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장의 여는 인사말 ]

안녕하세요. 편집장 장재열입니다. 내일부터 연휴네요. 이번 연휴에 다들 어디로 가시나요? 저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정말 계획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이게 저한테는 42년 만에 처음 있는 낯선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빈 시간이 생기면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가족 친척 댁에 가서 K 장남 노릇을 하든, 아니면 작가로서 원고 마감을 하든, 강연이 몰리는 9월, 10월에 놓쳐버릴 수도 있는 사무 업무를 미리 몰아서 하든, 심지어 그게 아니라면 새로 출시된 닌텐도 게임을 클리어하든. 뭐라도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에 타임테이블이 미리 배치되어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좀 즐겁게 쉬면서 보내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쉬는 플랜까지도 짜고 있었던 편인 거죠.


그러다 얼마 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쉬는 건 계획을 안 세워도 되지 않나? 뭔가 채워져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이 마음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 그 기저를 정확하게 찾아내지는 못했어요. 대신에 이번 연휴는 실험을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타임테이블이 텅 비어 있는 채로 엿새를 지내볼게요. 물론 이틀쯤 지나면 못 참고 무언가 빼곡히 계획을 세울지도 몰라요. 뭐, 그 또한 저에 대해서 하나 알게 되는 거니까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일단 살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연휴는 어떤 모양인가요? 꽉 차 있어도 좋고 텅 비어 있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 패턴을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인지, 아니면 관성에 의해서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만 한번 들여다보시면 어떨까요? 자, 연휴를 여는 이 시간, 따스한 글 한 줄로 시작해 볼까요?

👀 한 눈에 보는 오늘의 마음건강
① 리추얼 | 말 없이 건네는 다정한 언어 <공간 사진 101>
② 인터뷰 | 마포구의회 의원 및 『가족 없는 시대』 저자, 차해영
③ 이달의 마음건강 강연 및 교육 정보
④ 마음건강 앱의 첫 시작, 베타테스터로 함께해 주세요!
말 없이 건네는 다정한 언어💪🏻
공간 사진 101
editor 월간 마음건강 편집부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문장을 타인에게 건네고, 또 받아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침묵이 어색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채워 넣거나,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 끊임없이 검열하는 대화는 유난히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죠. 언어의 쉼 없는 교환 속에서 문득 지쳐버린 날이라면, 입을 열지 않고도 나눌 수 있는 전혀 다른 방식의 대화에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때로는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고스란히 받아주는 장소와의 고요한 침묵이, 그 어떤 언어보다 깊고 안온한 위로를 건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추천해 드리고 싶은 리추얼 테라피는 일상 반경 2km 이내에서 편안함을 건네는 장소들을 찾아 나만의 공간 지도를 완성해 보는 ‘공간 사진 101’입니다.


우선 스마트폰을 들고 익숙한 동네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 봅니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담장 모퉁이,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찻집, 바람 소리가 정겨운 공원 벤치처럼 내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숨통을 트여주는 장소를 발견할 때마다 조용히 셔터를 눌러보는 겁니다.


그렇게 사진을 50장 정도 채운 뒤, 조용히 앉아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가장 깊은 안도감을 선사하는 최종 10개의 장소를 엄선해 보세요. 이 과정은 단순히 사진을 모으는 행위를 넘어, 타인의 비위를 맞추느라 밀려나 있던 ‘나 자신과의 정직한 대화’가 되어 줍니다. 사진을 골라내는 동안 우리는 깨닫게 되거든요. “아, 나는 탁 트인 길보다는 사람의 온기가 살짝 닿은 고즈넉한 모퉁이에서 편안하게 숨을 쉬는구나.” 말없이 찍어 내린 풍경들은 나조차 잊고 있던 내 마음이 갈구하던 편안함의 형태이자 숨은 목소리가 되어 줍니다.


엄선된 10곳의 공간 지도가 완성되었다면, 삶의 소음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날 그중 한 곳으로 가만히 걸어가 보세요. 익숙한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말하려 애쓰지 않은 채 공간과 호흡을 맞춰보는 겁니다. 나만의 안식처 10곳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세상이라는 거친 대화판 속에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쉼터를 마련하는 일이 되어 줄 것입니다.

🎤 멀리 있어도 서로의 보호자일 수 있다면
interviewee. 차해영 (마포구의회 의원, 『가족 없는 시대』 저자)
interviewer. 장재열 (상담가, 작가)

Q.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간단한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마포구의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는 차해영입니다. 마포에서 청년, 성평등, 1인 가구, 돌봄 의제를 다뤄왔고, 최근에는 아버지를 돌보고 장례를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 없는 시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말해온 의제들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시작된 제 삶에 대해서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Q. 어린 시절이 참 녹록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땐 방 세 개에 피아노까지 있던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그런데 열 살 무렵 부모님이 헤어지시면서 삶이 급변했죠. 하루아침에 아빠 공장 사무실로 가 테이블과 소파를 붙여 잠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IMF까지 겹치면서 부모님이 제 앞에서 저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로하는 모습을 조용히 다 들어야 했어요. 짐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 방법을 몰랐죠. 이후 낯선 집들을 전전하다 아빠와 살게 되었지만, 새엄마가 수시로 바뀌었고요. 그때부터 제 인생에서 가족은 자꾸만 주인공이 바뀌는 연극 무대 같은 것이 됐어요. 주연급 배우들은 수시로 교체됐고, 저는 매번 출연하지만 새로 영입되는 배우에 따라 캐릭터를 다시 부여받아야 하는 조연에 가까웠고요. 

Q. 그 가족이라는 무대를 떠나게 된 시점은 언제였나요?
스무 살 무렵이에요. 아빠가 일 년 넘게 집을 비운 사이 함께 살던 분이 제 짐을 다 빼버렸어요. 비밀번호도 바뀌어 있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열어주지 않더라고요. 그전까지는 늘 제가 누군가를 떠나는 쪽이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버려졌다'라는 감정을 느꼈죠. 그즈음 엄마도 재혼을 하셨고요. 부모와 연을 끊으려 자취방 문을 걸어 잠갔지만, 결국 완전히 잘라낼 수는 없는 관계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날들을 지나왔어요. 그렇게 가족을 끊어내는 대신, 볼륨을 조절하듯 거리를 좁혔다가 벌리는 방식을 택했죠. 제가 저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였달까요.

Q. 그런데 독립 후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셨다고요.
대학에서 대안 미디어 수업을 들으며 공동체 라디오 '마포FM'을 알게 되었고, 레즈비언 방송 제작진으로 참여하며 교수님께 처음 커밍아웃을 했어요. 교수님께 지지한다는 따뜻한 답장을 받으며 부모가 아닌 어른에게 제 진심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처음 했죠. 그렇게 마포라는 지역에 뿌리내렸고, 장애인, 청소년, 문화예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걸 보고 혈연이 아니어도 사람은 서로를 돌보고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Q. 그 경험이 ‘우야식당’으로 이어진 건가요?
네. 1인 가구로서 제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가, 사람들을 초대해 밥을 차려주는 프로젝트 ‘우야식당’을 시작했어요. 나만을 위해 끓여준 미역국이 먹고 싶어 찾아오신 분, 가족과 냉장고만 공유한다는 분들을 만나며 깨달았어요.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지만, 식구는 말 그대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걸요. 그러니 가족이 없더라도 식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죠.

Q. 이후 서울시 청년정책네트워크 운영위원장으로도 활동하셨죠.
성소수자 당사자들과 함께 들어가 성소수자 분과를 신설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정통으로 부딪혔죠. 저는 어떤 작은 공동체 안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만 활동을 해왔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요만큼만 말해도 다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왔던 거예요. 그런데 그 공론장은 마치 잔칫상 같은 곳이었어요. 다들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정도로 공감은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내 일처럼 공감해 주진 않는 거예요. 처음에는 한참 울기도 했어요. 왜 이렇게 말하는데 이 문제의 심각성이라든가, 이 문제의 변화에 대해서 모두 공감하지 못하지? 하면서요. 하지만 이내 깨달았어요. 내 문제는 나한테나 1순위지, 다른 사람한테도 1순위일 수는 없구나. 그게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가 다른 거였구나.
Q. 당선 후 성정체성을 알게 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었어요. 이해받고 싶지도, 이해하실 거란 기대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마포구의원에 당선되고 인터뷰가 나가면서 결국 알게 되셨죠. "무인도에 가서 살지, 왜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냐"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지만, "무인도에서 살지 않으려고 정치를 시작했다"고 맞섰어요. 그러다 마흔이 다 되어 예고 없이 아빠의 돌봄이 닥쳤어요. 인지기능이 저하된 상태였고, 함께 살거나 사업을 같이 꾸리던 분들은 아빠의 병세와 경영난 앞에서 모두 사라졌죠. 법적인 보호자라는 이유로 결국 저 혼자 남겨졌어요. 함께 산 세월도, 저의 사정도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남지 않으니까요.

Q. 돌봄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어린 시절의 상처가 고스란히 끌려 나오는 거였어요. 아빠가 소리를 지르면 마흔이 다 된 제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돌아가 쭈그리고 눈치를 봤거든요. 게다가 제도의 벽도 높았어요. 보호자에게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병원 동행 서비스가 거부된다든지... 정신과 보호 입원을 위해서는 직계가족 모두가 사망했다는 걸 서류로 입증해야 해, 증조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죠.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 국가는 너무 많은, 그리고 너무 이상한 증명을 요구하더라고요.

Q.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 그 과정을 책 『가족 없는 시대』로 펴내셨습니다.
제 개인사의 불행을 증명하거나 신세타령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세세하게 썼고요. 왜 나만 이렇게 어렵지'라는 탄식이 아니라, 왜 우리 사회의 구조는 사람들을 돕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을 막아 세우는 방식인 걸까, 그런 관점으로 접근해 보고 싶었어요. 그 질문의 끝에는 늘 제도랑 관행이 있었고요. 제 이야기의 도착지는 결국 '나'가 아니라 '우리'였어요.

Q. 그럼 차해영이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제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은 밀도가 아주 높은 상태가 아니에요.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감정을 온전히 다 쏟아내고, 그걸 가족이니까 감당해야지 하는 방식. 저는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적당히 거리를 느낄 수 있고, 서로 그 거리를 조정해 나가면서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가 좋아요. 또 같이 살고 싶진 않고, 각자 독립된 공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다만 재난 같은 게 닥쳤을 때 저한테 연락이 왔으면 좋겠는 거죠. 재열이 위험에 빠졌을 때 "얘를 좀 구해주세요"라고, 재난 상황에 재열이 사라졌을 때, “얘를 좀 찾아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 제가 갖고 싶은 게 딱 그거예요.

Q. 마지막으로 혼자라고 느끼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가장 마음이 쓰여요. 곁에 분명 소중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 관계를 설명할 말이 없고, 보호해 줄 제도도 없어 불안한 사람들에게도요. 그분들께 당신의 삶과 관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언어와 제도가 아직 충분히 넓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혼자 사는 것과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는 것은 다른 일이잖아요. 꼭 한 집에 살지 않아도, 매일 연락하지 않아도, 멀리 있어도 서로의 위기에 달려가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관계들이 사적인 약속으로만 남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존중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저도 제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제도를 만들어가겠습니다.
editor 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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