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잇는 편지는 매월 한국전쟁 국가폭력 피해자의 잊힌 이야기를 편지의 형식을 빌려 전해드리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의 메일링 서비스입니다. 혹 수신을 원치 않으시면 알려주세요. 다시 잇는 편지 한국전쟁 당시 국가폭력으로 돌아가신 누군가의 이름을 지금에야 불러봅니다. 아마 그 이름은 오랫동안 불리지 못했겠지요. 가해 권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죽음을 지우려 했으니까요. 그렇게 잊힌 수많은 이름과 그 이름을 품고 숨죽였을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기까지, 70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먼가요. 그 이름들 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더께를 떨어내고, 잊혔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 보려 합니다.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걸음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뎌보려 합니다. 편지를 쓰는 마음과 편지를 읽는 마음이, 긴 시간을 넘어 그 이름들과 이어지기를 바라면서요. 미군이 신의주를 폭격한 직후의 모습. 폭격 지역 북쪽의 강이 압록강이다. 1950.11.8. NARA 소장 안녕하세요. 2021년 11월의 제가 1950년 11월의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습니다. 이제 정말 겨울이 온 것 같아요. 저는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요.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추위였습니다. 강원도가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긴 하지만 그래도 북한에 비해서는 따뜻한 편이겠죠. 폭격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토굴을 짓고 살아가는 당신이 맞이할 겨울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첫 폭격 이후로도 계속 폭격이 이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달 서울공항에서 굉장히 큰 규모의 무기박람회가 열렸어요. 전투기나 탱크 같은 무기들을 사고 파는 행사였습니다. 군인이나 무기 상인 같은 사람 말고도 저 같은 일반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전투기들이 곡예 비행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무척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전투기를 구경했습니다. 가끔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요. 편지를 쓰면서 다시 그때의 광경을 떠올리니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당신이 사는 도시가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한 사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여성도 찍혀 있었어요. 똑같이 전투기 아래에 있었던 그(혹은 당신)와 저의 자리를 조심스레 겹쳐봅니다. 이 겹침을 과도한 상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당신과 제가 느꼈을 감각은 너무나 다를 겁니다. 그래도 그 겹침마저 없다면, 당신을 기억하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고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전투기를 구경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사는 신의주를 포함해 북한의 여러 지역을 조사했던 여성들에 대한 책*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했어요. 그 여성들은 폐허에서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저에게 도착하기까지, 그 경로를 생각해 봅니다. 당신은 그 여성들에게 이야기를 건넸고, 그 여성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한 학자가 그 여성들이 기록한 글을 다시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당신에게 보내는 답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요. 긴 시간을 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어떤 마음이 지금 여기의 제 마음과 닿았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까요. 언젠가 신의주에 가보게 될 수도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도시의 곳곳을 오래 걸어보려 합니다. 당신이 살던 그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을 도시의 풍경 앞에서 함부로 감상에 젖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만 여전히 마음 한 쪽 남아 있을 오래된 이야기를 종종 꺼내어 보겠습니다. 가끔은 그 이야기를 손에 꼭 쥐고 걸을 수도 있겠지요. 안부를 묻기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부디 안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2021, 창비 정전협정일에 찍은 평양의 모습. 정말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수많은 폭격 자국이 있다. 1953.7.27. NARA 소장 한국전쟁기 북한에서의 미군 폭격 1950년 10월 말, 한국전쟁에 중국군이 참전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왔던 유엔군은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북한 전역을 폭격하는 미군의 '초토화 정책'은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습니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만주 국경과 수력발전소를 제외한 북한 지역의 모든 건물과 시설, 마을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전까지는 철도나 군사 시설 등 전술적인 목표에만 폭격을 했지만(물론 그때에도 민간인 피해는 있었습니다), 이제는 민간인이 거주하고 이용하는 모든 곳이 폭격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1950년 11월 8일, 78대의 B-29 중폭격기와 87대의 전폭기가 신의주를 공습했습니다. 약 8만 5천 발의 소이탄(탄 내부에 인화성 물질이 있어 폭파 시 광범위한 화염을 발생시켜 불태우는 폭탄)이 투하됐는데, 당시 신의주에는 1만 4천여 호의 가옥에 12만 6천여 명이 살았습니다. 건물 1채당 평균 6.07발, 사람 1명당 0.67발의 소이탄이 투하됐던 것입니다. 5천 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이중 4천 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습니다. 남성은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11월 내내 신의주 외에도 수많은 대도시가 공습당했습니다. 1950년 11월 미 공군은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을 만포진 95%, 고인동 90%, 삭주 75%, 초산 85%, 신의주 60%, 강계 75%, 희천 75%, 남시 90%, 의주 20%, 희령 90%로 집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계속 이어질 수많은 폭격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공산군과 유엔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과 압록강 사이의 모든 공간이 폭격의 목표였습니다. 맥아더는 폭격 작전을 설명하면서 주한미대사 무쵸에게 "불행히도 이 구역은 사막화될 것입니다"는 말을 건넸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1951년 5월, 한국전쟁 조사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위원들은 말 그대로 사막화된 북한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특파원이었던 한 헝가리 기자는 황폐화된 북한의 풍경을 마치 달 표면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조사위원들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도 살아가는 북한 주민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폭격은 소이탄이나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피신했던 사람들이 폭격이 끝난 줄 알고 불을 끄러 나오면 그들에 대한 기총소사가 이어지거나 투하했던 시한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진화가 원천 봉쇄되면서 수많은 도시와 촌락은 완전하게 소각되었습니다. 조사위원들이 방문하는 동안에도 수차례 폭격의 위협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그곳에서, 생존자들은 토굴이나 토막(흙집)을 짓고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살아갔습니다. 1951년 7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정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폭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교착된 상황에서 미군은 공군력과 해군력으로 공산군을 압박해 협력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했습니다. 결국 유엔군과 중국군은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 적대행위가 중지되지 않는다는 '전투계속 원칙'에 합의했고, 이는 북한 민간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1952년 중반부터는 유일한 예외로 두었던 수력발전소마저 폭격의 목표가 되었고, 1953년에는 저수지까지 폭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수지 폭격은 홍수로 철도와 도로를 일정 시간 무력하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벼농사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북한 주민의 식량 수급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끔찍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렇게 폭격은 정전협정 발효 일시인 1953년 7월 27일 밤 10시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공중폭격을 집대성해 연구한 기념비적인 저작인 『폭격』에서, 저자 김태우는 미국에 대한 북한의 증오가 그저 이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북한을 절멸하려 했던 미군 폭격에도 기인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2021, 창비 김태우, 『폭격』, 2013, 창비 *이번 호에서 미군 폭격과 관련된 내용은 전부 위 책에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공중폭격에 대해서는 『폭격』을, 국제민주여성연맹 활동에 대해서는 『냉전의 마녀들』을 참고하시면 훨신 더 풍부한 내용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편지를 읽고 마음이 움직이셨다면, 다른 분들께도 그 마음을 이어 주시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