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기꺼이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턱괴는여자들, 정수경
여기 다섯 편의 에세이가 있다. 케롤 슈디악의 사진 시리즈 <Possibly Here>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들이다.
뉴욕과 브라질을 오가며 작업하는 슈디악은 2012년부터 약 5년간 양로시설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요가를 가르쳤다. 슈디악은 요가 강사와 수강생으로서 차분히 그들과 관계를 맺어 나갔다. 굳은 몸이 이완되는 만큼, 마음을 열게 된 노인들은 자신의 작은 거처로 작가를 초대했다. 양로시설은 무연고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을 의탁하는 곳이다. 이름, 가족, 직업, 출신, 살아냄으로써 얻고 남긴 것들… 사회에서 많은 부분이 지워진 이들의 작은방. 사용자의 존재가 지워질 3평이 채 안 되는 방에는 똑같은 침대, 똑같은 협탁 그리고 철창이 둘러진 작은 창문 하나가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사진과 평생 간직한 물건으로 자신만의 장소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있다. 슈디악의 파인더는 규격화된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개인의 미시사를 주목한다.
나는 양로시설이 외로워진 이들을 수용하는 장소이자 외로움을 생산하는 주체로 여긴다. 사회에서 보이지 않아야 할 대상들을 규격화된 건축물에 모아 놓고 감춰 놓는다는 점에서. 지독하고 건조하고 때로는 끈적이기도 한 외로움 현상은 어디서 시작돼 우리를 지배하는 걸까. 이 의문과 이어지는 고민은 턱괴는여자들의 책 『외인구단 리부팅 : 야구장 속 여성들의 자리는 어디인가』(2022)를 집필하기 위한 리서치 단계에서 시작됐다. 여자야구선수들은 그 누구보다 용맹한 캐릭터다. 사회가 열어주지 않은 문도 박차고 들어가는 사람들. 그런데 인터뷰에 참여했던 7명의 선수는 대부분 외로움에 관련된 경험을 털어놓았다. 선수 각각은 대한민국 최초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여자야구 선수이거나, 대학야구 사상 최초 선발투수인 여자야구 선수거나, 여성으로서 야구씬 내에서 직업을 갖게 된 야구 교육자인데 말이다. 자부심을 느낄만한 프로필을 갖고 있음에도 이들은 줄 곳 야구장이 혹은 야구의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배제의 감정을 고했다.
“초∙중학교 (야구부 시절)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거의 왕따였거든요. [...] 선수들 속에서도 외롭고, 나를 지켜주는 어른이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굉장히 외로웠어요.”
- 얀향미 선수 인터뷰 중 발췌
『외인구단 리부팅 : 야구장 속 여성들의 자리는 어디인가』, 후주, 2022, p.204
원인을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은 이상하게도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는 유독 관대하다. 사실, 외로움은 동시대가 겪어내고 있는/앞으로 더 많이 겪을 현상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타깃이다. 2018년, 한국임상심리협회는 소속 심리학자 317명에게 한국인의 고독 지수를 설문했다. 100점 만점 중 78점을 기록했다. 이 숫자는 성인의 60% 이상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심리적으로 나약한 개인의 탓으로 빠르게 판단해버린다. 본질을 파악하지 않음의 결과는 무지로 남는다. 외로움을 주제로 한 연구논문이 20년간 단 17개밖에 없었다는 점[1]을 꼬집는 한 연구자의 말처럼 우리는 외로움에 관해 전혀 모른다. 단지 심리적인 요인에 기인해 외로움이 형성된다면, 젊은 세대가 52만명 이나 은둔하고 고립하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을거다.[2]
사전적 정의로 외로움(Loneliness)은 홀로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말한다. 외로움은 고독(Solitude)과도 다르다. 철학적으로 고독은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스스로' 들어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외로움은 주변에서 자신이 고립되는 양상이다. 자의성과 타의성이라는 차이가 있다. 여자야구 선수들에게 야구장처럼, 사회에서 지워진 노인들에게 할당된 양로시설처럼, 어떤 장소나 집단에서 대상이 지워질 때, 소외의 결과로 외로움이 생성된다. 턱괴는여자들로 모인 나와 동료들은 외로움에는 마음이나 느낌보다 더 입체적인 형상이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 외로움이란 구조적으로 형성된다. 사전적 정의를 당장 우리의 가설로 덮고 싶지는 않다. 그럴 역량도 없다. 다만,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외로움을 파헤치는 첫 번째 방법론으로 ‘에세이'를 골랐다.
에세이의 어원은 12세기 프랑스어에서 왔다. 시도한다(essayer, [에세이예])는 뜻이다. 시도한다는 것은 포기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본질에는 ‘정밀하게 측정’하고, ‘세심하게 검토'하는 과정이 있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추정하고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글. 형식, 스타일, 표면적 짜임새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이로써(누군가는 “이로써"에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글."
- 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김정아 옮김, 카라칼, 2023, p.15.
다섯 편의 에세이를 통해서 외로움과 그 생성원리를 시험해 보고, 가정해 보고자 한다. 글 속에서, 삶 속에서 뚜렷한 윤곽을 그리는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외로움이라는 끈적이고 불명확한 어떤 존재를 재정의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처절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에세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다. <Blind Essay Project>를 통해 독자는 에세이스트의 글을 통해 아직은 볼 수 없는 작업을 더듬거리고 상상한다. 그 과정에서 외로움의 다면체 중, 어떤 모서리를 우연히 발견하기를, 새로운 가설과 가정이 탄생해 덧붙여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