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숲으로 갑니다. 요즈막 숲은 온통 서걱서걱 소리. 모두 떠난 곳에 소리만 남아 살고 있는 듯이 말이에요. 땅을 빈틈없이 덮은 낙엽들은 길도 숨겨버렸더군요. 길이라 부르고 길이 아니라 부르는 것도 사람이 지어놓은 가름일 뿐임을 새삼 생각합니다.

올가을에 또 새삼스러운 게 있다면요. 단풍나무에 깃든 붉음, 그 붉음의 농도가 참으로 여러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저마다 다른 빛과 물을 품고 있어서일 텐데요. ‘다름’은 실은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믿어봅니다.

단풍나무를 보면 저는 번득 생각나는 시가 있어요. 특히 이것이 십일월의 시라고, 십일월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고까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니군요.

제가 서울에서 은밀하게 좋아하는 장소가 있어요. 왠지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지요. 거창함이 없고 심심하니 저에게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우선은 경희궁과 그 안쪽 끝까지 들어갔을 때 만나는 산책길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궁이 지척에 두 군데나 있으니 아무래도 경희궁은 눈에 덜 띄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곳은 여행객보다는 동네 주민들이 툭하면 들러 체조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한쪽에 앉아 신문도 읽는 공원 같은 궁입니다. 저는 그런 풍경을 그저 한갓되이 바라보다 옵니다.

다음은 경희궁에 이웃한 국립기상박물관인데요. 정말 귀띔하고 싶은 곳은 여기랍니다. 오르막길을 걷다가 잠시 멈추어 갈수록 트이는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하면 도착하는 곳.

마지막으로 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옛 서울기상관측소를 박물관으로 개조, 증축한 고풍스러운 건물과 소담한 앞마당이 한눈에 담깁니다.

박물관에서는 날씨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전시를 항상 볼 수 있지요. 저는 호미를 땅속에 넣어서 강수량을 재었던 이야기와 시월에 큰 눈이 내려 쌓였다는 기록이 흥미로웠어요. 먼 과거에는 시월도 겨울이었나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제가 이곳을 말하는 이유는 앞마당에 있는 ‘계절 관측 표준목’ 때문이에요. 우리가 방송에서 ‘오늘 서울에 첫 벚꽃이 피었습니다’ 혹은 ‘첫 단풍이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알까 궁금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선언하는 데에 기준이 되어주는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 벚나무에 꽃이 세 송이 이상 피게 되면 첫 벚꽃이 되고요. 이곳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첫 단풍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을 그렇게 정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싱거워 헛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절을 관측하는 것이 어떤 기계가 아니라 고목古木이라서 그게 참 허술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누군가는 마주치고 누군가는 놓치기 십상. 기상관측소에서 공식적으로 첫눈을 기록하더라도, 첫눈을 목격한 사람에게만 첫눈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고명재의 시에서는 첫눈이 사람의 ‘눈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풍 사이로도, 심지어 팔월에도, 어떤 눈에는 첫눈이 목격됩니다. 요량 없이 맨가슴으로 세상의 표준이니 기준이니 하는 선을 넘어버립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가 겨울까지 살 수 없더라도, 그이 겨드랑이에 첫눈을 뭉쳐 넣는 장난을 쳐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학교 체육 시간에 한 사람을 ‘기준’으로 세워두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기준을 가운데 두고 모여들거나 흩어졌잖아요. 그처럼 나를 기준으로 두어보는 것, 어떨까요?

나에게서 온갖 ‘처음’이 발생하도록, 나에게서 자유와 사랑이 쏟아지도록. 내가 계절 관측 표준목이고, 내가 사랑 관측 표준인인 양. 참 싱겁더라도, 허술하더라도, 일단은 호쾌하게.

첫눈이 내려 잠시 ‘가을이 중단’되기를 바라며,

한정원 드림

문학동네시인선 184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고명재 시인의 첫 시집. ‘사라짐/죽음’과 ‘몸/사람’ 그리고 ‘이야기/시’에 대한 이 지극한 마음이 시편들에 켜켜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습니다. 나는 안쪽에서 부푸는 사랑만 봐요/ 불쑥 떠오르는 얼굴에 전부를 걸어요 고명재 시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차가운 공기로 희미해진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이 시집을 펼쳐보면 어떨까요.
Q. 죽음과 사랑의 시가 많다고 느껴집니다. 어둡고 무겁기보다는 말갛고 깊은 느낌으로요. 작가님께서 보시기에 이 시집엔 무엇이 담겨 있나요?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기억하는 마음.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담는 마음.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끝의 마음. 죽은 사람들의 아름답고 빛나던 마음. 그들의 품위. 부드러운 몸짓. 보고 싶은 마음. 볼 수 없지만 용감하게 살고 싶은 마음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용감하게 애도를 하고 싶었어요. 감히 밝게, 환하게, 사랑을 쥐고 빛으로 가득한 장례를 치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쓰다보니 자꾸만 사랑시가 나왔고 말갛고 밝게 그린 죽음이 나왔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계속 보고 싶으니까요.

  • 계절의 끝자락을 이제야 막 붙잡기 시작한 11월 중순. 마음 복잡한 아침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시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던 어지러운 머리와 가슴을 토닥토닥 진정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 한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과 모든 계절을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아요. 누군가를 알고, 타인에게 나의 그 사람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짧은 순간의 감상이 아니라 매일매일 건너온 하루들을 모아 만든 한 편의 이야기가 필요하겠네요. 진득한 여름을 견뎌내고 예쁜 물이 든 단풍들처럼요.
  • 가을은 어찌 보면 화려하지만 그래서 쓸쓸한, 자칫하면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예민한 계절인 것 같아요. 오늘 아침도 무언가에 골이 난 채 툴툴거리며 메일을 봤는데 마침 <우시사>가 와 있네요. 제가 피고 지고, 어느 날은 우울했다가 금방 웃어버리는. 이 계절을 마음껏 겪어내고 있는 과정도 누군가 저렇게 따뜻하고 가까운 시선으로 봐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 가을이 쓸쓸하지만은 않네요.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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