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라는 도구로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다 연재
세상 모든 프로젝트는 0%에서 출발합니다. 시작했다는 것 말고는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시작하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상태. 새롭게 시도하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상태. 돌아온
텀블벅 뉴스레터는 불가능의 0%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0%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매주 토요일 아침에
보내드리려 합니다. 연재를 여는 첫 주제 역시 '연재'입니다. 한 번에 완성하기 힘든 큰 작품도 작게 나누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재란 작가에게 좋은 도구입니다. 대신 매번 독자의 반응을 마주하며 나아가기에 결말을 정해두기 어려운
대담한 방식이기도 하죠. 연재라는 특별한 방식을 지렛대 삼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만화 속 하얀 네모 칸을 보신 적 있나요? 말풍선과 달리, 캐릭터의 속마음이나 이야기 속 상황을 설명하는 이 칸은 '내러티지(narratage)'라고 부릅니다. 이를 통해 캐릭터의 이면은 물론 작가의 의도나 앞으로의 서사를 파악하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인터뷰 시리즈 <내러티지>는 전통적인 지면이나 정식 연재 플랫폼은 물론, 다양한 공간을 종횡무진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 그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봅니다.
2017년 인스타와 페이스북에 '민사린'이라는 계정이 생겼다. 이 계정에는 민사린이라는 여성이 결혼 후 겪는 '며느리'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만화 <며느라기>가 매주 올라왔다. 많은 공감과 반응을 이끌어낸 이 작품의 작가가 누군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지만, 작가는 연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계정의 뒤에는 <3그램>,<스트리트 페인터>를 그린 작가 수신지가 있었다. 수신지 작가의 첫 독립연재 만화인 <며느라기>는 2017년 '오늘의 우리만화'를 수상했다. 어떤 작품이 상을 수상하는 일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며느라기>의 수상은 만화계의 지평을 바꾸었다. 작가 개인 연재작으로서 최초의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이었기 때문이다. '만화가' 그리고 '기획자' 수신지
만화가, 기획자, 출판사 대표 여러가지 정체성을 지녔다. 어떤 호칭이 가장 편할지? 역시 작가 아닐까. 만화가. 대표로 계신 출판사 귤프레스는 왜 '귤'프레스인가? 정말 귤을 좋아해서. 독립출판한 모든 책에 귤이 그려져 있다. 만화책과 귤은 잘 어울리지 않나? 만화책을 보면서 귤을 까먹는 것을 좋아한다. <며느라기>는 왜 SNS 개인연재로 선보이게 되었나? 웹툰 플랫폼과 정식 연재를 논의하다 엎어진 상황이 몇 번 있었다. 실망이 커지더라. 하지만 그 소재 자체가 내 머릿속에서는 너무 재밌기 때문에 꼭 하고 싶었다. 내가 이 만화를 구상하고 준비한 시간은 정말 긴데, 사실 편집부가 그 가능성을 판단하는 시간은 그에 비하면 짧지 않나. 그들의 판단을 그냥 받아들이고 작품을 이렇게 접는 게 맞는 걸까? 싶었다. 이미 몇 군데에 만화 초안을 보냈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도 있었다. 조급했던 이유는? <며느라기>의 소재 자체는 평범하지만, 많이 그려지지 않아서 특별하다고 봤다. 비슷한 소재를 다른 누군가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루빨리 세상 밖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SNS를 선택한 것도 있다. 어떤 허가를 거칠 것 없이 바로 발행할 수 있으니까. <며느라기>는 6개월 정도를 준비했는데 그동안 <며느라기> 작업 말고 다른 일을 거의 안 했다.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작업을 하고 책을 내면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빨리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다. 순진했다.(웃음) SNS 독립연재는 일반 상업연재와 다른 점이 있을까? 전혀 없다. 작업을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원처럼 규칙적으로 일한다. 운동도 꾸준히 하는 편이고. 이런 루틴은 독립연재 이전에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외주의 대부분은 SNS에 올리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더라. 개인 계정이 아니라 작품을 위해 만든 계정에 광고를 올리는 것이고, 결국 나를 구독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인스타, 딜리헙 병행연재는 어떻게 고안한 것인지? 자체적인 '미리보기' 시스템을 만들었다. *<곤>은 인스타에서 연재를 시작했지만, 그 다음화 미리보기를 '딜리헙'이라는 플랫폼에 업로드했다. '딜리헙'은 작가가 자신의 콘텐츠를 자유롭게 업로드하고,유저에게 판매할 수 있는 오픈마켓형 플랫폼이다. <며느라기>의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때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어디서 연재해야 할까?' 였다. 며느라기 이후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 매체가 생겨날 줄 알았는데 없었다. <며느라기>는 정식 고료가 없는 채 인스타그램에 올렸으니까 '완전 무료'였다. 당시 마음 속 한켠에 '내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있지만, 만화가 공짜라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 연재 중간에 딜리헙을 알게 되어 뒤늦게 딜리헙에서도 연재하게 되었다. 독자들에게 딜리헙이 어떤 곳인지, 딜리헙에서 연재하는 이유 등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잘한 선택인 것 같다. * 작가의 자전적인 암 투병기를 다룬 <3그램>은 책으로 먼저 선보였고,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아랑'의 이야기 <스트리트 페인터>는 웹툰으로 연재되었다. <며느라기>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곤>은 인스타그램과 딜리헙에서 동시 연재되었다. 책, 웹툰, SNS 개인연재, 오픈 마켓 등 만화를 다루는 거의 모든 플랫폼을 거쳤다. 각각 어땠나? 먼저 책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작품을 종이책으로 바로 내는 것은 작가 스스로 너무 만족스럽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장악할 수 있으니까. 맨 뒷장을 그리다 다시 앞으로 갈 수도 있고, 제작이 끝날 때까진 계속 수정을 거칠 수 있어 가장 집중하기 편하다. 연재는 아무리 세이브를 쌓아두어도 이미 발행된 앞의 내용을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댓글이나 반응같이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요소가 계속 생겨난다. 사실 책만 제작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단점은 안 팔린다는 거?(웃음) 노력에 비해 금전적인 보상이 너무 적다. 결국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엔 정말 용감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웹에서 만화를 보는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문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 누릴 수 있을 때 웹 문화를 누려야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책이 좋아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웹툰 시장이 시작될 때 나와 큰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고,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래도 경험은 해보자 싶어서 케이툰에서 웹툰 <스트리트 페인터>를 연재하게 됐는데 해보니까 스릴이 있었다. 연재라는 게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더라. 어떤 작품 하나가 6개월 만에 나온다는 것은 정말 빠른 편이니까. 연재하는 내내 뭔가 '붕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나쁘게 말하면 건강도 상하고 그 방식대로 쉼 없이 연재는 못 할 것 같다. 그 사이트는 타 사이트에 비해 유저도 적고 댓글 참여율도 적은 편이라 맘 편히 연재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때 '월급'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다. 너무 좋고 정말 충격적이더라. 남들은 다 이렇게 살았구나! 싶고.(웃음) 퀄리티와 상관없이 마감을 하면 이렇게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 충격적인 동시에 '계속 하다보면 여기서 못 벗어나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 내 이야기를 누가 돈 주고 보려고 할까? 김서울 (〈뮤지엄 서울〉 저자) 김서울 작가는 지난 2019년 텀블벅의 첫 연재·구독 기획전 '시리즈 오브 시리즈'에 참여해 6주간 한국 문화유산 콘텐츠를 연재했습니다. 배경지식 없이 흥미만 가지고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연재'하는 경험에 대해 "최근 메일링 구독 서비스를 론칭한 창작자가 많아서 절대 안 될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주제를 정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합니다. 최대한 이야기하는 결이나 포인트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치마저고리, 송광사 응진당 석가모니 후불탱, 나전칠 연꽃 넝쿨무늬 상자, 황해 해주 석불입상, 플로피 디스크, 제주 영등굿 영감놀이 등을 선정해 소개했습니다.
마라톤을 함께하는 페이스메이커처럼, 프로젝트의 여정을 함께할 수 있도록 펀딩 준비와 진행 과정을 솔직하게 전달합니다. 프로젝트 스토리에 미처 담기지 못한 창작자의 고충, 도전, 성취를 페이스메이커 연재를 통해 만나보세요.
코옵은 게임문화연구자와 미술비평가 2인으로 이루어진 문화예술 기획팀입니다. 우리 일상의 가장 사소한 것들이 가진 예술적 가능성을 이끌어 내는 프로젝트를 기획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순간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름 플래시. 1996년 출생. 2021년 사망.
1부 | 박이선 (코옵)
플래시는 미국에서 태어난 소프트웨어다. 플래시가 태어나기 전까지 인터넷은 딱딱한 텍스트나 반복적 움직임의 GIF 이미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플래시 덕분에 초기 인터넷 환경에서도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쉽게 만들고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인터랙티브 웹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졸라맨, 마시마로, 뿌까, 아바타스타 슈, 숫자송, 당근송, 우유송, 쥬니어 네이버, 야후 꾸러기, 주전자닷컴, 점심먹고노라라 등은 플래시와 관련된 2000년대의 키워드들이다. 그러다가 플래시는 죽음을 맞게 된다. 소유자인 어도비는 이 기술은 수명을 다했으며, 앞으로 3년간의 정리 기간을 거쳐 2020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서비스 지원을 종료할 것이라는 내용을 2017년에 발표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기술이 각자의 이유로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는 이미 카세트 테이프, 플로피 디스크, 영사기 등을 떠나보냈다. 하지만 나는 플래시의 죽음에 유독 슬픔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플래시는 친구와도 같았다. 방과 후 혼자 남은 집에서, 친구네 집에서, 학교 컴퓨터실에서 플래시는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는 성인이 되었다. 그 기억들이 잊혔을 무렵,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소식이 시한부 선고였다면 얼마나 슬플까. 말년의 소식을 보니 바이러스의 전파사건으로 인해 “당장 PC에서 지워야 하는 프로그램”으로 낙인이 찍혔더랬다.
나는 죽음을 앞둔 나의 기술 친구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선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2019년 5월, 플래시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프로젝트 〈R.I.P. FLASH〉를 동료와 함께 시작했다. 플래시가 했던 일들을 정리하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종이었다. 플래시를 기억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다.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20년 전 플래시 개발자를 수소문하여 인터뷰하기도 했고, 연구자들을 불러 플래시의 삶을 분석하는 글을 부탁하기도 했다. 나의 전공인 문화연구를 살려 플래시와 관련된 유산들을 발굴하고 가치를 기록해 나갔다. 코옵 팀이 구축한 〈R.I.P FLASH〉 웹사이트. 그렇게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을까. 일평생 수고했던 기술의 죽음을 의미 있게 기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와 같은 세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플래시를 추모한다면 플래시가 쓸쓸하지 않게 저승에서 기뻐할 것만 같았다. 이는 비단 나 자신뿐만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기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널리 알릴 수 있을까? 좁은 지인 네트워크를 넘어 전국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을 플래시의 장례식에 초대하고 싶었다. 하나의 문화적 가치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다. 나는 예전에 번역이 필요한 책을 제작하는 텀블벅 프로젝트에 후원한 경험이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의미 있다고 판단한 프로젝트에 기꺼이 후원으로 공감을 전했다. 그 결과로 내게 전달된 리워드는 누구 한쪽의 이득이라기보다, 후원자와 창작자 서로가 모두 만족할만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 기억이 좋았다. 이번엔 내가 창작자가 될 차례였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긍정적 경험을 누군가에게 다시 전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텀블벅을 통해 책을 만들어 나누기로 했다. 플래시의 죽음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비석 모양으로 책을 디자인하고, 이 비석에 우리가 그동안 정리해온 내용을 담기로 했다. 독창성을 더하기 위해 팀원들과 장기간에 걸쳐 준비 회의를 하며 여러 아이디어들을 도출시켰다. 책은 단순히 지면을 넘어서 온라인과 연동되는 방식으로 발전했고, 프로젝트와 연계되는 미니게임을 만들기도 했으며, 유쾌한 장례식이 될 수 있도록 추모용품 굿즈를 함께 제작하기로 했다. 프로젝트는 점차 풍성해져 갔다. 〈R.I.P. FLASH〉의 스토리를 텀블벅 페이지에 차곡차곡 눌러 담아냈다. 다 쓰고 나니 ‘故 플래시 추모식 초대장’처럼 보였다. 미리 사람들이 알려질 수 있도록 프로젝트 공개 예정 버튼을 눌렀고 디데이는 점점 다가왔다. 우리는 곧 있을 프로젝트의 론칭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인생 첫 텀블벅 프로젝트 창작. 과연 우리는 플래시의 장례식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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