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하기

‘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하기

Against Empathy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52), 2022.8.3,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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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테러리스트, 공감, 엠퍼시, 공평, 감정

1.머리말

2.‘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3.‘나에게’ 공감하는 사람들

4.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근래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지만 매력을 가진 우영우에 사람들은 공감했습니다. 한편 지난달 26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공식 SNS에 만평을 발표(링크)한 이후 각 커뮤니티는 이를 비판하는 글로 가득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눈길이 머물렀던 한 댓글이 있습니다. 　

“공감도 공감할만한 사람한테 공감을 하는거지. 우영우가 지하철을 막았나? 피해주는 시위를 하면서 공감을 바라는 게 말도 안된다.” 　

이 문장 중에서도 ‘공감할만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두고 오래 궁리했습니다.

공감할만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공감받기 위해서 어떤 요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그리고 공감할만한 사람만 공감받아야하나. 그리고 공감할만하지 않은 사람은 권리가 없는가 등의 물음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fig.1> 공감(Empathy)의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는 공감의 시대라고 할만합니다. 공감1)을 강조하는 책이나 강연들이 쏟아지고 있고, 정치인들도 혐오 시대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공감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공감이라는 ‘행동’만 강조돼왔을 뿐, 공감의 구체적인 대상에(누구를?) 대해서는 별로 논의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쌍’하고 가엾은 아이에겐 쉽게 공감하곤 하지만, 새 운동화와 에어팟을 가진 ‘가짜 난민’(링크), 치안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민자나 ‘수업권을 침해’하는 노동자의 시위(링크),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겐 공감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즉 이들은 간단히 말해 ‘공감할만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공감할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정당성, 권리를 잃게 되곤 합니다.

당연히 공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간 ‘공감이 아주 좋다’라는 식으로 강조돼온 와중에, 그 목적어에 들어가지 못하는 - ‘공감할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어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어쩌면 안에 든 것이 마구 빠져나가는 것도 상관 없이 빈 리어카를 그저 끌고 가는 것이나 비슷한 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번쯤 공감이라는 단어 자체 보다도, 그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해찰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공감할만한’ 사람에게만 공감하면 되는 걸까요? 그런 ‘공감’이 더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될까요? 　

오늘 레터에선 공감의 이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들(나가이 요스케 <공감병>, 폴 블룸 <공감의 배신> 등)을 지팡이 삼아 공감에 대하여 해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공감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는데요. 오늘 레터에서는 기본적으로 공감의 의미를 '타인의 상황을 내 것인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인지적 엠퍼시Cognitive Empathy)로 사용합니다. 오늘 다루는 책들이 현실에서 공감이란 단어의 오남용을 지적하는 책들이다보니 때로 '연민'과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작은따옴표를 쓰거나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적었습니다.

【2.‘도저히 싫은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통 누군가에게 공감한다고 할 때를 떠올려봅니다. 아마도 ‘공감받을만한’ 행동을 했거나, 눈물나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딱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착하거나 가엾지도 않고, 오히려 나에게 적대적이거나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공감할 수 있을까요? 　

일본의 NPO 억셉트 인터내셔널 대표 나가이 요스케는 아마도 이런 고민을 가장 치열하게 하는 사람 중 한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테러와 분쟁의 해결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억셉트 인터내셔널은 소말리아 테러단, 투항자를 구호하고 이들을 갱생, 교섭하는 업무를 맡고 있거든요. 즉 그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공감받기 어려울만한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NPO 활동 외에도 일본에서 활발하게 집필, 방송 출연 등을 하며 경험을 나누고 있는데요. 그가 쓴 책 <공감병>의 부제는 ‘공감 중독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감이 중요하긴 하지만, ‘상대를 나처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돕고 연대한다’는 사고 구조에선 ‘도저히 나처럼 생각할 수 없는 상대’ 혹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공감 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의 비극을 보았을 때 공감보다도 권리로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fig.2> 일본 NNN다큐멘터리 <"테러리스트"와 만드는 미래 - 소말리아 나가이 요스케의 도전> 좌상단에는 "당신들이 평화로 향하는 열쇠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출처 NNN 다큐멘터리 화면 갈무리

이 책에서 그는 여러번 “예를 들어~”라고 운을 떼며 “○○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데요. 그 질문의 난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자주 곤란해집니다.

예를 들면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린 60대 무일푼 남성, 붙임성 없고 과묵한 전 테러단 일원(완전히 ‘갱생’되었는지 알 수 없는) 등입니다.

길가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남루한 차림의 60세 남성이라면[...]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날렸기 때문이라는 배경 정보를 듣는다면 오히려 ‘자업자득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니 눈곱만큼의 공감도 싹트지 않는 게 당연하다. 감정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내가 공감할 만큼의 정당성이 없다’는 냉담한 결론이 기다릴 뿐이다[…]하지만 추루한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인간으로서 겪는 굶주림이라는 고통은 다를 바 없다[...]결국 개개인이 가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때 공감은 특정인에만 해당되는 지향성을 갖게 된다.

-나가이 요스케, <공감병>(이하 동일)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보통 포털 사이트의 기사, 커뮤니티 글 속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공감’ 아니면 ‘화나요’로 수렴되곤 합니다. 수많은 글들을 보다보면 마치 옆구리에 바구니 두개를 각각 달고 화나는 내용인지 공감할 내용인지를 감별해 각각의 공을 어느 한쪽 바구니에 던져넣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30대 파산자라고? 알고보니 부모님을 혼자 부양하고 있어? 그런데 코인 투자를 해서 빚을 졌다고? - 왼쪽!)

결과적으로 ‘공감’ 바구니에 공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사람은 대체로 ‘순결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초수급자인데 월 10만원 넘게 술 담배값으로 써버리거나, 공짜 급식을 먹으며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실업급여를 받는데 여행을 가거나, 시위를 하는데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했다면 곧바로 ‘자업자득’이라며 공감의 스위치가 내려가곤 하죠.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면서부터 평생 쌤통인 사람도 없고 돈쭐나기 위해 태어난 성자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감과 자업자득 사이에 있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가 공감할만한지, 아닌지는 그의 타고난 권리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모두의 인권을 지키자!”같은 아름다운 구호보다 ‘기본적으로 말하기도 싫고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권리는 있다’는 정도가 심성에 깃들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증오가 휘몰아치는 지금의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열쇠는 공감이 아닌, 권리에 대한 이성적 시선이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선 사실적 실체가 그 시선에 동반된다. 본능이나 직감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그것을 인정하고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도록 이성의 닻이 필요하다[...]폭력적 방향성에 공감을 부추기는 일에 대해서도 이성의 닻을 내리고 항거할 필요가 있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환대’는 ‘대환영’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고깔모자를 쓰고 춤을 추며 ‘대환영’하는 게 아니라, 도저히 싫은 것, 내게 멀고 관심 없는 것일지라도 겨우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도 이런 태도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아나키적 엠퍼시2)’를 주장한 브래디 미카코는 우리가 테러리스트나 가해자같은 이들에게조차 자리를 내어주고 공감의 폭을 넓혀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군가의 신발을 신어본다면, 그 사람이 어째서 자신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했는지나 어떤 이유에서 문제적 발언을 하는지를 상상해 앞으로 그런 행위를 막거나 그 사람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위한 귀중한 재료를 얻을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기를 게을리하고 계속 같은 방식으로 비판한다 해도[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이터를 계속해서 들이민다거나] 그다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지 않았을까[...]그것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카오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혜이자 각오라고, 나는 생각한다.“

-브래디 미카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중

사실 위의 대목은 공감의 중요성을 다룬 브래디 미카코의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의 '본문'이 아닌, '나가며'에 곁다리(?)처럼 실린 대목인데요. 이는 편집자가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공감은 좋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도저히 싫은 사람들에게도 공감해야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이 질문과 대답이 ‘곁다리’로 실렸다는 사실, 그리고 공감의 중요성을 다룬 이 책의 편집자가 도저히 궁금해서 이 질문을 막이 닫히기 직전에 다급하게 뒤쫓아가듯 했다는 점 자체가 우리 시대에 공감이란 단어가 다루어지는 풍경이 아닐까 해서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부분을 조금 더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2)'아나키즘'과 '엠퍼시'를 조합한 단어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브래디 미카코가 역설하는 엠퍼시의 모습입니다. 그는 엠퍼시가 자기 위주로 돌아갈 경우 '흑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신발을 언제든 벗을 수 있는 - 나의 입장이란 내가 방금 벗은 신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 위의 자유로운 공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나에게’ 공감하는 사람들】

도저히 싫은 사람에게마저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직 나에게만 ‘공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감 과잉의 시대엔 오히려 공감의 껍질을 쓰고 나-내 주변에게만 ‘공감’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인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에서 공감의 부작용에 돋보기를 가져다댑니다.

위의 나가이 요스케 책과 마찬가지로 공감이 갖는 가치를 아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이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잘못된 결과를 낳기 쉽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에게 공감해야 한다”고 ‘착한 말’을 하지만 실제로 공감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는 “사실은 (공감이 부족해서 문제라기보다는) 공감이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강조합니다. 엄밀하게는 ‘나(우리편)에 대한 공감’입니다.

<fig.3> <공감의 배신>을 쓴 폴 블룸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가 지난 7월 4일 'Big Think'에 출연해 공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영상링크) 그는 우리가 명백히 우리와 가까운, 친밀한 사람에게 공감을 하기 쉽기 때문에 공감을 도덕의 지침으로 삼아선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Big Think 유튜브 화면 갈무리

블룸은 공감을 ‘스포트라이트’에 비유하는데요. 마치 작은 손전등을 꺼내어 비추면 동그랗게 빛이 닿듯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 자신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것에 공감하기 쉽다는 거죠.

조금 알쏭달쏭하지만, 우리가 낯선 사람보다 가족에게 공감하기가 쉽고 아주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보다 나와 비슷한 경험과 생각,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공감하기가 쉽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인종에 따라 공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하고요. 2007년 연구에 따르면 미 언론에 재난이 보도되기 위해선 유럽에선 평균 1명이 사망해야 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선 평균 43~45명이 사망해야 한다고 합니다.(링크)

이런 상황이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쟁 등 극도의 갈등 상황에서 ‘우리편에 대한 공감’이 어떻게 상대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지를 고려하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칼럼니스트 제이 캐스피언 강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SNS에 과하게 많은 ‘공감’ 영상, 고양된 지지 메시지들이 오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링크)3) 만약 이라크 전쟁 당시에도 틱톡이 있었다면 ‘우리는 갈색 피부의 희생자들에게도 똑같은 정도로 공감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면서요. 만약 그게 안된다면, 때로 제3자로서 균형을 잡아야하는 국제 사회마저도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지지를 보낼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공감의 이런 편향성 때문에 폴 블룸은 결국 본능적 감정이 흐르는대로 맡겨둔다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이들에겐 공감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때론 의도적으로 ‘(자연스러운) 공감의 작동을 차단’할 필요성도 있다는 것이죠.

버트란드 러셀은 신문을 읽을 때 좀 더 공정한 시각에서 사건을 이해하려면 해당 나라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넣어보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스라엘’을 ‘볼리비아’로 바꾸어 읽고, ‘미국’을 ‘아르헨티나’로 바꾸어 읽어보라는 말이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중(이하 동일)

저는 이 대목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모리타니안>(2021)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는 9.11 테러 이후 오사마 빈 라덴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관타나모 수용소에 재판도 없이 수용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던 실존 인물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가 등장합니다. 9.11에서 동료를 잃은 미국 군인들은 군 검찰관인 카우치 소령이 슬라히가 조사 끝에 사실은 무죄이며 부당한 고문을 당해왔다는 것을 폭로하려하자 차가운 눈으로 “배신자”라고 읊조립니다.

만약 폴 블룸의 렌즈를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면, 여기서 진실을 밝히려는 카우치를 ‘배신자’라고 부른 미국 군인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편’의 희생에 지나치게 공감했기 때문에 슬라히에 대해선 공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죠.

<fig.4> 우리편에의 강한 '공감'이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모리타니안>의 포스터(왼쪽), <모리타니안>의 군 검찰관 카우치 소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그의 절친한 동료가 9.11 테러에 의해 희생된 인물인데요. 사건 조사를 하다가 슬라히가 무죄이며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집니다. 영화 화면 갈무리

블룸은 이처럼 공감이 얼마든 자신을 중심으로 ‘조절 가능하’며 이 때문에 자주 현실을 왜곡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카페에 앉아 있는 이웃들에게만이 아니라 이웃들을 불구로 만든 폭탄을 터트린 자살 폭탄범에게도 공감하면 좋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탱크에 깔려 집이 완전히 무너진 자기네 형제자매에게만이 아니라 그 탱크를 몬 군인들에게도 공감하면 좋을 것이다[…]사람들에게 자기 자식의 입장에 공감하는 것만큼 적의 입장에도 공감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사과를 갈구하는 것만큼 개똥도 갈구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공감은 도덕적 행동을 지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공감의 이면을 지적한 책,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를 쓴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는 트럼프식 포퓰리즘의 특징으로 ‘공감’을 들기도 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는 ‘부당하게 공격, 고통받고 있는 나에 대한 공감’입니다.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는 아무리 이민자들의 실질 빈곤율이 높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하다고 해도 사회적 자원은 ‘피해자인 나’에게 집중되어야 합니다.

책을 덮고 나면 우리가 공감을 덜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나’ ‘우리편’에만 과하게 ‘공감’을 하는 것이 어쩌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노동권보다도 나의 침해받은 수업권과 정신적 피해에 ‘공감’해주길 요청하는 것이라든지, 누군가의 이동권보다도 출근시간을 침해받은 나의 아픔에 ‘공감’ 해주길 요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공감의 본래 뜻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남의 신발을 신어보기’는 커녕 ‘내 신발끈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매기’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공감이 훌륭하다! 라는 말을 넘어, 구체적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가를 논하지 않는다면 공감이라는 말은 엉망진창으로 쓰이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공감 과잉’ 사회에 오히려 혐오가 판치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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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우파 모두 ‘감정 규칙feeling rules’이 작동한다. 우파는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관한 자유주의적 통념, 곧 게이 신혼부부를 보고 행복한 감정을, 시리아 난민의 곤경을 보고 슬픈 감정을[…]느껴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려 한다. 좌파는 편견을 본다.”

-앨리 러셀 혹실드, <자기 땅의 이방인들>

3)해당 칼럼은 과거 <푸틴은 어떻게 23년이나 집권했을까?>(22.3.9) 회차(링크)의 마지막 부분에도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4.맺음말】

“나는 그가 양손에 바지를 붙잡고 있어서 총을 쏘지 않았다. 나는 ‘파시스트’를 쏘려고 여기 왔다. 하지만 바지를 붙들고 있는 사내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당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당신도 그를 쏠 마음이 안 생겼을 것이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을 당시의 체험을 쓴 에세이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Looking Back On The Spanish War>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에스카의 인근 평지에서 마주친 파시스트 병사는 당시, 옷을 반쯤 입은 채 바지를 양손으로 붙잡고서 저 멀리 뛰어가는 중이었고요. 오웰은 그를 쏘지 않았습니다.

맞닥뜨린 병사가 알고보니 사실은 엄청난 양심의 소유자라거나, 도움을 줄만큼 가엾거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구한 인생사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그가 양손에 바지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지어 그가 적군의 옷을 입고 있는 병사이며, 그가 만약 그 순간 잡고 있었던 것이 바지가 아니라 총이었다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우영우처럼 훌륭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공감할만한’ 장애인이고,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나쁜’ 장애인일까요. 묵묵히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 없이 일하는 청소 노동자는 ‘공감할만한’ 노동자이고, ‘시끄러운’ 시위로 나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은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나쁜’ 노동자일까요.

애초에 내 공감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내가 공감을 하든 안하든 그들에게는 이미 나와 마찬가지로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는 때로 서로 부딪치면서 조율을 해나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공감할만한’ 사람을 고르는 와중에, 우리는 어쩌면 결국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낯선 타인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공감의 본의에서 벗어나 ‘나에게 친숙하고 무해한’ 것만 찾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선 ‘공감’이란 말이 아무리 많이 오가더라도 더 상황은 나빠지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공감이 필요합니다. 단, ‘공감할만한’ 사람에게 하는 공감이 아니라, 상대방이 단지 바지를 붙들고 있어서 공감하는 정도의 시시한 공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아요’만 ‘공감’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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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짭조름하게 정어리 굽는 냄새, 여자 간수도 그리 부유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네”

(가네코 후미코, 교도소에서 쓴 단가)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나가이 요스케, 박재현 옮김, 『공감병』, 마인드빌딩, 2022.

-비교적 가볍게 쓰여진 에세이지만 오늘 레터와 관련해 이런저런 생각할만한 부분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직접 현장에서 소말리아 테러리스트들의 구호, 지원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혐오의 대상에게도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날카롭게 찔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해당 책에는 구호 활동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아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폴 블룸, 이은진 옮김, 『공감의 배신』, 시공사, 2017.

-이번 회차를 준비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공감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단지 '비판을 위한 비판' '생산적이지 않은 비판'으로 흐를 가능성에 대한 우려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그간 가져왔던 의문을 돌이켜보면서 다룰만한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에서 다른 책들로 가지를 뻗어가며 독서를 계속해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공감 때리기'기 아니라 - 도덕적 판단에 있어 '공감'에 의존하기 보다는, 공감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말 사회 변화를 위해 필요한 부분을 추구해가자는 것입니다.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두행숙 옮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소소의책, 2019.

-폴 블룸이 조금 보편적 차원에서 '공감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면, 이 책은 철학적 의미에서의 '공감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동의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간혹 있긴 했는데, 폴 블룸의 책(주로 '공감'에 반대한다고 할 때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공감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브래디 미카코, 정수윤 옮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은행나무, 2022.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즘'과 '엠퍼시'를 결합해 '아나키즘적 엠퍼시'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에세이입니다. 저자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폴 블룸과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책의 주된 논지를 요약하고 비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위의 두 책이 어렵게 느껴질 경우 이 책을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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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답’ 아이들에게, 단지 틈새를 주는 일

독서시간: 약 13분 / 글자수: 약 4200자

🖍글 속 한 문장

‘사기꾼이다’ ‘고소하겠다’…. 안 대표는 지난 3년간 아이들로부터 욕이란 욕은 다 들어 봤다. 한밤중에 경찰이 찾아와 아이들 셋을 체포해 간 일도 있었고, 퇴소한 아이들이 숙소 문을 따고 들어와 물건을 털어간 일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재밌고 행복하다” 말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교정시설 출신 등 통상 사회에서 '문제아'라 불리는 아이들의 식사와 자립을 지원하는 안윤숙 청년식당 대표의 사연입니다. 아이들이 '실은 너무 천사같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공짜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스팸만 먹는다'고 반찬투정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버릇없다' '공감할만한' 구석이 없다며 밀어내기보다는, 그저 그들이 바뀔 수 있도록 사회적 '틈새' '자리'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감’이 ‘폭력’이 될 때

독서시간: 약 10분 / 글자수: 약 3500자

🖍글 속 한 문장

약자에 대한 공감은 그를 핍박하는 강자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짝으로 한다. 하여, 반감 없는 공감은 없다. 그런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공감의 한 형식이다. ‘공감의 시대’인 지금,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보편적 덕목으로 예찬된다[...]더구나 공감은 ‘감정’이기에 논리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이진경 서울과기대 교수의 칼럼입니다. 전반적으로 오늘 다룬 폴 블룸 책의 논지와 유사한데요. 물론 약자에의 공감과 핍박하는 강자에의 공감(!)을 동일하게 둘 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내가 나에게 편한 쪽에만 공감하고 있진 않은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터에서 자세히 다루진 못했지만 특히 폴 블룸이 '피해자화'를 '공감'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요. 모두가 쉽게 '나야말로 공감받아야 할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시대엔 누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좋아요’라서 연대하는 게 아니다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공존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도 동물 보호에 찬성한다. 노인과 장애인, 소수자들을 다 좋아하진 않아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때로 주장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귀기울이고 소통한다. 동물·환경 보호가 반인간주의가 아니고, 노인공경이 안티 청년주의가 아니라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박선화 한신대 교수의 칼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권리를 지지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설령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고 있습니다. 오늘 다룬 내용을 우리나라 근래의 상황('갈라치기')과 연결지어 생각해볼만한 글입니다.

‘공감 결핍’ 아닌 ‘공감 과잉’의 문제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2100자

🖍글 속 한 문장

공감의 깊이와 반경은 상충한다. 미국 남부 흑인들이 경험했던 혐오, 차별, 폭력이나 유럽의 홀로코스트 잔학 행위들은 단순히 가해자의 공감 결핍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 가해자들은 흑인 남성에게 강간당한 백인 여성이나 유태인 소아성애자에게 착취당한 독일 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에 극도로 공감한 이들이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레터에서 살펴본 내용과 이어지는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칼럼입니다. 공감과 동정을 구분해서 살펴보면서, 우리가 동정이 아닌 공감을 추구해야하며 특히 공감의 '반경'을 넓히는 작업을 계속해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번 레터에 말씀드렸던대로 오는 8월 4일은 인스피아의 첫돌입니다 :) 같은 팀에서 각자 콘텐츠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동료들이 인스피아 이름이 적힌 예쁜 케이크를 주문해서 축하해주었습니다.

인스피아의 1주년을 축하해주신 연구자님들께도 다시 한번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연구자님들이 안계셨다면 레터를 힘내서 계속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찰을 계속해줘' 옆의 글자는 '7'이나 '?'이 아닌 '지팡이'라고 합니다. '해찰'을 먹었더니 입술이 파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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