 대상화하는 방법밖에는 알지 못하는 마음, 물론 나도 한 번쯤 지나온 시절이기에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코너: 누군가를 모를 때 더 궁금하기 마련이야.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막상 다 알아버리면, 상상이 안 되거든.
에이먼: 점점 더 어렵네. 제목이 뭐야?
코너: ‘모델의 수수께끼(The Riddle of the Model)’.

형의 조언과 건네받은 LP 몇 장을 듣고 이렇게나 뮤지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거임? 코너도? 기타리스트 ‘에이먼’과 함께 완성한 ‘The Riddle of the Model’은 처음 만든 노래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멋지다. ‘라피나’에게 가슴을 쫙 내밀고 테이프를 건넬 수 있을 만큼 형에게 인정도 받았다. 물론 ‘라피나’는 ‘코너’를 기억해내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그런 반응에 쉽게 기죽지 않는 것이 ‘코너’ 녀석의 장점이다. ‘라피나’는 직접 노래까지 만들어 온 정성에 뮤직비디오 촬영을 수락한다. 일단은, 그린 라이트!

하지만 코너⋯⋯ 너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 (🚬) 형은 말이지, 사랑이란 “한 방울의 물을 원할 땐 바다를, 한알의 모래를 원할 땐 사막을 주는” 거라고 생각해. (🚬🚬) ‘코너’가 운명의 상대를 향해 ‘러브 다이브’ 했다면, 10대 김서른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조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사랑의 원형은 ‘에픽하이 - heaven’에 있다고 믿었다. 마치 십계명처럼 연습장에 가사를 필사하며, 좋아하는 아이에게 은근슬쩍 노래도 추천해가며⋯. (이 대목을 적으며 책상을 한번 내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치기 대마왕이든 애늙은이든, 상대방은 너무나 ‘수수께끼’ 같아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미성년의 짝.사.랑. 거기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른이 될까나.

영화 후반부의 ‘코너’에게로 돌아가자. 졸업 무도회에 서게 된 ‘싱 스트리트’는 그들 노래로만 셋 리스트를 채울 만큼 어엿한 밴드가 됐다. (심지어 ‘To Find You’, ‘Up’, ‘A Beautiful Sea’ 등 모두 명곡이다.) 전혀 긴장하는 내색 없이 화려한 쇼맨십을 보여준 ‘코너’는 마지막 곡으로 ‘Brown Shoes’를 고른다. 교칙을 몰라 갈색 신발을 샀지만 다시 신발을 살 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하소연을 무시하고, 딱히 금지하는 교칙이 없길래 화장하고 염색했다는 말에 폭력을 휘두른 교장 선생에게 헌사하는 곡이다. ‘싱 스트리트’는 미리 준비한 교장 선생의 얼굴 가면을 쓰고, 그의 눈앞에서 그를 신나게 조롱하고 비판하는 무대를 보여준다. 교장이 애써서 중지시키려 해도, 함께 가면을 쓰고 춤추는 관객들의 흥을 막을 수는 없다. “당신이 과거에 얽매일 때, 난 미래를 쓸 거야!” ‘코너’의 멋진 승리다.

‘라피나’를 향한 마음을 실컷 곡으로 쓰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마음껏 노래도 했으니 이제 ‘코너’는 어디로 가야 할까. ‘코너'는 전남친 ‘에반’과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가 배신당하고 돌아온 ‘라피나’와 함께 영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겠다는 무모한(?) 계획이다. 돈도 아는 사람도 없지만, ‘코너’는 ‘라피나’와의 마음을 확인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획을 실천하기로 한다. 형 ‘브랜든’에게 항구까지만 태워달라며 부탁하는 ‘코너’와 ‘라피나’. 형은 예상외로 이 무모한 커플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한다.

브랜든: 언제 갈 건데?
코너 & 라피나: 지금.
브랜든: 지금? 영국에 아는 사람은 있니?
코너: 아니.
브랜든: 돈은 있고?
라피나: 아뇨. (코너: 없어;?)
코너: 라피나는 포트폴리오, 난 데모 테이프랑 비디오뿐이야.
브랜든: 당장 가자. 차 키 챙겨.

‘라피나’를 만난 뒤 ‘코너’의 알 껍데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면, 그 껍데기를 함께 쪼아주는 것은 형 ‘브랜든’이다. 그가 충분히 성숙한 인간이어서는 아니다. 무심한 아버지와 외도하는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볼 만큼 머리는 컸지만, 집안의 경제적 문제는 어찌할 줄 모르는 어린애인데, 음악을 놓은 자신과는 달리 동생은 잘 나가는 밴드의 프런트맨이 됐다. 집안에 틀어 박혀 그런 현실을 혼자 삭이다가 ‘코너’에게 불쑥 화내기도 한다. 하지만 ‘브랜든’은 ‘코너’의 음악과 밴드 활동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가 둥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날아가야 할 때 힘을 보태는 유일한 어른이다.

모터보트를 타고 거센 파도를 헤치며 영국으로 향하는 ‘코너’와 ‘라피나'의 엔딩 씬에 ‘Go Now’라는 곡이 깔린다. “계속 가, 네가 옳아”라며 응원하는 가사는 아마도 ‘브랜든’이 ‘코너’에게 해주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꿈이라도 기꺼이 등을 떠밀어주는 존재가 있어서, ‘코너’는 언젠가 실패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전력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열아홉 살의 나는 “계속 가, 네가 옳아”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필요했다. 부모는 자신들의 사정만으로도 바쁘고, 선생은 급식비를 내지 못한 나를 대놓고 조롱했으며, 나를 이해해 줄 형제자매는 없어서 외로웠다. 그런 김서른을 날게 한 것은 서른 살의 김서른이었다. 멋진 어른의 삶을 상상하면, 지루한 수험 생활이 좀 견딜만했다. 어째 눈 깜빡하니 서른이 됐는데 이룬 것이 하나도 없어 그때의 내게 미안할 지경이다!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어떤 시간이 와도 어떤 곳에 머물러도 다시 아름답게 꽃을 피워” 내겠노라 다짐할 줄은 알게 됐다. 누군가를 온전히 의지하기도, 마음 다해 품기도, 힘껏 미워하기도, 기꺼이 용서하게도 되면, 몇 번이고 견뎌낼 힘이 생긴다고, 도서관을 나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으며 ‘체리필터 - 푸른 꽃 흰나비’를 듣던 내게 말해줄 수 있다. “계속 가, 김서른아. 네가 옳아.”

사랑, 반항, 성장. 이 모든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노래 가사에 다 녹아 있다니, 정말 뮤직은 마이 라이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존 카니’ 감독이 만든 음악 영화 3부작(<원스>,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은 뮤지컬만큼 대단한 퍼포먼스가 없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적 경험을 선물한다. 상황과 감정에 따라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 의미 있는 가사를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싱 스트리트> 역시 10대 소년이 자신의 세계를 떠나 인생의 다음 장으로 건너가는 일련의 성장기가 1980년대 밴드 음악과 어우러져서 신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코너’가 좋았던 건, 지금껏 <아직도 하이틴>에서 다뤄 온 여타의 10대와 달리 자신을 의심하지도, 불안해하거나 외로워하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훔친 차를 타고 도망치듯 달리는’ 그 기세에 대리 만족하게 된달까!

“내 삶이 한 편의 영화라면, 10대 시절의 BGM은?” 이제 주민님의 차례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고등학생 ‘코너 라울로’에게 10대 시절의 BGM은 영화 <싱 스트리트>고, 2000년대 후반의 고등학생 김서른에게 에픽하이, 슈프림팀과 체리필터가 있었다면,  님의 10대는 어떤 음악으로 묘사될 수 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려워도 재밌는 질문일 거라 확신한다. 우리에게 말해줘도 좋고, 편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이야깃거리로 삼아도 좋다. 저마다 취향이 너무나 다양해 일치하는 대답은 없어도, 짧은 노래 가사 한 줄에 의지해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점은 공통의 대답이지 않을까.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물었다.
눈 감으면 9월이 끝나 있길 바래서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를 듣던,
슬픈 기분이 들 때면 자주 ‘Loveholic - Rainy Day’를 듣던,
불꽃같던 첫사랑이 아파서 추운 겨울 석식도 거르고 혼자 ‘김사랑 - 위로’를 듣던,
등교하는 버스에서 ‘Corinne Bailey Rae - Put Your Records On‘를 듣던,
주말 자습이 끝날 무렵 소나기가 내려 아빠가 데리러 온 날 ‘언니네 이발관 - 산들산들'을 듣던,
가사 한 줄에도 쉽게 울고 웃던 우리가 무사히 서른 즈음의 어른이 됐다. (저마다의 BGM을 공개해 준 김서른의 친구들에게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