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요즘에도 '그가 자신의 캐릭터를 유지하는데 그때의 내 태도도 한 몫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땐 씁쓸하다. 그럼에도 많은 것들이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은 다행이며 희망적이다. 그것이 사건처럼 벌어진 일이어도 결국 내면을 살피는 작업은 필요하기에 말이다.
지금의 나는 10년전과 비교하여 한가지가 달라졌다. 촉수가 올라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나타나는지 안테나를 세워 감지한다. 일단 그들을 우아하게 피할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 내가 끌어당긴 것이든, 사건처럼 벌어진 일이든 일단은 튀고 난 다음에 살피기로 했다.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내 탓인가'라고 생각하기 쉽고, 계속 당하면서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유명 대학병원에서 한 간호사가 힘든 인간관계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아들이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숨진 여성이 자살예방 상담원으로 일하면서 했던 말을 보았을 때 더욱 굳혀졌다. 그녀는 말했다.
'아이들은 나를 다치게 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피할 생각을, 학교를 벗어나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고요.'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하려면 나부터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똥 같은 레지던트가 근무하는 동안, 내가 근무한 다음 해에 인턴으로 들어간 후배는 그과를 돌다 일을 그만두었다. 그의 괴롭힘 때문이었다는 말이 돌았다. 레지던트 1년 차 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참고 일하지 인턴생활을 1년 더 해야 되잖아.'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깟 1년, 그깟 몇 년,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그 후배가 더없이 멋지다. 그 후배와 달리 그때의 나는 그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려 들지 않았었나보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기분에 좀 더 솔직해져야 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구하려 이 문장을 반복해서 읊어본다.
좋은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다이브,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피하기. 이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아끼는 방법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내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일 수 있다. 내가 알아서 피해주지 못할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이 나를 적극적으로 피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에게 더없이 솔직해지는 방법으로 자신을 아꼈으면 좋겠다. 자신을 아끼며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듯 살다보면 주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만' 가득차려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모두 너의 성장에는 필요한 것일거야라는 말은, 재미없다. 좋은 사람들로만 가득 차길 바라면 좀 어때.
사진: Unsplash의Lidya Nada
사진: Unsplash의Zhivko Minko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