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우치다 선생님 책을 읽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조합된 단어·문장이 종종 보이잖아요. 가령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처럼요. 이번 책에도 그런 표현들이 꽤 있죠. 저는 ‘지적 흥분’이라는 단어가 참 좋았어요. 독자를 흥분하게 하는 책을 쓰고 싶다고 표현하신 게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고요. 번역하시면서 선생님께는 유독 어떤 부분이 와 닿았는지 궁금해요. 선생님께는 이 책의 어떤 꼭지가 가장 큰 지적 흥분을 일으켰어요?
박 선생님의 모든 답변, 모든 꼭지가 지적 흥분을 일으키고 배움의 지평을 넓혀 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한 꼭지를 꼽자면 제가 드린 마지막 질문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학자로서 지금까지 만들어 오신 ‘학지’가 있으면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에 대한 답변입니다. 특히 아래 문단에 전하시려는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학자의 야심은 결정판 연구 논문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 논문을 쓰는 바람에 이제 아무도 그 분야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와 같은 결과물을 내는 것이 학자의 영광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자라면 오히려 “그 사람이 그 논문을 쓰는 바람에 ‘나도!’ ‘나도!’ 하며 그 분야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나왔다”는 데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학문을 저처럼 이해하는 사람은 일본의 학계에서는 예외적 소수입니다. 학술 연구는 집단의 영역이며, 모든 연구자는 연구자 집단이라는 ‘다세포 생물’을 형성하고 있어 자신 역시 그중 하나의 세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학자로서 만들어 온 학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제 답은 “그런 것은 없다”입니다. 저는 학지를 집합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재직하면서 학술 논문이라는 것을 써 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학술서를 쓰면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적시하는 데 멈추고 사견을 말하지 않는 것’을 지적인 일로 생각하고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죠. 우치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듯이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말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만이 학술적으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학술은 집단적인 영위이기 때문이죠. 비유적인 표현을 쓰자면 학술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벽돌’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을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큰 바위를 운반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벽돌을 나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에 딱 맞는 그야말로 작은 돌을 나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위 크기의 크고 작음은 지금 당장은 상관없습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선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술적 행위의 본질이라고 우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저도 선생님의 말씀에 화답하고 저만이 나를 수 있는 ‘작은 돌’을 찾고 있습니다.
맥 혹 이 책 번역 작업이 다른 책 번역 작업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셨다면,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느끼셨는지도 궁금해요.
박 우치다 선생님 책을 비롯해서 기존에 제가 한 번역과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책들의 번역이 ‘완성된 요리를 맛보는 일’이라면과 이 책의 번역은 ‘저자와 함께 요리를 만들어 가면서 맛보는 과정’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먼저 유유와 함께 음식의 재료를 구해서 우치다 선생님과 어떤 요리를 만들지 레시피를 함께 궁리하고 요리를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을 전부 함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번 책 작업의 특징은 ‘스승’을 만나고 섬기는 과정을 체험한 것에 있습니다. 저는 배움에는 크게 두 가지 형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맞춤형 배움’이고 또 하나는 ‘미지의 배움’입니다. ‘맞춤형 배움’은 비유하자면 메뉴를 보고 요리를 고르는 것입니다. 이런 배움은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리고 관심 여부에 따라 접할 기회가 한정되죠.
뭐든 독학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맞춤형’ 배움이 이루어집니다. 배움의 초기 단계에서는 독학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독학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배움이 ‘주문에 기초해서’(on demand)밖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말을 하면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무엇이 나쁜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는 것은, 이른바 자신이 가고 싶은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를 보고 그중에서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을 고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먹은 적이 없는 것을 먹게 되는 셈이니 물론 지식과 경험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그 사람은 정해진 메뉴 중에서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레스토랑에 갈지 고르는 것도 자기 자신이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갈지, 중식당에 갈지, 한식당에 갈지를 오로지 자신이 정합니다.
반면 스승을 만나는 일은 자신이 아는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판에 나와 있는 요리를 고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갑자기 “자, 그럼 가자” 하는 말을 듣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스승의 뒤를 쫓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레스토랑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자, 이걸 먹어라” 하고 스승이 내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을 한 음식이 들어 있는 접시 같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주합니다. 요리 모양도 그렇고 음식 냄새를 맡아 보니 기묘한 냄새가 납니다. “이게 뭡니까?” 하고 물어봐도 “설명은 됐고 일단 먹어라”라는 말만 들을 뿐이지요. 어쩔 수 없이 일단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먹어 보니 태어나서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희한한 맛이 납니다. 하지만 스승을 믿고 묵묵히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점점 맛에 적응되어 그 음식을 맛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급기야는 그 음식 덕분에 몸과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스승을 만나는 일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독학으로는 이런 여정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이 책을 기획하고 번역하면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미지의 배움’을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맥 선생님께서 쓰신 책·번역하신 책에서 본 선생님 소개글이 늘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독립연구자. 우리 책에는 독립연구자이자 세계 유일의 우치다 다쓰루 연구자라는 소개글을 써 주셨는데요, 독립연구자로서 그리고 우치다 다쓰루 연구자로서 앞으로 더 하시고 싶은 연구와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근 한국 소설과 에세이가 일본어로 많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일본 학술서와 다양한 작가들의 책도 한국어로 꾸준히 번역되고 있고요. 한데 한국 학술서가 일본어로 번역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는 게 바로 이 ‘불균형’ 현상입니다.
저는 학술이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하여 우치다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학술의 본질은 그들만의 리그(예컨대 학계)에서 수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학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닿는 일이다’를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 일환으로 『갑자기 시작하는 비고츠키: 중학생부터 시작하는 대학 강의』와 『갑자기 시작하는 해럴드 가핑클』 등을 집필하고 있고, 집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유유에서 꾸준히 펴내는 문장시리즈도 한 권 써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숙의 말들』로요. 그리고 지금까지 우치다 다쓰루 연구서를 두 권 출간했는데,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유유출판사)와 『우치다 다쓰루』(커뮤니케이션북스)가 그것입니다.) 이 책들에 더해서 좀 긴 호흡으로 우치다 다쓰루 사상을 논하는 책을 집필하고 싶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이 ‘레비나스 3부작’을 집필하신 것처럼 저도 ‘우치다 다쓰루 3부작’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