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새로운 연재
VOL.107 사계절 시리즈: 봄
『끝내 이기는 말들』 정여울 연재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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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며 마주하는 글 가운데 생각보다 높은 빈도로 읽게 되는 것은 독자의 필사본입니다. 독자가 자신의 일상에서 본인의 필기구로 정성스레 담은 책 속 문장을 읽을 때면-제가 탐정은 아니지만-독자가 왜 이 문장을 선택했는가 가늠하곤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독자의 손이 움직인 까닭은 우선 그 문장에 담긴 힘에 있을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는 마음으로 문장을 옮겨 적었을 독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 일의 쓸모를 긍정하게 됩니다.
이번 연재에서 정여울 작가님은 아름다운 문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문장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가를 여러 인용을 통해 보여줍니다. 독자로서 필사하고 싶은 문장이 가득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힘든 시절. 다들 하나씩 품고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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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지 못하면 생각을 잘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 생각을 할 것입니다.
― 오스카 와일드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유리 거울을 사용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보기 위해 예술 작품을 사용합니다.
―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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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음악조차 때로는 듣기 싫을 때가 있다. 청각의 피로감 때문이다. 현대인은 24시간 내내 끊임없는 소리와 이미지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가끔은 온갖 미디어의 현란한 소리와 이미지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순간조차도 ‘사람의 목소리’는 듣고 싶어진다.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유튜브로 음악을 선곡해서 듣는 것조차 귀찮은 날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의 멋진 문장은 듣고 싶어진다. 꼭 유명 작가의 명언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말을 참으로 어여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K 선배는 한 모임에서 뜻밖의 후배를 만난 뒤 이렇게 말했다. “네가 보고 싶은지 몰랐는데, 너를 막상 보니까 그동안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는 걸 알았어.” K 선배는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되도록 조만간 만나자’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한다. “여울아, 우리 300시간 안에 꼭 만나자.” 이렇듯 아주 작은 일상 속의 몸짓도 소중히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주는 문장들은 다 아름답다. 예컨대 틱낫한 스님은 우리가 걸을 때도 되도록 최대한 아름답게 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마치 당신의 발로 지구에 키스하는 것처럼 걸어라.”
안보윤 작가는 2023년 이효석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자를 몇 개 조합하는 것만으로 와락 일어서는 세계란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름다운 말들은 다 그렇다. 글자를 몇 개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와락 일어서는 세계, 자음과 모음이 몇 번 어우러지는 것만으로도 세상 전체가 다시 조립되는 것 같은 기쁨이 바로 문장의 아름다움이다.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뼈아픈 진실을 실어 나른다. 그 사람의 출중함이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결점을 다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곤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가슴을 아프게 할퀸다. 명언 제조기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사랑에 대한 문장은 또 어떤가. “당신을 평범하게 대하는 사람을 절대 사랑하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마침내 만나기 위해 이토록 오랜 기다림을 감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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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뿐 아니라 단어만으로도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단어들은 그저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바로 문학평론가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 그렇다. 바르트는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이미지를 ‘스투디움’,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이미지를 ‘푼크툼’이라고 말했다. ‘난민’을 떠올리면 소말리아의 젓가락처럼 빼빼 마른 어린이들을 연상하고, ‘가족사진’이라고 하면 어쩐지 불편하고 어색한 포즈를 취하며 화목함을 가장하는 동네 사진관의 사진을 떠올리는 것이 바로 ‘스투디움’의 사례다. 이에 반해 뾰족한 물건으로 찌른 듯한 날카로운 상처를 뜻하는 ‘푼크툼’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전환점이 된다. 푼크툼은 세계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는 충격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를 더 이상 그 이미지를 알기 이전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 그것이 푼크툼의 진정한 역할이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세 살 꼬마가 해변에 쓰러진 채 죽어 있던 충격적인 시리아 난민 사진은 ‘난민’을 바라보는 전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탈출하던 중 지중해에서 배가 난파되었고, 아이는 터키 보드룸의 해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죽어가면서도 “아빠, 죽으면 안 돼. 꼭 살아야 해요”라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이 가여운 세 살배기 아이의 이름은 알란 쿠르디였다. 아이의 소원대로 아빠는 살았지만,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쿠르디의 사진은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많은 유럽 지도자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그동안 차별받고 박해받던 난민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너무나도 앙증맞은 남색 운동화를 신은 쿠르디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잠 못 이루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네티즌은 쿠르디의 사진에 새하얀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어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이미지들은 그 아픔으로 인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기도 한다.
스투디움은 상식의 원천이 되고, 푼크툼은 감동의 원천이 된다. 전형적인 이미지, 상투적인 이미지를 초월하여 우리의 가슴속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는 이미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스투디움이 이해와 분석의 대상이라면 푼크툼은 충격과 감동, 착시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잊을 수 없는 푼크툼의 이미지처럼 우리 가슴속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문장들이 주로 명언이나 명문장, 격언이나 선언의 형태로 오래오래 남게 된다. 이렇듯 우리 마음속에 아름다운 문장이나 단어를 새겨두는 것은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문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상징이 되었으며,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에나 간다”는 헬렌 걸리 브라운(Helen Gurley Brown)의 문장은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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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쓰는 사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는 사람.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 곁에 서려는 사람. 어두운 시대, 버릴 수 없는 희망의 잉크를 가득 머금은 글을 쉼 없이 쓴다. KBS라디오 ‘이다혜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살롱드뮤즈’,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학이 필요한 시간』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끝까지 쓰는 용기』 『공부할 권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헤세로 가는 길』 『빈센트 나의 빈센트』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마흔에 관하여』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월간 정여울』(전 12권) 『마음의 서재』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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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까지 잘 읽으셨나요? 언어에는 발효와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에-아는 척 좀 하면-"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언젠가 읽었던 모 평론가 님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시간을 주고 있나요. 내가 어떻게 시간을 쓰는가에 대해 써보는 것도 좋은 글감인 듯합니다.
지난 북뉴스 피드백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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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 🎱: 담당자
👀: 숨고 싶은데 알리고도 싶은 마음. 쪽지를 접어 벽 바깥으로 던지는 일 같습니다. '숨기 좋은 방'이라는 소제목을 읽었을 때 불현듯 어렸을 때 기억이 났어요. 저는 작가님처럼 글쓰기를 즐기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글을 쓰게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정여울 작가님, 응원합니다! 지칠 땐 쉬시길.
🎱: 안녕하세요, 독자님. 쪽지라니, 좋은 비유네요. 어린 시절 기억이 나셨다니 지난 연재글이 독자님께는 꽤 각별하게 다가왔을 듯합니다. 그때의 마음이 담긴 독자님의 글이 정말 보고 싶네요. 힘찬 응원 고맙습니다. 덕분에 연재 잘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작가님도 피드백 잘 보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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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 에세이 기획전 | 『어린이라는 세계』 접지엽서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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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여러분, 천천히 읽어주세요. 그리고 연재를 읽고 드신 생각이 있다면, 또 정여울 작가님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후기에 남겨주세요. 이전에 주신 기대의 말들은 잘 전했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 또 전하겠습니다. 짧게나마 남긴 말들도 상상 이상의 커다란 힘이 될 거예요. 책은 독자가 완성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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