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기다리는 아버지』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오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바로 그 이해의 틀 바깥에 있는 예수님의 말을 놓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던 것이죠.

 

그런 우리에게 틸리케는 성경을 ‘낯설게 읽자’라고 제안하는 듯합니다. 그는 너무도 익숙해서 잘 ‘이해’하고 있던 성경 텍스트를 돌려서 보고, 둘러보고, 뒤집어 보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예수님의 비유를 과거에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삶의 정황 속에 있는 우리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살려냅니다.

 

오늘은 틸리케의 설교집 《기다리는 아버지》에서 ‘겨자씨’에 관한 설교의 한 대목을 소개해드립니다. 익숙한 본문 속에 새로운 이해가 생기기를 바라면서 월요일의 복음 시작하겠습니다.

#28 이해는 오해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마태복음 13:31-33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의기소침하고, 일부는 잔뜩 기대에 차서 들떠 있습니다. 누가 적당한 호의를 품은 구경꾼의 자세로 이 나사렛 사람의 행동을 대하는지—이것은 비용이 들지 않는 일이어서, 상황이 위험해지면 누구나 적절한 때에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아니면 누가 자기의 전 존재를 나사렛 예수에게 걸었는지, 다시 말해 누가 그를 위해 직업도 버리고 모든 것을 이 단 한 장의 카드에 걸었는지가 결국엔 드러나겠지만, 그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마침내 결과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어떤 성과를 올릴 수 있을까?”

 

“글렀어!”라는 말과 함께 상당히 괴로운 당혹감이 대답으로 돌아옵니다.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몇몇 가난한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병자들을 돕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남모르는 사실이었지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다들 소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층과 정치적 지도층은 그분을 거부했고, 더 심하게는 그분을 무시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그분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대하고 있었지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의 중심지들은 갈릴리라는 찻잔 속에서 일어난 이 폭풍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훗날 근대의 거장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분에게 미세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도대체 어디서”라고 물으면 괴롭기만 합니다. 그분을 뒤쫓아 달리는 몇몇 불결한 사람들, 거지들, 사회의 가장자리 거주자들, 피상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 전 존재를 걸어야 한다니요!


세상은 그분에게 주의를 조금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혹시 이것이 훗날 “교회”라고 불리는 관리국을 포함한 기독교 사업 전체에 대한 반박이 아닐까요? 저는 목사로서 성경 낭독과 예배를 집례할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행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혼자 암송하면서, 당시의 권좌에 있던 히틀러와 그의 무서운 속임수가 이 능하신 손이 조종하는 철삿줄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 낭독과 예배 시간에 참석한 사람은 연세가 지긋한 여인 서너 명과 더 나이 든 오르가니트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 반주자는 매우 위엄 있는 사람이었지만, 손가락에 통풍을 앓고 있었기에 그 반주는 누구나 인지할 수 있을 만큼 곤혹스러웠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하시는 주님이, 이 정도까지만 데려다주셨습니다. 밖에서는 전혀 다른 주들에게 복종하는 젊은 무리가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은 저에게 그 이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정말 무슨 제공할 만한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분이 더는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 없으시다면, 그분은 숨이 막히는 이 옹색함으로 반박되신 게 아닐까요?

바로 이것이 이 비유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제자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제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똑같은 확신의 강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희의 말이 옳다.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아주 작게 시작한단다. 밖에서 보면 나의 일과 내가 가장 작은 것의 영향을 받는 걸로 보일 테지.” 그런 다음 그분은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리십니다. 그 사람은 두 손가락 끝을 씨앗 봉지 안에 넣어 겨자씨—맹세코 가장 작은 것!—한 알을 집어냅니다. 비할 데 없이 작은 씨앗을 잡는 것은 정말로 기예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 씨앗의 무게는 0.01그램쯤 됩니다.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은 안경을 착용해야만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 씨앗이 흙에 들어가면 큰 관목으로 자라납니다. 이 관목은 참새가 이 씨앗의 수백 배를 먹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채 그 가지들에 앉아서 흔들거릴 정도가 됩니다.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장차 기독교가 전 세계를 정복할 거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자라남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공동체가 점점 성장하여서, 마침내 기독교의 강력한 침투로 대륙들과 섬들을 정복하는 양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외적 확장은 신약의 생각과는 상당히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그분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힘, 곧 카리스마가 그분의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분이 공동체를 일종의 비타민과 같은 작용물질로 세인들에게 설명하는 그림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누룩”의 그림을 생각해 봅시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덩어리 전체를 부풀게 해서 그 양을 변화시키지요. “소금”을 언급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소금은 극히 적은 양으로도 한 접시 수프의 맛을 변화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세상의 “빛”으로 언급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자동차 전조등의 광원은 참 적고 작지요! 그렇지만, 광원에서 나오는 원뿔 모양의 빛은 참으로 거대하고 커다란 공간을 가득 채워서 야간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그 공간을 잘라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수량으로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의 작은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량으로만 본다면, 정말 절망적인 소수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지붕 어딘가에 앉아서 곡조를 흥얼거리는 고독한 새라고 불렀습니다. 소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사업장이나, 사무실이나, 교실에서 생의 결정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이 전혀 없을 때, 그 의미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 중에 신앙을 암시하거나 식탁 기도를 드릴 때면, 평소에 매우 상냥하고 이해심 많던 사람들이 다소 당황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때도 더러 있지요. 그럴 때면,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 단절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우호적인 관계와 동료 관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에서 우리를 다소 서먹서먹하게 하는 절연층에 둘러싸이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소수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적 계산의 관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십니다. “여기에 삼사 그램의 누룩이 있고, 저기에 오백 그램의 밀가루가 있다. 민주적인 화덕의 헌법에 따라서, 밀가루가 주도하여 누룩을 이기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정반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실제적인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향력은 누룩이 발휘하는 것이지, 밀가루가 발휘하는 게 아니다. 이 영향력은 소금이 발휘하는 것이지, 수프가 발휘하는 게 아니다. 이 영향력은 빛이 발휘하는 것이지, 수백 세제곱미터의 어둠이 발휘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경건의 활기와 대담함을 선물로 받아 세상이라는 수프 속으로, 세상이라는 어둠 안으로 과감히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딛고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과감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밝게 빛나고 성숙하게 하는 힘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놀라서 얼굴빛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주변을 발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은사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상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상한 그리스도인들, “일그러진” 사람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금통의 산물 들일 뿐이어서, 도무지 나갈 줄을 모르고, 그래서 화학적·심리적 분해 과정에 의해 스스로 부식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겉보기에는 “거물”처럼 보이고, 뛰어나게 잘 빻아진 곡식 가루처럼 보여도, 대단히 가련하고 무미건조한 밀가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이자 누룩인 우리가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수의 신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고, 예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이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참으로 득이 됩니다!—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겨자씨의 비유가 바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외적 증대에 강세가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우리 행성의 완전한 기독교화 같은 것을 읽어내려고 하는 대다수의 해석은 참으로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그러한 해석은 이미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격렬하게 반박되고 있습니다(종교 통계를 한 번이라도 살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조 조항들의 증가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역할 증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르익고, 그의 영향력이 무르익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이거나, 교회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겨자씨 혹은 누룩과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힘들을 활성화하여 현대 세계와 그 사회 질서와 그 문화와 기술에 스며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늙고 지친 유럽에 몇 알의 도덕적인 비타민을 주입하여, 원기를 북돋우라는 특명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정신의 확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합니다.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기독교 정신의 확장은 별도로,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로서만 발생할 뿐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싹트고 자라고 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자라나는 것입니다(고전 1:5; 엡 4:13, 15).


여러분과 저에게 겨자씨가 맡겨져 있습니다. 장차 이 씨앗에서 가지들이 자라나 땅 위에 펼쳐질 것이고,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운데 보금자리를 칠 것입니다. 이 가지들에 뜻을 두지 말고, 먼저 씨앗을 돌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뜻을 두고, 이 가장 작은 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받아들여, 보존하는 일에 뜻을 두십시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기독교 서구도, 세상을 위한 기독교의 사명도—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

스물여덟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기다리는 아버지』에서 발췌했습니다.


제목: 기다리는 아버지
지은이: 헬무트 틸리케 | 옮긴이: 김순현
판형: 137*214, 396쪽 | 가격: 24,000원

 

* 자세한 도서 소개

알라딘: https://url.kr/dc2jos

예스24: https://url.kr/ewpk1y

교보문고: https://url.kr/d2ftgo

갓피플: https://url.kr/7emuf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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