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특별 편성! 이번 호 주제는 '가을'입니다. 이번 가을 특별호에서는 가을에 생각나는 시집 3권, 가을에 찾아듣는 첼로와 피아노 앨범 2매, 성우가 읽어주는 명화 한 점, 그리고 음악과 책을 잇는 책방 소개까지 알차게 준비해보았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계절이 가을 왕십리에서 막히고, '나'의 기억도 현재도 미래도 "왕십리의 왕십리"에 갇힙니다. 거기서는 씁쓸했던 그녀의 결혼식도, 나를 알아보는 타조알을 닮은 여자도, 나 자신의 원망도 분명하게 구분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왕십리거리를 가득 채운 왕십리가 내 안에서 커다랗게 부풀어 나를 이루던 중요한 것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올 댓 재즈처럼 끝없이 변주되는 프레이즈로 처음의 사연은, 그 당시의 내 모습은, 빗물에 비친 풍경처럼 흐릿하게 번져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식에 초대했지만 참석하지 않았던 정황인 걸까요, 아니면 왕십리의 역사적 정황을 의인화시켜 어떤 비의를 담아낸 걸까요, 둘 다일까요? 음, 제가 너무 멀리 간 걸까요... 하지만 "왕십리는 왕십리", 쓸쓸했지만 쓸쓸하지 않은, 그저 비를 맞으며 마냥 꿋꿋하게 걷던 "가을 왕십리"였던 것만큼은 확실해보이네요.

난해하게 보일 수 있는 박상순 시인의 시들은 낭독할 때 더 쉽고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리듬과 함께 율동하는 이미지를 해석보다 앞서 '감각'할 수 있죠. 그러면 특정 해석이나 정서를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감상을 시도하며 시를 풍부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 있었다. 사막에도 비가 올까. 사막에도 비는 오겠지

솜털처럼 돋아날까. 내 손가락도 자라서 목화가 될까

흰 꽃들이 부를까. 목화솜이 부를까

하얀 달이 부를까. 다시 부를까

목화밭이 있었다─목화밭만 있었다

목화밭이 있었다─소년들만 있었다

거기 있었다─목화밭을 지나서 소년은 가고

내가 끌고 간 것들, 내가 들고 간 것들

내가 두 손에 꼬옥 움켜쥐고 간 것들

거기 있었다. 목화밭이 부를까. 목화솜이 부를까

네 손가락을 묻고 돌아선 백색의 소년은 가고

너는 아직도 남아 있구나. 목화밭에 있구나

-시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중에서

양성원 첼리스트와 엔리코 파체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10여 년 만에 녹음했습니다. 듀오 리사이틀로 꾸린 이 소나타 앨범은 베토벤의 음악관과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 오케스트라 반주 악기던 첼로를 피아노와 대등한 위치로 20분 넘게 무대 중심에, 악기의 역사 자체를 바꾼 곡이 바로 첼로 소나타 1, 2번(앨범 2~3번, 5~6번 트랙)이기 때문이죠. 소나타 3번(앨범 8~10번 트랙)은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 직후에 쓴 곡으로 다른 소나타들에 비해 규모가 크고 다이내믹하지만, 소나타의 내성적 요소가 분명하여 반복해서 들을수록 그 너비와 깊이가 함께 느껴집니다. 또한 소나타 4, 5번(앨범 11~15번 트랙)은 베토벤이 지병과 영감 고갈로 인해 2년 동안 아무 곡도 쓰지 못하다가 완숙한 후기 작품들의 포문을 열었던 작품이기에 상징성을 갖죠.

저는 9월 29일 잠실 롯데콘서트홀 공연을 보았는데요, 두 연주자의 호흡은 수려하게 어우러졌고 기분 좋은 긴장을 이어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대화를 주고받는 부분 들에서는 어떤 위트가 느껴질 만큼 두 연주자의 호흡은 자연스러웠고 표현에서는 절제가, 전개에서는 여유가 묻어나왔습니다. 앙코르도 두 번이나 있었죠. “호흡을 맞추기 전에 가능한 모든 각도를 모두 탐구한다”했다는 양성원 첼리스트와 엔리코 파체. 두 음악가의 오랜 우정과 앞으로 함께할 음악 여정을 응원합니다.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롤랜드 테이프 에코만로 구성된 '솔로 앨범'을 소개합니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에요(뿌듯). 아르헨티나 출생으로 현재 독일에서 활동 중인 세바스티안 플라노는 이 앨범에서 크로스오버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신의 음악적 삼위(三位)를 미니멀하고도 심도 있게 표현합니다.

2번 트랙 <Save Me Not>은 1번 트랙 <Agos>로부터 흘러온 물결이 광막한 안개 같은 음향효과와 만나 신비롭고 광활한 공간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세 개의 나무토막에 몸을 맡긴듯, 세 개의 음정만으로 초연하게 “Save me not(날 구하지 마)”이라고 읊조리는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오죠. 긴 여운을 가진 퍼커션과 전자 비트의 메아리, 귀와 목에 활을 켜듯이 비벼오는 맞바람 소리가 처연한 애상곡입니다.

3번 트랙 <A Present for a Young Traveller>는 제목처럼 어린 여행자를 위한 선물처럼 들립니다. 자신이 짊어진 불안에 지친, 그러나 완전히 짓눌리지는 않은, 내면을 지탱하는 엷고 투명한 미소. 그리고 슬픈 형상 속에 있지만 오래 머물지 않을, 혹은 더 머물 수 없는 창가의 분분한 시선과 빗방울이 연상되는 곡입니다.

5~8번 4개 트랙으로 묶이는 <Soul> 시리즈는 prelude(서곡)으로 시작하여 각기 Avow(맹세), Elan(생의 약동), Ylem(우주의 시원적 물질)이라는 세 개의 테마로 진행됩니다. 첼로, 피아노, 과하지 않은 전자 효과만으로 그의 음악 여정과 성찰 그리고 각 층위의 개성을 드러내죠. 특히 5번 트랙은 이 앨범의 전체 이미지를 잡아주며 늦은 가을 하늘만큼 고고하고 창백한 서정을 잘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