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II " 박명인
발행일자: 2022-10-21
Vol. no 21 

명화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II

"영원한 사랑 벨라"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여성 편력이 많은 화가들이 있다. 모델과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모델이 되기도 한다.


샤갈은 구 소련의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유대인 부부의 아홉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경 속 인물 모세를 러시아식 발음의 모이셰 세갈이었는데 이후 ‘큰 걸음’이라는 뜻의 샤갈로 개명했다. 이때 샤갈이 ‘러시아제국도 소련도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신비에 싸인 낯선 사람일 뿐이다. 아마도 유럽이 나와 나의 조국 러시아를 사랑해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자신의 이중 국적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고국을 떠나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낸 샤갈은 1910년 슈르레알리즘이나 큐비즘을 접하게 되지만 예술은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 실제 사물을 표현하는 데는 거리를 두었다.


벨라와 함께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하여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1년 제2차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갔으나 1944년 벨라가 갑작스런 감염으로 죽게 되어 몇 달 동안 작품할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붓을 들었을 때 샤갈은 아내를 회고하는 작품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1947년 프랑스로 돌아와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명작을 계속 그렸다. 1952년 딸 이다의 소개로 유대인 여성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65세에 재혼을 하고 그리스 여행을 다니면서 다시 활력을 찾아 30년의 활동을 이어 가게 된다.

초록색 옷을 입은 벨라(Bella  in Green), 1934-1935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녹색 옷의 벨라》는 벨라가 샤갈의 아내가 된지 20년이 지난 30대 후반의 작품이다. 작품 명제를 《우수(憂愁)》라고 했듯이 침울함이 감돌고 있다. 샤갈이 벨라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서 실물을 알 수 있게 한다. 레이스가 달린 빌로드의 초록 의복, 매니큐어를 한 손톱, 오른 손가락의 반지 등은 통상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벨라의 표정은 섬세한 감성, 큰 눈동자에 감도는 우수가 깃든 애잔한 표정이다. 배경으로는 꽃다발과 천사가 그려져서, 마치 「성상화(聖像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애정이나 향수를 생애의 테마로 한 샤갈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예감을 알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초록 의복의 벨라는 유대인으로서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여성을 상징하고 있다. 샤갈도 또한 유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마을의 절반 이상이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자유가 인정을 받고 있던 러시아의 유대인거주 구인 현 백러시아 공화국 페테르부스크에서 태어나 자랐다.

샤갈의 아버지는 비웃(청어)상인의 가게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점을 경영했다. 9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샤갈의 자전 『나의 회상』은 시와 같은 발상으로 썼고, 어머니가 남동생을 출산하는 정경이 기록되어 있다.

‘하얀 천으로 덮은 테이블. 라비(유대교의 성직자)들의 옷이 스치는 미묘한 소리. 한 사람의 노인이 침전을 중얼거리면서 날카로운 칼로 갓난아기의 배 아래의 작은 부분(포경수술)을 끊는다. 그는 입술로 피를 빨고, 갓난아기의 우는 소리나, 신음소리를 그의 콧수염으로 덮었다.’

유대인의‘할례(割禮, 종교상의 행사)」가 행해지는 방법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광경을 샤갈은 기록으로 남겼다.


샤갈의 가정은 빈곤한테 비해 9살 연하인 벨라는 보석상을 경영하는 로젠페르트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여름에는 어머니와 함께 휴가여행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09년 여름이 물러나고 있는 계절이었다. 샤갈은 회화에 집착하였고,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강한 지지에 의해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유대인이라고 체포되기도 하고 굶주림으로 고생을 했지만 그러한 괴로움을 딛고 미술학교에서 배우게 되었다. 때때로 고향에 갔다. 이때 나이는 22세였는데 여자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고 그의 집에서 벨라를 만났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우선 샤갈의 관심을 끌었다. 벨라는 이 날, 어머니와 외국여행 기념의 신조(新調) 의상을 입고 있었다. 날개 장식이 붙은 모자, 티롤(Tirol)풍의 캡(cap). 색은 그린으로 일치되고 있다. 그 후 샤갈의 마음은 치료사의 딸인 여자친구에게서 벗어나 벨라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이다. 그녀의 눈도 나의 것이다. 마치 그녀는 나를 쭉 이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소년시절도, 현재의 나도, 나의 장래도 완전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는데도, 그녀가 나의 가장 가까이 있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녀야말로 나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애잔한 안색, 그녀의 눈, 그 눈은 크고, 둥글고 검었다. 그야말로 나의 눈이다. 나의 혼이다.’


소녀 벨라가 본 샤갈은 엉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나 눈 위까지 닿고, 푸르고 아몬드와 같이 눈이 째진 것이 다른 사람들과 어딘지 다른 눈동자의 청년이었다.

침묵의 왕녀라고 불린 벨라는 샤갈을 만나기 전에도 화가를 동경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꿈꾸고 있었다, 꼭 언젠가 그림장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사람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하고 있었다.


이 해 샤갈은 사실적인 《검은 장갑의 피앙세》를 그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할 때까지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약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샤갈은 빈곤한 유대인으로서 페테르부르크 체류에도 특별한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전례가 없는 화풍으로 인해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갔다. 여기에서 유대(Judaical) 동포인 유력자의 원조에 의해 자유로운 화풍을 확립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의인화된 동물, 원근법도 역학도, 입체감도 무시한 샤갈의 세계, 그 색채. 페테르부르크 사람과 자연이 시상(詩想)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그림으로 시를 그려 간다. 그리고 파리의 전람회에 잇달아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되고,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개인전도 열리게 되었다(1914년6월부터 7월)


벨라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면서 배우지망이었지만 무대는 버리고 샤갈과 결혼하는 벨라를 양친은 한영하지 않았다. 결혼한 두 사람은 이미 제1차대전이 시작되고 출국이 금지되어 파리로 가지 못했다. 샤갈은 병역의무를 모면하기 위해 수도 모스크바의 군무국에 근무하였으며 시인 에세닌(Sergei Yeseni)이나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닥터 지바고 작가)와 지인이 되어 그림도 그리고, 발표할 수 있는 혜택도 받았다. 그러나 근무는 힘들었고 귀가한 샤갈은 벨라에게 푸념을 들었다. 벨라는 한숨을 쉬었다.

샤갈이 "초록색 옷을 입은 벨라"를 그리는 실물 사진
<Artist Marc Chagall painting the portrait of Bella ('Bella in Green')>

어쩔 수 없는 큰 힘이 사람의 운명을 끌어들이는 시대.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문화성 설립이 결정되었다. 시인 마야코프스키(Mayakovskii), 무대의 메이예르홀트(Meyerkhold),그리고 미술의 샤갈 3명이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샤갈은 벨라의 의견을 따라 사퇴하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이후 마야코프스키는 자살하고, 메이예르홀트는 반혁명의 낙인이 찍혀 처형되었다. 벨라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 되었다. 샤갈은 결혼생활을 통해서 벨라가 항상 옳았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 다음해에 딸 이다를 낳은 벨라는 남편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확실하게 의견을 말했다. 9세 연하인 벨라는 남편을 어머니와 같이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포옹력이 있었다. 벨라는 파리에서 남편이 러시아어로 쓴 『우리 생애』의 프랑스어 번역을 시작했다. 1931년에는 텔아비브 시장의 초대로 남편과 딸과 함께 팔레스타인(Palestina)에 체류했고, 이 해, 『우리 생애』가 출판되었다.


1933년, 정권을 거머쥔 히틀러의 나치스는 만하임(Mannheim) 미술관의 샤갈 작품을 태워서 버린다. 《초록의복의 벨라》가 그려진 1934년부터 5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대지가 발 밑에서 소리없이 무너져 가는 기분 나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 그림을 제작 중의 사진이 있다. 사진의 벨라의 큰 눈동자는 먼 시공을 보고 있다. 벨라의 초상은 많이 그려졌지만, 이 한 장은 두 사람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이미 큰 격변,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과 조우했다. 지금 다가오는 것은 내일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을 예고한다. 특히 유대인에 있어서 작품·명성·재산·생명, 하나도 안전한 것은 없다. 1939년에는 독일의 전 미술관에서 샤갈의 작품철거 명령이 떨어졌고, 이 해 샤갈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리고 전쟁을 피해 샤갈 일가는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에서 유대인 천대는 없었지만 인종차별이 심해서 ‘백인 크리스트 교도 이외 거절’이라고 씌어진 표식을 보고 벨라는 이 나라도 낙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음 2, 3주일전, 벨라는 피서지에서 쓰다 만 원고, 메모를 정리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이 정리하는 거지?”

샤갈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당신이 전부 알게 하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벨라의 안색은 창백했다.


1944년, 피서지로부터 뉴욕에 되돌아오기 전날, 벨라는 급병으로 쓰러졌다. 전염성 병으로 체온이 40도가 넘었고, 항생제로 기적적인 완치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귀중한 약은 최전선용이었다. 벨라가 사랑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기원하고 있었던 파리의 해방은 8월 25일이고, 벨라는 끝내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9월 2일 오후 6시, 입원 36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최후의 말은 「나의 노트를……」이었다라고 샤갈은 회고록에 쓰고 있다. 벨라의 노트는 샤갈의 삽화로 꾸며져 전후에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후서에 아내의 영원한 사랑을 말하며 날짜를 1947년이라고 썼다.

   😘후원사
Follow us!
한달에 2번 여러분에게 찾아가는 예술, 미학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
온라인 AI 미술 플랫폼 아티파이(Artify)
서울시 구로구 구로디지털로 33길 11, 에이스테크노타워 8차  1002,  070-4776-7157
Copyright ⓒ 2022, All rights reserved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