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너구리 이야기: 우리가 자꾸만 할 일을 미루는 이유

하락 국면에 있던 원자력 산업이 다시 주목받고, EU의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최근의 에너지 위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현재 유럽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러시아는 2014년에 우크라이나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크림반도를 무단으로 병합했는데요. 이에 우크라이나는 나토(NATO,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설된 일종의 국방 기구) 가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러시아는 접경 국가까지 나토가 진출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죠. 그리고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의 갈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유럽으로 보내는 가스관을 차단했습니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공급망 부족 사태가 확산되고 물가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가스관까지 차단하자 국제 유가는 7년 만에 최고치를 달성했습니다. 사실 미국도 러시아와 함께 세계 최대 셰일 가스 생산국 중에 하나였는데요. 미국이 친환경을 목표로 정유사 투자를 줄인 이후, 미국 역시 유럽에 가스 수출을 증가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결국 당장의 에너지가 부족해지자 유럽의 친환경 정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에너지에게 큰 힘이 실리게 된 것이죠.

EU의 그린 택소노미 결정으로 원자력 발전이 친환경 에너지에 분류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원자력 발전의 환경 및 안정성에 대한 불신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 각광받는 것이 소형 모듈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인데요. SMR은 기존 대형 원전의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극대화한 원자로로 불립니다. 특히 SMR은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의 주요 기기가 하나의 압력 용기에 담겨 있는 일체형입니다. 이는 주요 기기가 따로 연결되어 있는 기존 대형 원전과 달리, 사고 발생 시 연결 부위에서 방사능이 유출될 위험이 없습니다. 실제로 SMR의 안정성 기준은 10억 년 중에 1번으로, 기존 대형 원전 손상률인 10만 년에 1회보다 1만 배 안전하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세계 주요 국가들도 앞다퉈 원자력발전 정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SMR 개발에 7년간 32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고, 아이다호 주에는 중소형 원전 12기가 새로 건설될 예정입니다. 프랑스는 자체 SMR 기술 개발과 원전 폐기물 관리 개선에 10억 유로를 투입하겠다고 밝혔으며, 20년 넘게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도 탄소 배출 절감을 위한 핵심으로 원전을 지목하고 2050년까지 약 45조 원을 투자해 SMR 16기를 건설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차세대 원자력 기술에는 SMR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SMR이 규모와 구조를 변경하여 원자력 기술의 안정성을 추구했다면, 에너지 생산 방식 자체를 바꾸는 연구도 진행 중인데요. 그것이 바로 핵융합 발전입니다.

기존에 활용되던 원자력 발전은 엄밀히 말하면 '핵분열' 방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우라늄을 분열시켜 핵반응을 연쇄적으로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낮은 비용으로 많은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경제성이 있지만, 안정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기술이기도 하죠.

이와 달리, 핵융합 발전은 가벼운 원자핵들을 무거운 원자핵으로 융합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바닷물 1L로 석유 300L와 맞먹는 에너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고효율을 자랑하며, 방사능 폐기물 걱정도 없는 기술이죠. 그러나 문제는 현재 기술로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인데요. 핵융합을 하려면 1억 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하여,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플라스마 상태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핵융합은 현재 상용화 가능한 기술은 아닙니다. 그러나 점차 민간 기업의 기술 수준이 올라오고 많은 투자를 받으면서, 핵융합 발전의 상업화에 대한 기대감이 증가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핵융합 회사 중에서 Commonwealth Fusion은 빌 게이츠와 조지 소로스 등의 투자를 받고, General Fusion은 제프 베조스를 비롯한 많은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였습니다.

다양한 원전 기술이 나타나면서 원전 해체 시장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2021년 4월 기준, 이미 전 세계 21개국에서 192기의 원자로가 폐쇄되었으며, 영국의 다국적 컨설팅 그룹 딜로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원전 해체 시장은 2030년까지 123조 원, 2050년까지 204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국내 원전 해체시장 역시 성장하고 있으며, 국제 원자력기구에 따르면 2029년 국내 원전 해체시장은 총 22조 원으로 전망됩니다.

우리나라는 2019년 원전 해체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하며, 원전 해체를 국내 원자력산업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로 적극 육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2035년까지 글로벌 시장 점유율 10% 달성과 원전 해체 Top 5 국가를 목표로 제시했죠.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정부가 제시한 원전 해체 시나리오의 현실성과 경제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원전 해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방사성 폐기물 처리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 후 핵연료가 남아있는 이상 해체산업은 부가가치가 없는 1회성에 불과하다는 것인데요. 그러나 원전 기술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는 만큼, 앞으로 원전 해체 기술 역시 충분히 발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국내 원자력 산업은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 측면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왔습니다. 특히 40년 동안의 기술 국산화를 통해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갖춰 수출에도 성공했죠. 하지만 원자력 산업은 에너지 전환이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비중이 낮아지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산업 둔화가 가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원전 산업 매출은 1997년 약 6.5조 원에서 20년 뒤인 2016년 27.5조 원까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2019년에는 이 수치가 20.7조 원으로 감소했죠. 전문인력 역시 약 1,700명이 감소하며, 원자력 산업은 한국의 미래 먹거리에서 배제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EU에서 그린 택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원자력 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여전히 국내 원자력 산업의 전망은 어두운데요. 탈원전 기조가 유지되는 현재 상황에서, 원전 시장의 경쟁력을 키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2012년 세계 최초로 소형 원전을 개발했지만, 이후 연구를 크게 진전시키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우리나라보다 늦게 개발을 시작했지만, 이미 2030년 완공을 목표로 로드맵이 진행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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