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대침묵을 즐겨보세요

갑자기 사내 코로나 환자가 늘어서 지난주부터 재택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하루 했어요. 이번주에도 하루는 재택, 하루는 사무실에 나갈 생각입니다. 원래 재택근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늘 집과 사무실이 가까웠고 그래서 출근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는 게 이유 중 하나고요. 무엇보다 하루 종일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일’을 하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어쩌다 하루면 몰라도 매일 혼자 일을 한다는 건 좀 그래요. 프리랜서면 몰라도 이왕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있는데 사무실에 안 나가면 기껏 조직에서 일하는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기껏 이렇게 말했지만 그래서 사무실에 나간다고 엄청난 일을 하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그냥 라운지에서 다른 동료들하고 인사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일하다가 너무 심심하면(?) 사무실을 어슬렁대면서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하는 거죠. 또 이러면서 일 관련한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거니까, 재택보다는 사무실에 나가는 게 훨씬 효율이 높다고 믿습니다. 너무 핑계 같나요?

좋아해서 말 시키고 싶은 거야... 

그래도 한번씩은 집에서 일을 합니다. 어쩌다 하루쯤은 왠지 새로운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캠핑을 가거나 호캉스를 떠나는 느낌…이라기엔 어차피 일하는 거네요. 아무튼, 혼자 살다 보니 재택을 하는 날에는 대면으로 한 마디도 말을 안 합니다. 밖에 나가서 뭘 사먹는 것도 아니니까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조차 안 하고요. 혼자 일을 하고, 밥도 챙겨 먹고, 가끔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침대로 퇴근해서 조금 놀다가 잠들죠. 이런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와 오늘 사람을 한 명도 안 만났네. 한 마디도 안 했네. 너무 좋네…

재택 이후 약속 없는 주말까지 이어지면 묵언의 날은 더 길어집니다. 주말엔 화상회의도 없고 친구와도 가족과도 통화는 잘 하지 않고 시끄러운 게 싫어서 음악도 안 틀어 놓으니까 집안이 침묵 그 자체입니다. (너무 좋아) 며칠 뒤 밖에 나와서 버스를 타며 무심코 인사를 하면 잠깐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이거 며칠 만에 말하는 거지?

본가도 회사도 서울이지만 굳이 집을 나온 이유 중 하나도 이겁니다. 말하기 싫어서. 집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상대가 말을 걸 때 대답해야 하잖아요. 그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는 언제나 갑자기 툭 시작됩니다. 던져진 말을 받아내지 않을 권리가 저에게는 없고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갑자기 서브되는 공을 언제나 받아야 한다는 것, 그 무제한 서브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겠죠. 늘 못 견디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그때의 저는 그걸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약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냥 싸가지가 없었거나…

혼자 여행을 가면 좋은 이유도 똑같습니다. 말을 안 해도 되는 게 너무 좋아요.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묻더군요. “그럼 뭐가 너무 맛있거나 경치가 너무 좋으면 어떡해?” 바로 그럴 때 쓸데없이 말 할 필요 없이, 한 마디도 안 하고 혼자 속으로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게 혼자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인데 말이죠.


쭉 늘어놓고 보니 책임은 싫고 쾌락만 누리고 싶다는 이야기네요. 원치 않는 서브는 차단하지만 나는 회사 사람들한테 말 시키고 싶으니 출근하겠다는 소리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데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뻔뻔 레전드? 하지만 진심입니다. 가능한 한 혼자인 시간을 확보하고, 수도사처럼 대침묵을 즐기고, 밖에서는 많이 이야기하세요. 이걸 거꾸로 하면 사람이 병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아요. 현대사회의 현대인인 우리는 불필요한 소음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필요한 대화는 빼앗깁니다. 생각할 시간은 없고 말해야 하는 순간들만 계속 닥쳐오죠.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또) 다녀왔습니다. ‘사유의 방’이 생긴 뒤로는 다른 거 하나도 못 봐도 사유의 방은 꼭 들어가 보는데요. 왜 그 공간에 자꾸 가고 싶은지 생각해봤습니다. 잘 설계된 공간 자체가 주는 쾌감도 물론 크죠. 이 조각상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계산된 형태, 조도, 동선, 소리, … 만든 사람의 의도에 온몸을 맡기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쾌적함과 ‘하 이거지’ 싶은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다 조용히 반가사유상 주위를 크고 느리게 돌거든요.

또 하나는 두 반가사유상이 주는 차분함과 안도입니다. 언젠가 무한도전에 출연한 김혜자 배우가 아프리카에 가면 내가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사유의 방에 들어가면 그 비슷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비슷하지만 ‘인간은 다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구나’ 하는 체념에 가까워요. 누구나 두 반가사유상을 보면 그 섬세한 조각상에 자신의 고민을 투영할 겁니다. 주위를 크게 돌며, 360도 도는 동안 커졌다 작아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미륵보살을 보며, 그러다 문득 깨닫는 거죠. 다들 똑같겠구나. 인간은 언제나 이런 상을 만들고 천 년이 훌쩍 지날 때까지 같은 조각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사진 진짜 열심히 골라봤는데 소용 없네요. 꼭 가보세요 (이쯤 했으면 한번 가줄 법도 함)

침묵하다 보면 고민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고민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고민의 빈 자리를 바라봅니다. 어디 갔지? 실제로 타인과 아무런 교류 없이 한 마디도 입을 안 떼고 몇 날 며칠을 보내도 쓸데없는 생각이나 고민이 잘 안 듭니다. 나는 왜 가만히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들까.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기억났습니다. 저는 어릴 때-열다섯 살 정도까지-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어린이였다는 것이… 아기 때부터 어린이 때까지 찍힌 사진들을 보면 그저 해맑게 웃고 있는 건 몇 장 없고, 다 엄청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대체 덜 자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표정인가 싶어요. 그때는 실제로 매우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그 생각을 알려주지 않았겠죠.

그 시절에 평생 할 고민을 다 해버린 덕에(?)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입 꾹 다물고도 잘 삽니다. 그러다 심심하면 친구들한테 카톡도 보내고 사무실을 돌면서 사람들한테 쓸데없이 말을 시켜요. 아 적다 보니 진짜 직장 내 괴롭힘 같고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겁니다. 간헐적 단식처럼 우리에게는 간헐적 침묵이 필요하다는 거요. 우리는 서로 단절될 필요와 권리가 있고 그게 많은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내일은 폭염을 뚫고, 마스크를 꼭 끼고 사무실로 출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실컷 침묵을 채웠으니 내일은 또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일도 해야죠. 이왕이면 웃으며 만나요.


갑자기 구독하시는 분들이 늘어서 깜짝 놀랐어요. 따로 홍보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찾아 오셨는지 답장으로 알려주세요. 올해의 영업왕에게 푸짐한 상품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새로 만난 분들도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추천합니다😎]
  • 넷플릭스 <하트스토퍼: 시즌2>
하이틴 로맨스는 늘 뻔한 맛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거 아시죠? 아기들 설레는 연애에 내 잇몸이 대신 마르는 일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요? 시즌2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쏟아지는 뽀뽀도 로맨틱한 파리 여행도 아닌 영화관 데이트 씬이었습니다. 내 손이 다 어색하고 원래 손이 두 개 달려 있었나? 이런 위치에? 싶어지는 기분 40년 만이었다네요^_________^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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