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3매 |  최갑수

노던 라오스, 흙먼지 너머 어렴풋한 내 청춘의 한 때

루앙프라방, 므앙씽, 므앙노이 느아, 농키아우, 루앙 남타 ……. 내 청춘을 수놓았던 지명들이다.


삼십 대에 나는 라오스 북부를 떠돌았다.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뒷자리에 배낭을 싸매고 여행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시절이었다. 삼각대까지 싣고 다녔으니 말이다. 내게 청춘이라면 이십 대 때가 아니라 그때였다. 이런 무모한 감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으니 말이다.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한때 루앙프라방에 관한 작업을 하겠다며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을 때였다. 라오스 제2의 도시라고 했지만, 시내에 상주하는 인구는 4만 남짓이었다. 우리나라의 면 소재지 정도의 분위기였다. 자전거를 타고 루앙프라방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는데, 보름 정도 지나니 경조사에 참여할 정도가 됐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고 장례식에도 불려 가기도 했다.


루앙프라방에 이십일 정도를 머물다, 라오스 북부를 여행하기로 했다. 루앙프라방을 떠나기 전날, 홍콩에서 온 여행자 퓨이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나를 따라가겠다며 나섰다. “나도 초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고 싶어.” “안돼. 난 혼자가 편해.” 그는 내가 묵는 게스트하우스 옆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었는데 우리는 저녁이면 각자의 베란다에서 비어 라오를 마시며 메콩강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언젠가 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보름 동안 라오스 북부를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그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내일 떠난다고 하니 그가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동행


“나도 라오스 북부에 가보고 싶어. 이제 루앙프라방은 좀 지겨워졌어.” 퓨이가 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난 혼자가 편해. 너와 함께 다니면 이런저런 신경 쓸 일이 많을 거 같아. 게다가 넌 여자잖아. 아마 엄청나게 불편할 거야.” “나 때문에 불편할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해.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만 따라다닐게.” “그림자도 귀찮아. 벌써부터 불편한걸.”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커다란 배낭과 함께 게스트하우스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는 주민들로 가득했다.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자는 나와 퓨이 뿐이었다. 동남아의 버스는 신기한 것이,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타면 어떻게든 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나와 퓨이는 따로 떨어져 버스에 자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내 왼쪽 옆에 앉은 아저씨는 커피포트 사진이 박힌 커다란 박스를 품에 앉고 있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아이는 닭장을 안고 있었다. 물론 닭장 안에는 붉은 볏을 머리에 인 닭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닭 정도는 버스에 타도 되는 때였다. 버스가 흔들리면 닭은 불편하다는 듯 푸드덕거렸다. 나는 아저씨와 아이를 좌우로 번갈아 보며 인사했다. 싸바이디(안녕하세요).


네 시간? 여섯 시간? 버스는 우리를 어느 자그마한 마을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여기서부터 오토바이를 빌려서 가기로 했다. “퓨이, 여기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가자. 비좁은 버스에서 시달리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아.” 퓨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초이, 미안하지만 난 사실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 뭐, 뭐라고? 오토바이를 탈 줄 모른다고? 그는 분명 오토바이를 탈 줄 모른다고 했다. 맙소사! 라오스의 뜨거운 햇빛이 팔등을 달구고 있었다.


이십 분 동안 퓨이를 설득했다. 너는 여기서 다시 루앙프라방으로 돌아가라. 버스만 타면 되니까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닭장 옆에만 앉지 않는다면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퓨이는 고개를 저었다. “노던 라오스를 꼭 여행하고 싶어.” “이것 봐, 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할 거라구.” “오토바이는 지금 당장 배울게. 자전거를 탈 수 있으니 오토바이도 금방 탈 수 있을 거야.”


결국 온 마을을 뒤져 기어가 없는 오토바이를 겨우 한 대 찾아냈다. 스로틀을 당기기만 하면 앞으로 가는 오토바이. 일단 이거라도 타고 가보자. 퓨이가 오토바이에 익숙해지는 동안 그 마을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했는데, 다행히 퓨이는 하루 만에 오토바이를 그럭저럭 운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퓨이는 오르막길을 만나면 오토바이를 내팽개쳐 두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오르막길이 무섭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르막길 꼭대기에 내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걸어 내려가 퓨이의 오토바이를 몰고 오르막길을 다시 올라와야 했다.


나 혼자 오토바이를 힘껏 달려 퓨이를 뿌리칠 때도 있었다. 사이드 미러에서 퓨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으면 길 끝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조그만 점 하나가 보였다. 퓨이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헬멧을 벗겨 다시 씌워 주었다. 헬멧을 거꾸면 쓰면 어떡해.


스콜을 만나 길이 진흙탕이 되면 오토바이를 몰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중산간 소수민족의 집 처마에서 비를 긋기도 했고 그들에게 음식을 얻어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1달러짜리 게스트하우스도 있었다. 내가 머물던 루앙프라방의 게스트하우스도도 에어컨 달린 방이 하루에 5달러였다. 1달러짜리 게스트하우스는 모기장 속에 매트리스 하나가 놓여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서른 살의 나는 그런 곳에서도 잘 수 있었지만, 퓨이는 그러질 못했다. ‘핫 샤워.’ 게스트 하우스 입구에서 그녀는 주인에게 언제나 이렇게 물었다. 나는 여성들이 꼭 핫 샤워를 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가끔 퓨이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초이, 내 방에는 모기가 너무 많아. 나는 퓨이의 게스트하우스로 가(나는 1달러짜리에서 머물렀으니까) 방문 아래로 난 문 틈을 막아주었다.


사진을 찍다가 원주민에게 쫓기기도 했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넘쳐날 때였다. 삼각대까지 가지고 다닐 때였으니까.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낫을 원주민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카메라를 가방에 대충 넣고 힘껏 내달렸다. 퓨이는 벌써 저만치 앞서 달리고 있었다.


오토바이의 뜨거운 머플러에 종아리가 닿아 화상을 입은 적도 있다. 다행히 마을이 가까이 있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려는데, 내 종아리에는 털이 많아 반창고가 붙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일어서더니 수돗가로 낫을 숫돌에 슥슥 갈아대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거지? 왜 또 낫인 거지? 잠시 후 아주머니는 낫을 들고 내게로 오더니 종아리에 난 털을 낫으로 밀어대기 시작했다. 퓨이와 동네 주민들은 나를 둘러싸고는 키득대고 있었다. 종아리는 매끈해졌고 반창고는 다행히 잘 붙었다.


므앙씽이라는 별


최종 목적지인 므앙씽에 도착했다. 중국 남서부 국경과 가깝다. 므앙씽으로 출발하기 전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다 스웨덴에서 온 여행자 얀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므앙씽에서 일주일을 보냈다고 했다.


“므앙씽은 어떤 곳이지?” 내가 물었다. “아름다운 별이지.” 얀스가 대답했다. “별이라니?” 얀스는 저녁 하늘의 저편을 가리켰다. 첫 별이 희미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므앙씽은 우주 한가운데 고요히 떠 있어. 그림자를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미소’라는 언어를 사용하지. 그들의 얼굴 근육은 우리보다 훨씬 진화해서 수백 가지의 미소를 만들어낼 수 있어. 네가 므앙씽으로 간다면 따뜻한 미소로 맞아줄 거야. 밤이면 하늘을 바라봐. 네가 지금까지 보아온 별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열 배는 많은 별들이 떠 있을 테니까.”


므앙씽에 도착했을 때는 저물 무렵이었다. 마을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붕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멀리서 노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여기가 므앙씽이라는 별이군. 므앙씽이라는 별에 도착한 어리둥절한 지구인인 나와 퓨이는 우선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나는 싼 곳으로 퓨이는 핫샤워가 가능한 곳으로.


짐을 대충 정리하고 게스트하우스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으니 어둠이 찾아왔고 별이 돋기 시작했다. 하나둘 떠오르던 별들은 어느새 밤하늘에 가득 찼다. 나는 우주에 그렇게 많은 별들이 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처음 알았다. 그리고 수많은 반딧불들. 반딧불은 별과 별 사이를 유영하는 또 다른 별이었다.


“Amazing!” 누군가 내 옆에서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중년의 여행자가 서 있었다. 독일에서 왔다는 그는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했다. “여긴 정말 환상적인 곳이군요.” 그가 마미야645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름다운 별이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도 여기를 별이라고 표현하는군요. 여기까지 오며 여행자들도 이곳 므앙씽을 당신과 똑같이 말했어요.” “나 역시 다른 여행자가 말한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아마 릴케가 이곳에 왔더라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각자의 마음과 생각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나는 므앙씽이라는 별을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했다. 므앙씽을 떠나기 전날, 독일인 사진작가와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잠시 지구를 벗어나 있었던 것 같아요. 밤이면 거대한 은하를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느꼈어요.”


나와 퓨이는 우리가 떠나왔던 길을 되짚어 오토바이를 빌린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다행히 원주민에게 쫓기지는 않았다. 퓨이는 어느새 오토바이를 잘 타는 씩씩한 홍콩 아가씨로 변해있었다. 오르막길도 혼자 잘 올랐다. 하지만 핫샤워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퓨이의 오토바이에 펑크가 난 적이 있었다. 수리를 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트럭을 불러와야 했다. 퓨이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배낭을 펑크 난 오토바이 옆에 두고 뒷자리에 퓨이를 태우고 갔다. 두 시간 만에 트럭과 함께 돌아오니 오토바이 옆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은 누가 배낭을 가져갈까 봐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여행한 라오스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가끔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에는 따로 메뉴판이 없어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소와 돼지의 울음소리를 내야 했다. 가끔 마당의 닭이나 들판의 염소를 가리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음식이 나오는 데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다. 퓨이와 내가 내는 소, 돼지, 닭 울음소리는 서로 달랐는데, 라오스 사람들은 퓨이의 흉내를 더 잘 알아들었다. 같은 동남아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마을 사람들 단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왔다. 그럴 때면 퓨이가 많은 도움이 됐다. 그녀는 사람을 모으고 자리를 잡게 했다. 아이들은 앞에 앉히고 키가 큰 사람들은 뒤에 서게 했다. 마을 어르신 한 명은 내게 자신의 딸과 결혼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퓨이를 가리키며 와이프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을을 나올 때 할아버지의 딸은 내게 “당신과 퓨이가 부부가 아니라는 걸 전 알고 있어요” 하고 내게 말했다.


므앙씽을 떠날 때 므앙씽의 붉은 황톳길에서 주운 돌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은 내가 므앙씽이라는 신비로운 별에 다녀왔다는 작은 증거였다.


희미해지고 어렴풋해진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젠 그때의 여행이 어렴풋하고 아득한 멀게만 느껴진다. 내가 추억하는 므앙씽에서의 내 모습은 내가 아닌 듯 낯설기만 하다. 므앙씽에서 주워 온 돌멩이, 갓 태어난 포유류처럼 따뜻했던 그 돌멩이, 므앙씽이 그리울 때마다 만지작거리던 그 돌멩이는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사라졌다. 퓨이도 어느덧 중년의 아주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립긴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이 이미 변했을 테니까.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을 테니까.


살아오며 차라리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희미하고 어렴풋하다. 점점 희미해지고 어렴풋해지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디론가 떠나가겠지. 므앙씽에서 가져왔던 그 돌멩이처럼 말이다. 아,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라지니까, 남지 않으니까,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뒤돌아 보면 흙먼지 자욱한 길 너머, 서른 살의 내가 맹렬히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 사랑도 인생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작가다. 라오스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다가 그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을 정도로 루앙프라방을 사랑한다. 쓴 책으로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ssuchoi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 나의 첫 차 수업 |  금진방

첫 차를 우려보았습니다 

“차는 어떻게 우려야 하나요?”

이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하다. 난감한 이유는 질문자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하면서도 명쾌한 답을 원하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에게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라는 질문을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 또 한 편으로 이 질문이 반가운 이유는 질문자가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고 싶어 한다는 사인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은 차를 어느 정도 마시다 보면 자연스레 생겨나게 마련이다. 하나의 과정인 셈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이 남이 사주는 혹은 해주는 음식이듯, 차도 남이 우려 주는 차가 가장 맛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가 우려 주는 차만 마실 수는 없다. 개인 차예사를 둘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췄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보통 사람에게 이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전용 차예사를 고용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러면 차를 우릴 때 느끼는 기쁨을 고스란히 포기해야 한다. 이는 차를 마시는 즐거움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정도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 날엔가 차 마시는 법을 배워야지 하고 결심이 서는 순간이 온다. 이 결심은 서서히 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 문제다. 문을 열면 그 결심이라는 녀석이 냉큼 손목을 잡아끌고서는 저벅저벅 앞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 가시죠. 그런데 속수무책이다. 따라 가는 수밖에는. 


나 역시도 그랬다. 그냥 결심의 뒤를 졸졸졸 따라갔을 뿐이다. 차를 일 년 정도 마셨을 때쯤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2018년, 중국의 설날인 춘제春節 때의 일이다.


춘제는 중국에서 가장 크게 지내는 대명절이다. 이때는 길게는 한 달, 짧게는 보름 정도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차관도 마찬가지. 그런데 문제는 길고 긴 춘제 기간 차관도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차는 마시고 싶지만 어떻게 우려내야 하는지를 몰랐던 나는 중국인 친구에게서 받은 보이차 덩어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일주일 넘게 안절부절못하며 차에 목말라했다.


일주일 넘게 차를 못 마시자 어느새 금단 증상이 극에 달했고, 겨우겨우 그 증상을 참아 낸 나는 춘제 연휴가 끝나자마자 차관으로 달려갔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빨리 달린 순간이다. 팽주 실장님이 어찌나 반갑던지 달려가 얼싸안을 뻔했다.


결핍은 배움의 씨앗이라 했던가. 차가 우려지는 동안, 나는 이전과 달리 팽주의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아, 저건 저렇게 하는구나. 순서는 저렇구나. 팽주의 동작을 보고 또 보고 눈에 익히고 머리에 새겼다.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언젠가 골동품 거리에서 사서 집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다구를 꺼내어 정성 들여 닦았다. 그러고는 차관에서 보았던 팽주의 동작들을 기억해내며 내가 직접 차를 우렸다.


그런데 썼다. 그것도 아주, 정말, 매우 많이 썼다. 이런.

차호 속에 든 찻잎을 버리고 다시 차를 우려 봤다.

이번엔 싱거웠다. 너무 싱거웠다. 다시 이런.

이게 보는 것만큼 쉽지만은 않구나. 나는 바로 J 선배의 집으로 달려갔다.


차 우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내 말에 J 선배는 천천히 시범을 보여 주었다. 다구를 세팅하고, 차를 우리고, 차를 따는 선배의 손동작은 어설픈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지네딘 지단의 드리블 같았다고 할까. 유연하고 부드러웠고 아름다웠다. 선배의 동작을 보면서 나도 제대로 차를 우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 같다.


J 선배의 지도에 따라 차를 천천히 우려 보았다. 한 번의 가르침으로 완벽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한 맛이 났다. 맛이 좋았다는 건 아니고 적어도 마실 만은 했다는 말이다. 그렇지. 뭐든 처음 시작할 때는 스승에게 배워야 한다.


먼저 마신 보이차를 비워 내고 백차를 우려 보았다. 이번에는 우리는 시간을 조금 짧게 해보라는 J 선배의 말에 시간에 신경을 써서 차를 우렸다. 그런데…… 이전에 J 선배가 우려 줘서 맛을 보았던 백차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도저히 마실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풋내가 너무 강했다. 어설픈 백차였다.


차를 우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복잡했다. 그리고 미묘했다. 서너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이나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이 우려 주었던 차만큼 맛과 향이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이지만 당시에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차를 잘 우려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승부욕에까지 불타 의욕이 넘쳐났으니 말해 무엇하랴. 아무튼 차 맛도 내 마음도 어지럽기만 했다.


사실 차를 우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리는 간단하다. 그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반복 훈련을 통해 숙련도를 높이기만 하면 된다. 차를 많이 우리면 우려볼수록 차의 맛도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여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의 유영 같은 지단의 드리블은 꾸준한 연습과 반복된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단에게 주어지는 축구공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축구공은 똑같다.

차를 사랑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차를 마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차를 권한다. 대륙의 식탁 베이징을 맛보다 중국의 맛을 썼다. 미식가로도 유명한 그의 인스타그램 @gold_awesome에는 차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 이야기가 있으니 꼭 방문해보자.

✏️ Words | 평생을 살아가는 이유


여름 내내 찬란하던 자귀나무가 비로소 잎을 떨어트린 까닭은 이제는 땅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위함이다.  

강물이 오랜 시간을 흘러 바다에 닿는 까닭은 자신이 간직해 온 깊고 맑은 지혜를 전해주기 위함이다.

저물 무렵의 산 그림자가 느린 걸음으로 마을로 내려오듯 오늘 나의 눈은 당신의 눈을 깊고 깊게 응시한다.

누군가를 향해 귀를 기울인다는 것. 참 아름다운 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습관이자 유익한 도구.

오늘 내가 산을 물들인 만산홍엽처럼 친절하고 처마 밑의 풍경소리처럼 다정한 까닭은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니 당신 마음의 중심을 향한 그 어떤 수고는 결코 헛되거나 아깝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한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 alone&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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