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민일보 뉴스레터 한NU네 제51호
2025년 9월 8일(월)

그놈의 목걸이

   

 권력자들의 ‘목’은 왜 늘 그렇게 바쁠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늘 목에 무언가를 걸어왔습니다. 옥패, 금목걸이…. 그것들은 권력의 상징이자 동시에 권력의 올가미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금으로 목을 휘감고 살아 있는 신이라 자처했습니다. 조선의 권문세족들은 옥으로 치장하며 백성 위에 군림했고, 유럽의 루이 14세는 궁전 곳곳에 금칠로 왕궁을 밝히며 스스로를 태양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호화로움은 결국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모는 시발점이 됐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금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민심을 잃었으며, 결국 군중의 환호 대신 야유 속에서 권좌를 내려놓았습니다. 화려함은 늘 오래가지 않았죠.


그래서인지 김건희 여사의 명품 목걸이 논란은 새삼스럽지 않게 느껴집니다. ‘빌린 것 → 모조품 → 분실 → 받지 않았다 → 받은 뒤 돌려줬다’로 이어진 3년 넘는 해명 과정은 한국 정치사의 길고 지루한 ‘목걸이 드라마’가 되어 버렸습니다.


목걸이 하나로 이렇게 시끄러운 이유는 단순히 물건 값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목걸이를 착용했던 사람이 보여준 권력의 태도, 국민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책임감의 무게가 새털처럼 가볍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목걸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목걸이를 건 사람의 책임감 아닐까요. 금이든 모조품이든, 권력자의 목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그 사람의 거울인데 말이죠.


역사는 무게를 견디지 못한 권력이 결국 목걸이와 왕관, 장신구들과 함께 목까지 잃게 된다는 사실을 숱하게 증명해 왔습니다. 반짝이는 것을 걸기 전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세요. 그리고 우리는 목걸이의 광채보다 그 사람이 지닌 책임감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김영희 디지털콘텐츠부장>

산림청·국방부 헬기 동원..."산불진화 아니고 가뭄진화 중"


 산림청과 국방부는 합동 산불 진화훈련을 병행해 강릉 지역에 물을 공급하기로 하고, 강릉시 요청에 따라 경포호수에서 물을 담아 식수 공급원인 오봉저수지에 투하하는 작업을 펼쳤습니다. 이번 훈련에는 담수 용량 8000ℓ의 S-64 2대, 3000ℓ의 카모프 2대, 지휘헬기 등 5대의 산불 진화 헬기와 국방부의 시누크 헬기 5대 등 모두 10대가 투입됐습니다.

탈북 청소년 희망 교실을 가다

 강원도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구소멸 위기 지역이지만, 새로운 희망의 씨앗도 서서히 싹트고 있습니다. 탈북민은 남한 전체에 약 3만4000여 명이 정착해 있지만, 그중 강원도에 자리 잡고 있는... 

5대 반칙운전 단속 돌입

 강원경찰청이 지난 1일 꼬리물기와 끼어들기 등 ‘5대 반칙 운전’에 대한 집중 단속에 돌입한 가운데 현장은 얌체 운전자들로 인해 무법지대였습니다. 2일 오전 춘천 석사교차로 인근. 화물차 ... 

‘동해 개척’ 이사부 얼 담은 축제 

 1500년 전 동해바다 우산국(울릉도 등)을 우리 영토로 만든 신라장군 이사부의 해양개척 혼과 얼이 ‘2025 삼척 동해왕 이사부 축제’를 통해 다시 깨어납니다. 신라장군 이사부는 우산국을 복속한... 

강원의료 희망을 캐다

 고은별 강원대병원 공공의료협력팀장은 16년 차 간호사입니다. 그에게는 “늘 공공의료 현장에 있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강원대병원은 강원권역 책임의료기관으로 최종 치료기관의 역할을... 

2025 삼척 동해왕 이사부축제 개막식

 우리 해양역사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해양영토(우산국)를 개척한 신라 이사부 장군의 해양개척 혼과 얼을 전승하고, 나아가 이사부 출항지인 삼척을 해양 역사문화관광 중심도시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마련되는 ‘2025 삼척 동해왕 이사부축제’가 지난 5일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화려하게 펼쳐졌습니다. 강원도민TV를 통해 그날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을 느껴보세요.  생중계/박상동 기자 
옛 고갯길에 새겨진 애민의 덕 '불망비' 

 대관령은 영동지역에서 외부로 통하는 가장 낮은 고갯길이다. 해발 865m. 동해안은 백두대간 험산준령이 '산의 장막'을 친 곳이니, 대관령이 없었다면 주민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일은 훨씬 더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해수면에 잇닿은 동해안에서 보자면 대관령 또한 거대한 성벽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운 높이다. 그래서 강릉에 관향(貫鄕)을 두고 있는 매월당 김시습은 조도(鳥道), 즉 '하늘을 나는 새나 넘나드는 길'이라고 했고, 교산 허균은 잔도(棧道)라고 표현했다. 이따금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도 출몰하고, 겨울철에는 살을 에는 엄동의 한파 때문에 길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은 그 대관령 옛길에 서 있는 작은 비석 얘기를 해보려 한다. 비석의 이름은 '기관 이병화 유혜 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 대관령 고갯길의 중간 휴식처인 '반정(半程)'에서 300여m 아래 등산로 숲속에서 만날 수 있다. 1m 남짓 크기의 비석 윗부분에 갓을 씌우고 주변의 잔돌을 모아 나지막하게 담을 둘렀다. 등산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발견할 수 있지만, 워낙 소박하게 세워진 비석인지라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더 많다. 그냥 흔한 무덤 앞의 묘비 정도로 생각하기에 십상이지만, 비석이 전하는 뜻은 오늘날 그 어떤 웅변보다 우렁차다. 비석이 세워진 때는 1824년 9월, 조선 순조 임금 때다. 대관령 깊은 산 속에 비석이 세워진 연유는 비석 앞면의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많은 돈으로 은혜롭게 점막을 지었네/(중략) 오가는 길손은 휴식할 곳을 얻었고, 머무는 자는 숙소를 마련하게 되니/ 조각돌에 아름다운 행적을 새겨 오래 기리고자 하노라.' 강릉 관아에서 기관(記官) 벼슬을 하던 이병화라는 향리가 거액의 사재를 들여 대관령 옛길에 길손들이 안전하게 묵어갈 수 있는 여각을 지었고, 주민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고갯길 한켠에 불망비를 세웠다는 아름답고 정겨운 내용이다.

 당시의 지방 향리들은 대부분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이었으니, 이병화 또한 중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재산을 내놓아 불특정 다수의 안전을 챙기는데 힘썼으니, 현세에 전하는 애민(愛民)과 휼민(恤民)의 메시지가 더 감동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등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이야기를 챙기는 것이다. 산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 산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네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생생한 현장 증언이고, 풀뿌리 생활문화의 교본이다. 그러하니 오늘 산행에 나선다면 자연을 즐기는 것에 더해 꼭 그 산의 이야기를 담아 올 일이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가사에 녹여낸 강원 방랑기

 음악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물안개와 요란하게 울리던 폭죽 소리, 모래시계의 시간 속 추억은 파도에 쓸려갑니다. 춘천에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 김산돌... 

하나 된 강원 미술 열망

 하나 된 강원 미술을 향하는 지역 미술인들의 염원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국미술협회 강원도지회가 주관하는 제63회 강원도미술협회전이 4일부터 15일까지 태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려...

철원 노동당사 ‘평화·화합’ 미디어아트 물든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철원군 노동당사와 역사문화공원 일대에서 대규모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이 개최될 예정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청과 철원군이 공동 주관하는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오는 9월 26일부터 10월 26일까지 31일간 진행됩니다. 이번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은 ‘모을동빛-걷히는 구름, 비추는 평화’를 주제로 ...

조선 제1의 언관(言官) 박숙달

  

 

 1478년(성종9년) 4월1일 흙비(土雨)가 내렸다. 전에 없던 천재지변이었다. 지진에 이어 하늘이 보낸 경고였다. 왕과 조정은 몸을 잔뜩 낮추고 전전긍긍했다.

성종이 승정원을 질책했다.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는 벌이 가볍지 않다. 수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하자 흙비가 내렸다. 당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대신들은 어찌 한 마디 말도 없는가?”


좌부승지 손비장(孫比長)이 답했다. “옛 성왕(聖王)과 철왕(哲王)은 재이(災異)를 만나면 두려워했는데 전하도 직언을 들어 하늘의 벌에 답하고자 하니 훌륭하십니다.”


성종이 의정부에 하명했다. “덕이 없고 어리석은 내가 한 나라에 임하여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런데 지진에 흙비도 내리니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세금이 과중했는가? 공역(工役)이 많았는가? 형벌이 적중하지 못했는가? 인사가 잘못됐는가? 어질고 준수한 인재가 등용되지 않았는가? 수령을 살펴 내쫓거나 중용하는데 잘못이 없었는가? 모든 허물은 내게 있다. 직언을 들어 답하고자 한다. 지진이 나고 흙비가 내린 연유와 이를 그치게 할 방법을 숨김없이 전하라.”

▲경기 고양에 있는 사헌부 장령 박숙달 선생의 묘소
 엿새가 흘러 4월7일 경연에서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왕의 하명에 답했다. 대사간 김자정(金自貞) = “두 번 흙비의 변(變)이 있어 전하께서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여 이를 삼가시면서도 금주(禁酒)는 허락하지 않으시니 하늘에 공경히 답하는 바가 아닙니다.”

사헌부 장령(掌令) 박숙달(朴叔達)이 입을 열었다. “지금 공경대부는 잔치하고 노는 것을 일삼아 강 위에 정자를 짓고 즐깁니다. 대소 관리도 잔치를 베풀며 기생과 광대를 청해 놀고 희롱합니다. 강가 정자를 헐게 하고 기생과 노는 잔치를 금하게 하소서.”

성종 = “당나라에서도 재상이 곡강(曲江)에 나가 노는 일이 있었으니 일 년 동안 근심하고 수고했는데 하루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대신들 = “지당하십니다.”

박숙달 = “‘역경(易經)’에 ‘신하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고, ‘시경(詩經)’에도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한 사람을 섬긴다’고 했으니 경대부(卿大夫)는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게으르지 아니하여야 할 것
인데 잔치하며 술마시는 것을 일삼는 것이 옳겠습니까?”

성종 = “태평시대에 공경대부가 어찌 항상 근심하고 걱정만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나치지 아니함이 옳으며 비록 놀고 휴식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박숙달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태평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태평함을 길이 보전하는 길입니다. 만약 스스로 태평시대라고 이르며,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을 모르면 어찌 태평함을 보존하겠습니까?”

대신들이 말머리를 돌렸다. “모여서 술을 마시는 법을 세웠으니 사치를 금하는 법도 세워서 거듭 밝히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 = “법을 세웠으니 검찰(檢察)만이 있을 뿐이다. 술을 금하는 것은 천천히 하라.”

박숙달이 화제를 바꿔 말을 이어갔다. “신이 강원도에 가서 보니 토지가 메말라 백성들은 농사를 힘쓰지 않고 목재를 팔아 사는데 이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니 예전에는 산림천택(山林川澤)을 백성들과 공유했습니다. 국가에 이미 금산(禁山)이 있으니 그 외 산들은 금하지 말게 하소서.”

성종 = “그렇지 않다. 금산 이외에 어찌 금함이 있겠는가?”

박숙달이 한 발 더 나아갔다.  “신이 보건대 전하의 다스림이 점점 처음과 같이 못합니다. 창원군(昌原君)이 사람을 죽여 신 등이 죄를 청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정인지(鄭麟趾)가 스스로 가난하다고 말하여 군상(君上)을 속였으므로 신 등이 죄를 청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제 또 허종(許琮)의 죄를 청했으나 따르지 아니하시니 전하께서 언론(言論)을 듣는 것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합니다.”

임금이 참다못해 신하들에게 물었다. “대간(臺諫)의 말은 반드시 다 따라야 하는가?” 대신들이 “주상께서 취하거나 버리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성종 = “허종은 대신이고 또 공신인데 어찌 죄를 가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물러설 박숙달이 아니었다. “우통례(右通禮)는 승직(陞職)해 좌통례(左通禮)로 삼은후 거관(去官)하게 하는 것이 예(例)인데 지금 신윤저(申允底)는 우통례로 거관하였으니 신은 법이 허물어질까 두렵습니다. 바로 잡으소서.”

성종 = “신윤저를 이 벼슬에 제수한 지 이미 오래됐다. 처음에 좌통례에 제수했어야 마땅한 것을 이조(吏曹)에서 우통례에 잘못 제수한 것이다.”

박숙달이 따지고 들었다. “신윤저는 재주와 덕은 없고 단지 문음(門蔭) 때문이었으니 통례에 제수된 것도 다행이었습니다. 승직하여 좌통례로 삼은 연후에 거관하게 하는 것은 아직 늦지 아니합니다.”

성종이 얼굴을 붉히며 단호하게 잘랐다. “마땅히 써야 할 것이어서 쓴 것인데 어찌 문음(門蔭)을 논하는가?”
▲성종과 사헌부 장령 박숙달 선생의 전설 같은 미담이 전하는 성종대왕실록.

이날 성종과 정(正) 4품관 박숙달 사이의 날 선 공방은 일곱 번이나 이어졌다. 스물한 살 성종의 인내와 경청의 자세가 놀랍다. 하지만 왕과 대신 앞에서 소신을 굳히지 않고 조목조목 진언하는 사헌부 장령 박숙달의 기개와 용기는 더 놀랍다. 영락없는 조선 제1의 언관(言官)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세조8년(1462년) 과거에 급제해 세조11년 사관으로 경연에서 논어(論語)를 강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7년(1476년) 사헌부 지평, 2년후 사헌부 장령, 그리고 끝으로 1481년 사헌부 집의로 봉직했다.


생전, 그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종12년(1481년) 8월12일 사헌부 집의 박숙달이 병으로 사직했다. 성종이 친히 글을 써(御書) 이르기를 “마음이 곧아서 가히 쓸 만한 사람이다. 우선 한가한 벼슬로 바꾸어라. 내가 나중에 특별히 중용하겠다.”


언관으로서 직분에 충성을 다했던 박숙달과 그 곧은 마음을 읽고 각별하게 아꼈던 성종. 547년 전 왕과 신하의 신화 같은 이야기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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