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고을에서]


대나무의 복원력


이재철 목사
 

지난겨울에는 제가 사는 지역에 유난히도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강설의 빈도도 잦았지만, 양도 엄청났습니다. 2주 간격으로 발목 복숭아뼈 위까지 빠지는 폭설이 두 번이나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폭설은 1964년 서울에서 경험한 뒤 60년 만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집 뒷동산의 대나무들이 그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모두 땅을 향해 휘어진 것이었습니다. 옛날 산속에서 눈의 무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은 목격했지만, 대나무가 휘어져 내리는 것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휘어져 있을 대나무들을 상상하는 것은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후 경이로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눈이 그치고 해가 뜨자 휘어졌던 대나무들이 언제 휘어졌었느냐는 듯, 모두 하늘을 향해 꼿꼿한 자태로 복원되었습니다. 폭설이 내린 두 번 모두 그랬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을 복원력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땅바닥까지 휘어져 내려도, 하늘을 향해 다시 꼿꼿하게 일으켜줄 그 복원력 말입니다.

[지금 이 책]



130년 전의 우치무라 간조에게
‘살아 있는’ 전도의 정신을 묻다

"이 책은 10년 전인 1894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런 주제가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이 나온 이래 많은 전도자가 거룩한 전도 직을 떠나 장사를 하거나 관리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었다. 아직도 이 일에 종사하는 자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아둔한 자일 뿐이다."
_1903년 4월 13일 「개정판에 부치는 글」 中
  
이상적 전도자
우치무라 간조는 '생계', '명예', '교회', '나라'를 위한 전도가 횡행하는 현실 앞에서 다소 원색적인 어조로 전도의 성패는 오로지 '정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전도자의 열심이 비롯된 목적에 주목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것이다. 130년 전 쇠퇴하는 일본 기독교를 향한 일침은 지금 한국 교회에도 적중하였다.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이 책의 '정신'을 토대로 현재를 가늠해 보고, 발전적인 토론에 활용한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 이해*
우치무라 간조에게 예수와 일본(Jesus and Japan=두 개의 J)은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그는 일본이라는 척박한 땅에 복음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리도록 헌신했지만 질병과 아내의 죽음, 비방과 배신 등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박해 속에서도 성서의 말씀에 입각해 시대적인 힘에 저항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을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교제로 보았는데, 이를 위한 장(場)은 교회가 아니라 매일의 평범한 일상이라고 하였다. '일상성의 신앙'은 무교회주의의 핵심이다. 그가 기성교회를 부정한 것은 아니나 본질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에서 교회는 비본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교회 바깥에 구원 없다'는 원칙은 타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그리스도 바깥에 구원은 없다'라는 신앙적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_「부록-우치무라 간조에 대하여」 中

조직으로서 존재하는 교회의 유지 부담을 최소화하려 했으며,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천상의 교회'를 지향하는 길 위의 조직으로 존재하며 끝없는 자기 쇄신을 촉구했다. 이러한 우치무라의 교회론은 고정되어 확장되기를 힘쓰는 오늘날 교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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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글은 《전도의 정신》을 번역하고 해설한 양현혜 교수의 「부록-우치무라 간조에 대하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오후의 정원]


짚는 지팡이, 드는 지팡이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


주문도에 들어가 묵언 기도를 할 때였다. 어느 날 뒷장술 해변을 걷던 중 파도에 쓸려 와 쌓인 쓰레기 더미 속에 내 눈을 끄는 나뭇가지 하나가 있었다. 모래에 반쯤 묻혀 “날 좀 꺼내 주세요” 하는 것 같았다. 주워 보니 죽은 지 오래된 나뭇가지였다. 손에 잡으니 지팡이로 쓰기에 적당했다. 그래서 숙소로 가져와 곁가지를 치고 다듬은 후 지팡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팡이를 짚기 시작하자 아내는 “노인네 같다”며 반대하였고 주변 사람들도 “다리가 아프냐?” “몸이 좋지 않으냐?”고 물었다. 매일 서너 시간 걸어도 피곤치 않을 정도로 아직 몸은 건강하다. 그런데도 지팡이를 짚고 나서면 왠지 마음이 편했다. “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첫째, 내가 ‘은퇴한 사람’인 것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은퇴한 사람이 아직 현역이라고 착각해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후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이 많아지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지시하거나 훈수를 두려고 한다. ‘어른’으로 존경을 받기보다 ‘꼰대’로 멸시당하기 쉽다. 그래서 공적인 모임에 갈 때는 지팡이를 짚고 나가 가급적 말하기보다 듣기에 집중하려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다가 누군가 “한 말씀 해주시죠” 하면 그때에야 입을 연다.
둘째, ‘은퇴 후’에도 쓰이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 위함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라다 죽은 것인지도 모르는 나뭇가지가 바닷가 쓰레기 더미에 덮여 있다가 내 눈에 띄어 지팡이가 되었다. 죽은 생명, 버려진 존재가 지팡이로 ‘제2의 생’을 사는 것이 ‘은퇴 후’ 은총의 삶을 살아가는 내 모습과 비슷했다. 그래도 불러 주는 곳이 있고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 감사할 뿐이다.
그렇게 지팡이를 짚고 신학교 동기들 모임에 나갔더니 친구 목사들이 “그거 모세의 지팡이냐? 아론의 지팡이냐?”고 물었다.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아론의 지팡이라기보다는 온유와 겸손의 상징인 모세의 지팡이이고 싶었다. 나이 팔십이 되도록 이뤄 놓은 것 하나 없이 광야에서 남의 양을 치던 모세에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임하신 하나님, 이집트에서 노예로 사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그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이 임하였다.
그런 말씀 앞에서 모세는 선뜻 나서기보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말 재주도 없습니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며 사양하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두 손을 펴 보이는 그에게 하나님은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다. “마른 나무 지팡이밖에 없습니다” “그거면 되었다” 그 후 지팡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출 4:20)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 지팡이 하나로 모세는 출애굽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얼마 전 그렇게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부러졌다. 두 손에 짐을 잔뜩 들고 지팡이를 잡은 채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는 순간 실수로 지팡이를 깔고 앉아 부러뜨린 것이다. 두 동강 난 지팡이를 보며 처음엔 “나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나는가 보다” 하고 버릴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부러진 지팡이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부러진 부분에 접착제를 바른 후 화훼용 철실로 붕대처럼 감았다. 깁스한 다리와도 같았다.
그렇게 한 주일간 내 서재에 모셔 두었던 지팡이를 다시 잡고 외출하는데 치료 끝내고 퇴원하는 아이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서는 느낌이었다. 다친 지팡이라서 그런지 더 애착이 갔다. 행여나 또 부러질까 전처럼 함부로 힘을 줄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짚고 다니던(carrying) 지팡이가 들고 다니는(lifting) 다니는 지팡이가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백성 앞에 서게 하신 지 알 만하였다(출 14:16, 17:9).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마른 지팡이, 그게 바로 나였다. 부러져도 다시 고쳐 쓰시는 그 은총 말이다.
[책 속에 넣어 둔 편지]


빨간 책 赤い本


손상범, 출판기획부 디자이너

책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읽은 바, 양현혜 교수의 <옮긴이 후기>, <해설>은 편의상 우치무라 간조의 글을 설명하는 부수적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단순히 원문을 받치는 보조 성격의 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책의 얼개를 구상해 왔다. 
《伝道の精神》은 1894년 서구 주류 종교가 유입되는 혼란기 메이지 시대의 일본 현실에서 전도자라는 ‘역할’을 고민한 청년 우치무라의 강단 있는 호소이자 주장의 글이다. 전도를 실천함에 있어 귀감이 되는 글임은 확실하나, 독자는 130년 후의 시차가 발생한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감안해야 한다.  
시차의 혼란에서 양현혜 교수의 <해설>은 1894년 메이지시대 일본과 2024년 한국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동시대적 맥락으로 데려와 독자를 안내한다. 우치무라의 글과 양현혜의 해설은 두 개의 축으로 존재하지만 결국엔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로 묶여 현재에서 살아 있는 의미를 갖게 되는 책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바탕으로, 일본과 한국의 맥락을 동시에 강조하기 위해 한국어/ 일본어 표기를 나란히 두고 ‘1대1’로 대응하는 두 개의 표지를 한 면에 배치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빨간 책이다. 타이포그래피와 배경색만으로 에누리 없이 단호한 빨간 책.
서지사항 중에서는 그간 관습처럼 도드라지지 않게끔 흔적만 남겨 온 ‘지은이’보다는 ‘작은 글씨’의 ‘OOO 옮김·해설’에도 저자와 같은 위상을 부여하길 원했고 이를 적극 반영했다(많은 출판사 디자이너들이 표지에서 옮긴이의 존재감을 은은하게 숨겨야 하는 고충을 빈번히 겪는다는 사실에 공감한 바가 크다).
표지에 사용한 컬러에 관해 얘기를 덧붙이자면 [흰색, 빨간색]:[파란색, 빨간색]의 조합은 한/일 국기에 사용된 상징 색상 조합을 문자와 배경에 적용한 것인데, 각 국기에 사용된 색상이 모두 적색 계통이면서 채도 차이를 지닌 유사색이다. 비슷한 듯 다른 동아시아의 두 나라를 [일본]:[한국], [과거]:[현재]로 대입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선택한 결과다.
[읽기의 순간들]



김한종, 용산교회 전도사


우리의 인식 속 “중세 시대”는 암흑기로 기억된다. 중세기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었던 시기라는 인식도 포함된다. 과연 그러했을까? 이제껏 우리가 접하는 중세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 혹은 ‘교회사’에 가까웠다. 그러나 ‘중세와 그리스도교’는 ‘중세 시대’를 종교적인 관점보다 포괄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는 포커스를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아닌 그 시기의 다양한 모습을 아우르려고 시도했다. 단지 그리스도교 아래의 서구 사회가 아닌 다양한 사료와 저서들을 가져와 보다 확장된 시야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본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우리에게 중세시대를 전달하고 있다. 
신학도들, 목회자들이 흔히 찾아보던 중세교회사에서는 교리적인 부분들과 신학자들의 사상체계 확립과 발전에 포커스가 맞추어졌고 시선이 ‘그리스도교’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본서는 중세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시대를 종교에 그치지 않고 세속사까지 담아내고 있다. 중세의 보다 정확한 모습을 시대적 맥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배했던 ‘중세시대’는 다시 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전까지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중간에 등장하여 판도를 뒤흔든 ‘그리스도교’는 이전의 것들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었다. 많은 것들이 혼합되고 공존하며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리스도교 외부세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고 때로는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고 변화해 가던 시대였다. 
중세는 결코 짧은 시기가 아니었다. 단순히 ‘암흑기’라거나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던 시기로 단언할 수 없다. 중세는 고대를 탈피하는 과도기였으며,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리스도교’라는 거대한 사상체계 안에서 다양한 이해와 문화, 풍습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인간이 태어나 단숨에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중세 역시 근대로의 이행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준비되고 있던 시기였다. 본서를 통해 풍부한 중세기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가까이 또 멀리]

어떤 것을 새롭게 개척하는 것과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운영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개척은 변화하는 것으로서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개척자의 자리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개척한 후에 필요한 사람은, 개척자가 이루어 놓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어떤 새 일이나 새 방향으로 인도하시든 간에 그가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이다. 

새 책 나옵니다


𝓃𝑒𝓌 나의 아버지 주기철
아들 주광조 장로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 주기철과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 가족이 간직했던 기억과 기록들을 유승준 작가가 세밀한 필치로 담아 냈다. 주기철 목사의 사료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책 안에 담긴 증언들이 더 의미가 있다. 주기철 목사 순교 80주년을 기념해 2014년에 출간된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을 개정해 펴냈다. 
유승준 지음 | 400쪽(예상) | 2024년 3월 출간

𝕤𝕠𝕠𝕟 두 여성 신학자의 편지(가제)
두 여성 신학자는 처음 교회에 발을 디디고 신학자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경험한 한국 기독교의 왜곡된 모습들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시작한다. 서구 교회의 전통과 유교 사상이 만나 형성된 한국 교회의 가치관은 남성 중심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보며, 편견과 억압과 죄의식을 심어 주고 있다고 두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그동안 묵인되어 온 질문들을 꺼내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성경적 모습이 무엇인지 전한다. 
강호숙·박유미 지음 | 2024년 5월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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