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호 2021/06/23

제9호 _ 적극적 육식주의자와의 동거
제2의 고향을 찾아 떠다는 여행 틈틈이 집에 들렀습니다. 
어미 캥거루가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반가움은 잠시 뿐, 전혀 다른 세계는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누가 그랬나요?😭
적극적 육식주의자와 함께 사는 채식지향인입니다.

저는 웬만한 육식주의자보다 더 맛있게 고기를 즐길 수 있는 나이롱 채식지향인입니다. 적당히 기름기가 배인 고소한 향과 입 안에 퍼지는 육즙을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고기 없이 못 사는 타입은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는 않습니다. 물론 식성도 습관이라 가끔 고기가 생각나기도 하지만(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면, 생각나기 전에 먹어버리기도...😂) 냉장고의 붉은 살덩이가 문득 사체로 느껴져 놀라는 횟수가 늘어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기를 먹지 않는 삶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은 건.(어쩌면 심각한 나이롱이라 그런 것일지도..😭) 오히려 힘든 건 사람과의 일이었습니다. 채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잘 못 지키지만...😆) 육식을 비난하는 건 아닌데, 제 선택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반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건 가족이었습니다. 

“고기를 안 먹으니까 그렇지.”
채식지향을 선언한 이후로 어디가 아파도, 피로감을 심하게 느껴도 모든 이유는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고.기.를.안.먹.어.서. 이 구실로 구박을 하지 않는 날엔 삼겹살, 차돌박이, 꽃등심, 치킨, 소곱창 등등 온갖 육류 음식을 읊어대며 실컷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누가 그랬냐고요? 저와 함께 사는 분, 어미 캥거루가 그 주인공입니다😆 혼자 먹으라고 받아치면 ‘네가 안 먹어서 나까지 못 먹는다’며 원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지 뭡니까. 채식지향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도 대쪽같은 그녀의 신념은 결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다! 네, 그녀는 아주 적극적인 육식주의자입니다. 
생일상을 둘러싼 투쟁
매일 매일 식단을 둘러싸고 투닥거리던 싸움은 제 생일을 앞두고 크게 터졌습니다. 웬만하면 외식보다는 집에서 요리해 먹는 걸 선호하는 지라 무엇을 해 먹을지에 대한(정확히는 엄마가 무엇을 만들어줄 지에 대해) 고민을 나누던 시점이었습니다. 

“생일이니까 쇠고기 사다가 미역국 끓이고 갈비찜도 할까?”
“나 채식한다고!!!!!!”

어미 캥거루에게 생일상이란 자고로 흰 쌀밥에 고깃국, 고기반찬으로 가득한 진수성찬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반론을 제기했죠. 쌀밥과 고기를 못 먹던 옛날이나 생일 기념으로 그런 밥상을 먹는 거지, 하루 세끼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이 시대에 뭐 그렇게 생일상을 차리냐고 타박을 했죠. 요즘엔 잡곡밥이나 비건요리가 더 특별하다고 쐐기를 박자, 어미 캥거루는 시무룩해졌습니다. 제 생일 핑계로 한껏 부풀었던 고기반찬의 꿈이 사라지게 되었으니까요. 그 모습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왔습니다. 마음이 약해져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둘걸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다잡았습니다😠 아니, 내 생일이잖아! 왜 내 생일에 내 마음대로 좀 하고 싶은데 가족들이랑 밥도 먹어줘야 하고 내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부모님의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 너무 피곤한 거 아니냐고요.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도 서러운데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든가, 진짜 플랙스하며 하루를 보내든가 그러고 싶거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생일에 고기반찬을 아니면 대체 뭘하냐며 투덜대는 어미 캥거루에게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나, 가지튀김 해 줘.” 
인터넷으로 가지 튀김 사진이며 레시피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도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나도 다 안다. 가지를 튀겨 봤자 가지지, 그게 뭐 별 거라고. 냉소적으로 구시렁댔지만 결국 제 생일상엔 가지튀김이 한가득 올라왔습니다😍 냉장고에 있던 표고버섯도 튀김옷을 입고 식탁 위에 올라왔죠. 저희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순식간에 두 가지 튀김을 클리어 했습니다. 바삭한 튀김 옷 사이로 스며 나오는 가지의 즙과 보드랍게 씹히는 맛은 도저히 젓가락을 놓을 수 없게 했거든요. 특히, 쫀득한 식감과 은은하게 입 안에 퍼지는 향이 일품인 표고버섯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원래 탕수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 자체로 맛이 너무 뛰어나 소스를 생략했다는 어미 셰프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가 가더라고요. 오랜만에 마음이 완벽히 포개진 저희는 와인까지 곁들여 가며 만찬을 즐겼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식탁 위에 가지튀김이 수시로 올라오기 시작한 건. 사실 저희 어미 캥거루는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하나에만 올인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 타켓은 가지튀김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모든 튀김을 좋아했고, 튀기거나 지지는 요리를 유난히 즐기는 편이었거든요. 그녀가 가지튀김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았습니다. 몇 천원 어치만 사도 푸짐해진다며, 바삭한 튀김옷 안으로 촉촉하게 퍼지는 달큰한 가지의 맛이 좋다며, 매운 고추를 넉넉히 넣어 만든 초간장과의 궁합이 일품이라며, 이후로 저희는 수시로 가지 튀김을 먹었습니다.
밥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생전 집에서 보지 못했던 메뉴가 등장했습니다. 새우튀김. 고기를 먹지 않으니 생선이라도 잘 챙겨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가지와 함께 새우를 튀긴 것이었습니다. 아우 못말려🙈 바삭한 튀김옷과 함께 탱글탱글한 새우 살이 씹혔습니다. 물론 순식간에 새우도, 가지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맛있었어요👍 그 후로도 관자, 홍합, 피조개 등 저희 집 밥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식재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원래 간간히 등장했던 생선들도 자주 올라왔죠. 육고기 대신 물고기라도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어미 캥거루의 신념 덕이었습니다. 음, 뭔가 제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만 같았죠.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생선과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라 어렵겠지만 조금씩 해산물도 줄여볼 생각이라고. 

“그럼 대체 뭘 먹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도 먹을 게 많다고. 수많은 메뉴들을 나열했죠. 대표적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가지튀김과 표고버섯 튀김도요. 하지만 고기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대체하긴 어려웠습니다. 결국 어미 캥거루는 선언을 했습니다. 다시는 뭘 해놓지 않겠다! 알아서 해먹어라!😡 저는 적극 찬성했습니다. 물론 엄마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지만, 엄마가 무얼 해놓으면 꼭 다 먹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거든요. 집에서 주로 밥을 먹는 게 저이기도 하고, 음식 쓰레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도 있고, 일단 맛있어서, 다 먹어버리게 되니까요😂 물론, 오늘도 저희집 냉장고는 먹거리가 풍족합니다. 강된장, 양배추찜, 채식만두 등 그 메뉴가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죠. 저는 오늘도 열심히 먹습니다😂 친구의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너 그거 알아? 코끼리도 채식주의자야.”
네, 알아요. 어쩌면 저는 캥거루가 아니라 코끼리일지도 몰라요. 아, 캥거루도 초식동물이네요. 크고 강력한 다리와 큰 발. 거대한 몸집. 제가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오늘이네요😂 

모두 맛있는 하루 보내세요😁

이.루.소.
(각색한 이웃 캥거루의 사연을 소개합니다.😁)

"누구 만나?"
아니, 누구라고 하면 다 아나? 어차피 모를 거 왜 자꾸 묻는 거야?

"어디야? 언제 들어와?"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그런 걸 일일이 보고 해야 되는 거냐고?!!

어릴 적 해가 질 때쯤이면 아빠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냐, 왜 안 들어오냐, 빨리 들어와라. 어른이 되면 그런 구속에서 해방될 거라 생각했건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오히려 싸움이 커질 뿐이었죠. 한창 신날 때 전화가 와서 지금 몇 신데 안 들어오냐,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 거냐. 나이가 좀 더 들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BUT!! 30대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대신 사생활이 담보로 잡혔습니다. 프라이버시 좀 지켜주면 안 될까요?😭 

jeongdam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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