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 교양 : 3분 인문학의 시대

‘아는 척’ 교양 : 3분 인문학의 시대

Mr. Know-it-all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34), 2022.3.30,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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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아는척, 교양, 다독(多讀), 고전, 피클

1.머리말

2.‘아는 척’ 교양 : “속물 교양”

3.고전, 그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

4.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최근 SNS를 보다보면 ‘아는 척’ 인문교양 상품들에 대한 홍보가 종종 눈에 띕니다.

아는 척의 핵심은 역시 가성비와 압축일텐데요. 유명한 고전을 ‘단 3분’만에 읽은 거나 마찬가지로 요약해준다는 서비스도 있고, 살펴보면 수십시간이 걸릴만한 묵중한 양의 정보들을 엄마 펭귄처럼 조근조근 씹어서 드린다는 콘텐츠, 서비스들도 목하 번성 중입니다. 이런 서비스들은 ‘쓰레기같은(지루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는 척하기 좋은 진주들만 제공해준다고 선전합니다.

<fig.1> '아는 척하자'라는 것을 모토로 2021년 방영된 MBN 교양프로그램 <스라소니 아카데미>(왼쪽) "세상 편한 자세로 과자 먹으면서 보세요"라는 신나는 문구를 두른 <스낵 인문학>. 아쉽게도 스낵에 대한 인문학 책은 아니었습니다. 출처 MBN, 스테이블

하지만 예전부터 이런 선전들을 볼 때면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절호의 기회에 ‘아는 척’하는 쓸모를 위해 평소에 몇분이라도 ‘투자’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효용이 적습니다.

‘아는 척’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알고 싶은 마음은 여러 경로로 시작될 수 있으며(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뽐내고 싶다거나, 독서왕 상장을 받고 싶다거나) 어떤 길이든 제대로 아는 것의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단지 그 지식이 나의 삶을 바꾸지 못한 채, 그저 뽐내기에만 머물게 된다면 그것을 알기 위한 ‘3분’마저도 허무할 수 있겠죠.

‘훌륭한 고전’의 요약을 많이 외우고,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시사 상식’들을 많이 쌓으면 우리는 현명해질까요?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과 다오얼덩의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를 지팡이 삼아 ‘아는 척’에 대해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아는 척’ 교양 : “속물 교양”】

“그들은 화제에 오른 연극과 정부, 비싼 생활비, 상거래에서의 속임수에 대해 생각했다. 간혹 목걸이 이야기나 푸알데 소송 사건이 대화에 끼어들었고, 대혁명의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고가구에 탄복하여 그 시대를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사용되던 때에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아는 것이 조금도 없는 어떤 지역의 이름을 들으면 그 때문에 더욱 멋지게 상상하게 되었다. 제목이 난해한 작품들은 신비를 간직한 듯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아는 척’ 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미완의 유작인데요. 이 소설에서 둘은 거의 모든 분야(정치, 사회, 법학, 요리, 육아, 철학...)에 대해 제법 아는 척을 하며 으쓱거리며 다니지만, 다니는 곳마다 책에서 어설프게 읽어 소화하지도 못한 내용을 뽐내며 현실에 이상하게 적용하다가 번번이 해괴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이 소설은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스스로에게 체화되지 못한, 아는 척 교양”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되어왔습니다.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 책에서 묘사된 일제 식민지 초기 한국 지식인, 학생들의 모습도 어쩌면 이와 비슷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기의 지식인들은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해외의 ‘세계고전’을 ‘최첨단 교양’으로 마구잡이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fig.2> 소설가: "전에 보내드린 졸저 <춘몽>은 어떠하셨습니까?" 노주인: "네 고맙습니다. 매우 좋은 책이어서 서랍 속에 잘 넣어두고 있습니다."(왼쪽) <춘희> <장발장의 설움(레미제라블)> 등 1920년대 발간된 세계문학 번역본의 모습. 왼쪽 표지는 1892년 프랑스 기욤총서로 발행된 '춘향전'의 표지입니다. 푸른역사 제공

<속물 교양의 탄생>은 주로 일제 시기 우리나라의 속물 교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살펴본 책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속물 교양’이란 그저 ‘아는 척’하기 위한 깃털 장식같은 것에 불과한데요. 즉, 책들은 독자의 삶에 가닿지 못하고 단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장식해주는 역할만을 했죠. 당시 길거리엔 “양서는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현수막이 나부끼기도 했다고 하네요.

저자는 속물 교양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명작이 다만 고급스러운 취향을 과시하거나 엘리트임을 보증하는 학력 자본으로 쓰일 뿐이라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욕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분명하다. 문화적 취향을 전시하기 위해 차용된 명작[...]학력 자본은 교양이 아니라 속물 교양이다.

-박숙자, <속물 교양의 탄생>(이하 동일)

당시 지식인들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듯 해외 유명 작가들의 ‘말씀’을 그대로 끌어다가 자신의 수준 높은 교양을 전시하는 역할로 썼습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바이런의 대담, 휘트먼의 야성, 블레이크의 신비, 브라우닝의 철학”을 언급한 시인이나,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심각한 구성을 가지고 톨스토이와 같은 압축된 수법으로 투르게네프의 유창한 묘사”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소설가 등의 글을 읽고 있자니, 얼핏 모 배우가 외쳤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링크)’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들, 학생들 역시 발음조차 어려운 작가들의 ‘세계문학전집’에 눈을 빼앗겼죠. 주된 목적은 ‘아는 척’을 하고 성공을 위한 연료로 써먹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런 ‘속물 교양’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책이 원래의 맥락을 벗어나 그릇된 목적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레미제라블>을 읽은 식민지의 가난한 소년 송빈이의 감상을 소개하는데요. 송빈이는 책을 읽고 나서 “장발장에 대해 동정하고 공감하지만, 자베르 같은 경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법 질서를 옹호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어서 “핍박받는 장발장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후 ‘성공’을 다짐”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들은 인용하지만 번역해내지 못하며, 명작을 보고 있지만 자신들의 삶을 보고 있다.‘있음직한 현실’로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현실로서 인용한다.

이런 독해는 전쟁의 화마에 시달리는 나라 아이들의 슬픈 현실을 그려낸 소설을 읽고 “휴, 난 저기서 안 태어나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과 비슷하달 수도 있겠는데요. 만약 모두가 작품에서 자기가 읽고 싶은 내용만을 끌어낸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공감의 도구로서의 문학은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말겠죠.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책은 되레 위험합니다. 그 작품의 취지를 왜곡해 작품과 반대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위의 예시를 이어보자면 “능력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지. 우리나라도 어서 군사력을 키워야겠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톨스토이를 좋아해 그의 작품을 자주 연설에 인용해왔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전쟁과 평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

<fig.3>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 박물관(야스나야 폴라냐 소재)에서 방명록을 적고 있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 그는 톨스토이를 사랑해 평소 연설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4대손인 Vladimir Tolstoy는 2012년부터 푸틴 대통령의 문화 특보를 맡고 있습니다. 출처 로이터, 크레믈린

강양구는 ‘인문학은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 신영복의 광팬인 한 교양애호가 대기업 임원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임원은 한시, 고전을 줄줄 외웠지만 정작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화제에 오르자 “정리해고는 자본주의가 굴러가기 위한 윤활유”라고 성을 냈다고 하는데요. 강양구는 한탄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함께하며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신영복의 ‘관계론’은 이런 냉혹한 인식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라면서요.

<식민 교양의 역사>의 저자는 결국 해외 문학 등이 점차 우리 삶에 맞게 뿌리내리면서 ‘아는 척-속물 교양’에서 진정한 교양으로 모습을 바꾸어갔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한 시기로부터 약 한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장식 깃털에 그치는 인문학들이 여전히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1)조금 극단적인 예시일 수 있겠습니다만 히틀러는 생전에 독서광으로 유명했고 쇼펜하우어를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 꼽았으며(*레터 하단 참고문헌 참조), 푸틴은 톨스토이의 팬으로 그간 연설에서 다양한 톨스토이의 작품을 인용해왔습니다.(기사) 이 밖에도 <호밀밭의 파수꾼>을 사랑했던 존 레논 암살범 등의 사례를 떠올려본다면 어떤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3.고전, 그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

“산해경 읽지 마라” “장자 읽지 마라” “논어 읽지 마라” “손자병법 읽지 마라” “사기 읽지 마라” “수호지 읽지 마라”...

중국의 유명 작가 다오얼덩이 쓴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중국의 위대한 고전 수십권을 모아놓고, 거기에 일일이 ‘읽지 마라’는 조언을 달아놓는 책입니다.

그가 이런 역대급 어그로(?)를 끈 이유는 워낙 고전을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읽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 라는 거죠. 즉 이 책 제목의 강조점은 명백히 앞쪽에 가있습니다.

실제 이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소중히 다루어야할 예술품 그릇을 요강이나 자전거 헬멧으로 쓰고 있는 사람들에 분개하며 방방 뛰고 있는, 꽤나 꼬장꼬장한 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다오얼덩은 이 책에서 60여권의 고전을 다루면서 각각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요. 그 결은 각각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미 그 고전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굳이 읽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에 퍼져있기 때문이며, 어떤 경우는 이미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 제멋대로 왜곡되어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경우는 후자가 많습니다.)

<fig.4> 특유의 박식함과 유려한 문체로 골수 팬을 가지고 있는 중국 작가 다오얼덩(왼쪽),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의 중국어판(불필독서목)의 표지 출처: Chinawriter, 바이두백과

이런 작가의 태도가 분명 쓸데없는 ‘결벽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서 제가 특히 흥미롭게 보았던 대목들은 저자가 <맹자>와 <손자병법>을 읽지 말라고 이야기한 부분이었는데요. 　

먼저 그가 <맹자>를 읽지 말라고 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맹자 사상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자 사상의 핵심은 사회보다도 ‘개인의 덕성’에 집중한 것이었는데요.(“착한 사람들이 모여 좋은 사회가 된다”) 이는 맹자가 살던 당대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어떻게든 선한 개인을 통해 변혁을 이룩해내려던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맹자는 ‘실패한 사회를 위한 철학’이지만 현재 중국 사회는 “어서 21세기가 끝나고 31세기로 달려가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온통 번영의 기쁨에 들떠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를 인용하며 ‘인정仁政’ 운운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적을 것입니다.

그(맹자)는 유학 속에 매설된 다이너마이트였지만 애석하게도 천년을 깎이고 씻기면서 뇌관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된 채 고통스런 얼굴로 “스스로 치욕을 당하면서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근심에 젖어있다. 맹자가 인생을 말한 것이 전문가로서의 견해라면 민생을 말한 것은 문외한의 의견일 뿐이다. 지금 <맹자>를 읽으면서 민생만 말하는 건 보물상자만 사고 보물은 돌려주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다오얼덩,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이하 동일)

<손자병법>에서의 손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고 합니다. 손자는 단지 전쟁에 대해 말하는 병법가였을 뿐입니다. ‘전쟁터의 규칙’을 일상 생활에 적용해놓고 그를 잔인하다고 하는 건 본말이 전도된 일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어 <손자병법>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요. 오늘날엔 손자병법을 굳이 꺼내들지 않아도 누구나 병법가로서 그 ‘잔혹함’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더러 손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는 속임수도 꺼리지 않는다’고 강조한 손자의 말이 세상인심을 타락시켰다고 지적하곤 한다[...]이것은 불공평한 말이다. 왜냐하면 손무는 전술가일 뿐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말을 일상생활의 지침으로 받든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제지 손자와는 무관한 일이다[...]왜 <손자병법> 을 읽지 말아야 하는가?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이 병법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병법이 성행하는 사회에서 병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찌감치 유전자를 하느님께 반납하고 철저하게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주역> 독서에 대한 비판은 이 책의 전체 논지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주역은 ‘점치는 것에 대한 책’이기 이전에, 삼라만상의 지혜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옛것에서 제가 원하는 복만 바라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곤 합니다.

많은 후인들은 진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복잡한 일을 만나면 직접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머리도 쓰지 않으면서 한사코 옛사람을 향해 해결법을 구걸한다. 특히 배움이 얕고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단견으로 옛사람의 글을 견강부회하기 일쑤다. 혹은 옛사람의 글에서 지식은 구하지 않고 무식만 구하거나 지혜는 쌓지 않고 무지만 쌓으면서 바보가 자신의 꿈 이야기만 하는 지고무상한 경지에 오르기도 한다[...]세계에서 가장 우매한 일은 자신을 우매함 속에 가두는 것이다[...]이성의 목적은 미신이며 지식의 목적은 혼돈이다. 쌓지 않은 티끌이 태산보다 더 높고, 증명할 수 없는 무지가 증명할 수 있는 진실보다 더 우수하다[...]이른바 이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 속 습관적인 독서 태도다.

【4. 맺음말】

사실 부바르와 페퀴셰는 ‘악당’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아는 척하기 좋아하고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어리둥절한 사람들일 뿐이죠. 그들은 비록 책에서 읽은 ‘지식’을 체화하진 못하지만, 때로 어떤 절묘한 작품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높은 뜻’에도 불구하고 양아들, 딸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농가 사람들로부터 “저런 허풍쟁이들, 잘난 척 하지 마시오!”라는 얘기를 들은 이유는 그들의 지식이 삶과 전혀 맞닿지 못한 채 ‘아는 척’하는 장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그들의 ‘선의’와는 반대로 현실은 줄곧 비뚤게 흘러가고 말았죠.

인문학은 때로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가 될 수도,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나라는 주인공’의 성공 서사와 위로를 위한 무대가 아닐진대, 타인의 고통은 내 반면교사를 위한 연료나 위안거리가 아니고, 때로 어떤 책은 내게 반성을 요구하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항상 위로받아야 할 피해자이기만한 것은 아니고 때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때로 바뀌어야할 것은 세상이 아닌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저 책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이 건네는 닫힌 위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희진은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독서는 피클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이가 피클이 되면 더 이상 같은 오이가 아니듯, ‘읽고 난 뒤의 나’는 ‘읽기 전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오이를 피클로 만드는 것 같은, 나를 바꾸는 한권의 책을 위해 우리는 100권의 책 사이를 헤매는 것일지 모릅니다. 바꿔 말하면 100권의 책을 읽어봤자 그것이 나의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이겠죠.

이런저런 교양들을 ‘해찰’하겠다고 나선 저부터도 이런 ‘아는 척’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이 책을 읽어서 뿌듯한 느낌보다도, 내가 ‘하필 지금’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합니다. 어떤 책들을 지팡이 삼아 나의 삶과 상황에 덧대어 보는 일, 내가 틀렸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갈지 고민해보는 일이 어쩌면 그 책의 저자와 줄거리 요약을 줄줄 외는 것보다도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스피아가 ‘정보’를 ‘3분 요약’하는 것이 아닌 다른 세계로의 작은 문을 열어드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저 역시 그런 겸손하지만 호기심 많은 자세로 비효율적인 해찰을 계속해가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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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독자는 한곳에 갇혀 편안함을 느끼려고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샤를 단치, <걸작에 관하여>”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다오얼덩, 김영문 옮김, 『이렇게 읽을 거면 읽지 마라』, 알마, 2017.

-가끔 이런식으로 제목에선 대체로 내용을 예측할 수 없지만, 뱃속에 많은 황금을 숨겨놓고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중국 고전문학 전공자이자 꼬장꼬장하고 유머러스하며 박식한 사람이 촌철살인으로 중국의 유명 고전들을 휙휙 거침없이 짚어내는 수다를 들을 기회가 평생에 얼마나 있을까요? 뒤로 갈수록 유명 고전보다는 정말로 이름을 못들어본 책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고, 그 부분도 물론 꽤 흥미롭습니다만 이 책의 백미는 논어, 손자병법 등을 읽지 마라고 야단치는 앞부분이라고 할만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으로 중국 고전을 직접 읽을 생각이 있는 사람일 수록 더 읽을만한 책입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고 나서 To read 목록을 꽤나 갱신했습니다.

박숙자, 『속물 교양의 탄생』, 푸른 역사, 2012.

-이 책의 부제는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입니다. '세계명작문학' 시리즈 등을 중심으로 식민지 시기 어떻게 교양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오용되거나 견강부회식으로 사용되다가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사료들을 살펴보는 내용이지만, 오늘날에도 충분히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동욱 기획, 『싸우는 인문학-한국 인문학의 최전선』, 반비, 2012.

-이 책의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문학조차 자기계발의 도구가 된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어떤 것일까?” 이번 레터에서 메인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오늘 레터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신다면 일독해보시면 좋을만한 책입니다. 챕터2에 언급한 강양구씨의 글은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필진 구성(22명)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해서 재미난 해찰이 가능한 책입니다.

티머시 W. 라이백, 박우정 옮김, 『히틀러의 비밀 서재』, 글항아리, 2016.

-이 책의 부제는 '한 독서광의 기이한 자기계발'입니다. 히틀러는 생전에 1만6000여권을 읽었을 정도로 '독서광'으로 유명했는데요. 실제 생일 등 기념일에 측근으로부터 책을 선물받는 일이 많았다고 하죠. 라이백은 그중 히틀러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친 10권의 밑줄, 느낌표 등을 샅샅이 분석해 그의 독서에 대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책을 레터에서 메인으로 다루어보려고 했었는데, '아는 척' 교양에 대해서 말하면서 히틀러의 서재를 나란히 놓는 것은 아무래도 좀 과한 느낌이 들 수 있겠다 싶어 메인으로 다루진 않았습니다. 책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극히 '효율적'인, 아는 척 수준의 얕은, 자기 안에 갇힌, 편협한, 객관화되지 않는 독서의 한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귀스타프 플로베르, 김계선 옮김, 『부바르와 페퀴셰』, 지만지, 2012.

-미완의 작품입니다. 그간 이 책은 많은 비평가, 장서가들에 의해서 '그저 닥치는대로 책만 읽은 얼치기 교양인들의 비참하고 우스운 행태'를 비판할 때 많이 인용되었는데요. 하지만 저는 플로베르가 비단 부바르와 페퀴셰를 아는 척을 비난할 용도로만 쓰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플로베르 그 자신은 한때 ”우리는 상아탑 안에서 위안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재미가 없다는 건 알지만, 상아탑에 머무르는 사람은 결코 아둔한 바보나 돌팔이가 아닙니다(1866년 1월 23일 샹테피에게 보낸 편지)”라고 말할 정도의 책벌레였다고 하니까요.

또한 이 책에 등장하는 부바르와 페퀴셰의 특징은 그들이 '나면서부터 지식인'이 아니라 가난한 필경사 출신의 '교양을 동경하는 서민'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황새가 뱁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라 볼수도 있겠는데요. 만약 이들이 귀족들처럼 고급 문화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그저 조롱하고 끝난다면 헛헛한 독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인문학으로 스펙하라!”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2200자

🖍글 속 한 문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인문학, 주식시장을 이기다> <인문학으로 스펙하라> 등의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인문학은 소통과 치유 그리고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참고문헌에서도 소개한 <싸우는 인문학>의 서평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의 비결은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이라고 말하면서 인문학 열풍이 불었는데요. '애플인문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이런 문제(링크)에 대한 답변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일을 '쿨하게' 넘기는 것이 오늘날 '인문학'이 협소한 쓸모라도 얻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불편한 인문학’이 만드는 세상의 균열

독서시간: 약 13분 / 글자수: 약 4500자

🖍글 속 한 문장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불쾌가 유쾌로 넘어가는 그 지점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들은 패션계에서 친근하게 사용되던 마네킹이 다시 거북해지기 시작했다[...]때로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시켜 ‘혼종’의 형태로 만들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불쾌한 골짜기(언캐니밸리·uncanny valley)'에 대한 예술사를 살펴보고 있는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글입니다. 언캐니 밸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안전해보이지만 끔찍한' 사회의 본질을 직시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물질인문학' 칼럼 시리즈 전편(링크). 해당 연재는 <인공지능과 흙>(2021,민음사) 책으로 엮이기도 했습니다.

철학에서 배운 ‘싸움의 기술’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400자

🖍글 속 한 문장

“공부하면 할수록 느낀다. 철학만큼 현실적인 공부,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공부가 드물다는 것을. 철학을 만난 덕분에 내 삶이 정말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몇년째 난해한 철학서와 씨름해온 어느 여성과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가 나눈 대화입니다. 여성은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철학으로 해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종락 대표가 코로나 시대에 사람과 '인문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칼럼 연재 시리즈는 이쪽(링크)입니다.

동양고전은 왜 '처세술'로 읽히는가

독서시간: 약 11분 / 글자수: 약 3900자

🖍글 속 한 문장

““동양철학하면 점 볼 줄 알겠네요?” “동양철학은 결국 자기계발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처세를 말하는 게 아닌가요?”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이 질문을 받으면 얌전하던 사람도 흥분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가 동양고전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한 글입니다. 처세술로 보는 것은 하나의 '독법'에 불과하며 더 많은 독법들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레터에서 다룬 다오얼덩의 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문학에 던지는 12가지 질문' 시리즈 연재(링크)에서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는 인문학의 본질에 대한 고민들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레터(“헌책의 적정 가격은 얼마일까”)에 대해 보내주신 의견을 소개합니다. 오늘 레터를 읽고도 간단한 감상을 남겨주시면 다음 레터에 함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구글독스에 남겨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레터 하단 Notion 피드백 페이지를 통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광야 연구자님 : 최근 일본 여행 다녀온 사진을 정리하다가(여행은 3년 전에 갔다왔습니다) 진보초 거리에 갔을 때 찍은 헌책방 사진들을 다시 봤는데, 마침 레터 제목에 헌책이야기가 들어있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사실 일본어는 잘 못하기 때문에 그냥 이곳저곳 다니면서 분위기를 느낀 정도였는데, 비록 내용은 몰라도 그 노란 책이 빼곡한 헌책방의 분위기만큼은 정겹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어요. 전 사실 거의 책을 전자책으로 보는 편인데 꼭 헌책방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서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스피 says: 진보초 헌책방거리에 다녀오셨었나보네요! 저도 예전에 놀러갔었는데, 중년 신사분이 헌책방 거리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서 꼭 드라마 속 장면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가면 꼭 책방에 가서 모르는 언어라도 아무책이나(표지 색이 맘에 든다든지 등의 이유로) 사오는 편인데요. 가끔 책장에 꽂힌 그 책들을 볼 때면 기념품보다도 그때 그 책을 골랐던 당시의 추억이 물씬 끼쳐오는 것 같습니다.

👤전공F맞은대학생 연구자님 : 무생물인 물건 하나하나를 '생명체'처럼 보던 어린 시절의 저에게도 '헌 책'은 굉장한 신비였습니다. 어떤 건 위압감을 주는 할아버지 같고 어떤 건 신령한 도깨비같고 어떤 건 수행하는 수행자 같았습니다. 어떤 건 호통을 치긴 하는데 막상 별건 없어보이는 '꼰대'같은 책들도 보였고요. 특히 마법 세계의 보물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책들이나 시공을 뛰어넘은 먼 옛날의 책들은 겉모습만 봐도 멋졌습니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NFT처럼, 단순히 안에 있는 '정보' 이상의 무언가가 그것들에 담겨있었던것 같습니다.

☞김스피 says: 헌책이 독특한 의미가 있는 것은 역시 사람의 손길과 추억이 더해졌기 때문이겠죠. 최근 LP판이라든지 카세트테이프 등의 재유행 트렌드를 보면, 꼭 책 뿐만 아니더라도 '물성'이라는 것이 갖는 힘이 여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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