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옷의 벨라》는 벨라가 샤갈의 아내가 된지 20년이 지난 30대 후반의 작품이다. 작품 명제를 《우수(憂愁)》라고 했듯이 침울함이 감돌고 있다. 샤갈이 벨라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서 실물을 알 수 있게 한다. 레이스가 달린 빌로드의 초록 의복, 매니큐어를 한 손톱, 오른 손가락의 반지 등은 통상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벨라의 표정은 섬세한 감성, 큰 눈동자에 감도는 우수가 깃든 애잔한 표정이다. 배경으로는 꽃다발과 천사가 그려져서, 마치 「성상화(聖像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애정이나 향수를 생애의 테마로 한 샤갈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예감을 알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초록 의복의 벨라는 유대인으로서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여성을 상징하고 있다. 샤갈도 또한 유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마을의 절반 이상이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자유가 인정을 받고 있던 러시아의 유대인거주 구인 현 백러시아 공화국 페테르부스크에서 태어나 자랐다.
샤갈의 아버지는 비웃(청어)상인의 가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점을 경영했다. 9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샤갈의 자전 『나의 회상』은 시와 같은 발상으로 썼고, 어머니가 남동생을 출산하는 정경이 기록되어 있다.
‘하얀 천으로 덮은 테이블. 라비(유대교의 성직자)들의 옷이 스치는 미묘한 소리. 한 사람의 노인이 침전을 중얼거리면서 날카로운 칼로 갓난아기의 배 아래의 작은 부분(포경수술)을 끊는다. 그는 입술로 피를 빨고, 갓난아기의 우는 소리나, 신음소리를 그의 콧수염으로 덮었다.’
유대인의‘할례(割禮, 종교상의 행사)」가 행해지는 방법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광경을 샤갈은 기록으로 남겼다.
샤갈의 가정은 빈곤한테 비해 9살 연하인 벨라는 보석상을 경영하는 로젠페르트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여름에는 어머니와 함께 휴가여행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09년 여름이 물러나고 있는 계절이었다. 샤갈은 회화에 집착하였고,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강한 지지에 의해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유대인이라고 체포되기도 하고 굶주림으로 고생을 했지만 그러한 괴로움을 딛고 미술학교에서 배우게 되었다. 때때로 고향에 갔다. 이때 나이는 22세였는데 여자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고 그의 집에서 벨라를 만났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우선 샤갈의 관심을 끌었다. 벨라는 이 날, 어머니와 외국여행 기념의 신조(新調)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날개 장식이 붙은 모자, 티롤(Tirol)풍의 캡(cap). 색은 그린으로 일치되고 있다. 그 후 샤갈의 마음은 치료사의 딸인 여자친구에게서 벗어나 벨라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다. 그녀의 눈도 나의 것이다. 마치 그녀는 나를 쭉 이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소년시절도, 현재의 나도, 나의 장래도 완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는데도, 그녀가 나의 가장 가까이 있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녀야말로 나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애잔한 안색, 그녀의 눈, 그 눈은 크고, 둥글고 검었다. 그야말로 나의 눈이다. 나의 혼이다.’
소녀 벨라가 본 샤갈은 엉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나 눈 위까지 닿고, 푸르고 아몬드와 같이 눈이 째진 것이 다른 사람들과 어딘지 다른 눈동자의 청년이었다.
침묵의 왕녀라고 불린 벨라는 샤갈을 만나기 전에도 화가를 동경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꿈꾸고 있었다, 꼭 언젠가 그림장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사람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 해 샤갈은 사실적인 《검은 장갑의 피앙세》를 그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할 때까지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약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샤갈은 빈곤한 유대인으로서 페테르부르크 체류에도 특별한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전례가 없는 화풍으로 인해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갔다. 여기에서 유대(Judaical) 동포인 유력자의 원조에 의해 자유로운 화풍을 확립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의인화된 동물, 원근법도 역학도, 입체감도 무시한 샤갈의 세계, 그 색채. 페테르부르크 사람과 자연이 시상(詩想)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그림으로 시를 그려 간다. 그리고 파리의 전람회에 잇달아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되고,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개인전도 열리게 되었다(1914년6월부터 7월)
벨라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면서 배우지망이었지만 무대는 버리고 샤갈과 결혼하는 벨라를 양친은 한영하지 않았다. 결혼한 두 사람은 이미 제1차대전이 시작되고 출국이 금지되어 파리로 가지 못했다. 샤갈은 병역의무를 모면하기 위해 수도 모스크바의 군무국에 근무하였으며 시인 에세닌(Sergei Yeseni)이나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닥터 지바고 작가)와 지인이 되어 그림도 그리고, 발표할 수 있는 혜택도 받았다. 그러나 근무는 힘들었고 귀가한 샤갈은 벨라에게 푸념을 들었다. 벨라는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