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는 아닙니다만
바빠. 별일 없어. 그럭저럭. 괜찮아. 잘 지내. 누가 근황을 물어온다면, 일단 이렇게 답한 후에 생각합니다. '요즘 나 어떻게 지내더라?' 여러 단어를 동원해 지난날을 묶어봅니다. 무용한 시간, 내다 버린 시간, 흘려보낸 시간도 있고 꽤 안간힘 써서 살아낸 시간, 한없이 기다리는 시간, 꿈의 시간, 동화 같은 시간, 토이의 노래 제목처럼 거짓말 같은 시간도 있을 테고요. 벌써 이만큼 흘렀고, 아직 한참 남아있기도 합니다. - 🤓 에디터 H
백수는 아닙니다만 이시주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 김보라 | 스리체어스(threechairs) “요즘 뭐해?”라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다양하다. 1번, “나 창업해.” 하지만 ‘창업(創業)’의 사전적 의미는 ‘사업을 처음 시작하다’ 이므로 벌써 1년째 “창업을 한다”고 답해버리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2번, “회사 다녀.” 이렇게 말하기엔 이어질 질문인 “어디 회사?”에 대답하기 곤란하다. 회사 이름으로 대답하면 어디냐고도 묻지 않고, “아… (이름 모르는 중소기업이구나)” 하고 말까 봐. 그렇다면 3번,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어.” 말하고서 왠지 “아, 백수는 아니고.” 라고 말한 다음, 아차 싶어 “금수저 이런 거 아니야.” 하고 덧붙여야 할 느낌. 요즘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고들 한다. 반은 맞고, 반은 잘 모르겠다(틀린 것 같지는 않으므로). 나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른바 기업의 형태를 겨우 갖춰가는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겨우 1년을 채워간다. 대부분의 시작이 그렇듯, 처음부터 원대한 결심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순간적인 생각과 그 생각에서 삐져나온 순간의 선택. 그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뿐이다(물론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라고 해봤자 별거 없지만).
1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도 대단하지도 않지만, 행복한 일이란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때때로 외롭다는 사실은 원치 않게 딸려 오는 덤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너나없이 누가 지금 제일 불행한지 배틀을 벌인다. 미래가 없는 회사, 듣는 나까지 미치게 만드는 상사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내 정치 이야기는 이내 본인들의 삶에 대한 우울과 자조로 이어져, 아무튼 현재를 즐기자는 결론으로 끝난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고는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현실을 열심히 겪어내고 있는 그들과 달리 이 나이 먹고도 꿈과 이상을 외치는 철부지로 보일까 봐 말을 아꼈다. 나도 회사 욕, 상사 욕을 해야 비로소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회인이 되는 것만 같았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마저 낯설게 느껴졌지만,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이 생각을 키우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마주쳤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라니. 책 띠지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그럼에도’라는 관용구와 ‘불확실성’이라는 명사, ‘견디다’라는 동사에 이끌려 책을 집었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불안을 핵심 키워드로 삼았지만 답변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불안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아니요, 별로 불안하지는 않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서 “평화로운 것 같아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준비해 온 질문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중략…) 생각보다 담담한 지망생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지망생들에게서 억지로 불안정성에 대한 감상을 이끌어 내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26쪽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통상 10년 정도의 지망생 기간을 거친다고 한다. 이것도 평균치이지 사실상 기약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불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지망생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열다섯 명의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입을 빌려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기에 편안함을 찾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이제 2년 이상 지속하다 보니까 그냥 무덤덤해요. (…중략…) 막상 영화 현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사니까 저는 오히려 더 좋더라고요. 어느 정도 불안은 있어도 제가 한 선택에 한 번도 회의를 느껴본 적은 없어요.” - 34쪽
“안 하면 어쨌거나 후회할 것 같고. 그냥 그런 거죠. 인생 뭐 있나. (웃음) … 막연한 얘기일 수 있는데, 세상에 없는 거 하나 만들어 놓고 그런 거에 작게나마 보람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인생이 뭔지, 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으면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꽂혀서 사는 거죠. 액세서리일지도 모르는 다른 것들 때문에 사는 시늉을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 35쪽 “졸업 영화를 갖고 갔더니 교수님이 엄청 까는 거예요. 네가 뭘 아냐고. 어떻게 하나, 하다가 남들은 취직 준비할 동안 저는 3개월 내내 봉사 활동을 했어요. 목요일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 다리 주물러 드리고 집에 와서는 시나리오 쓰고. 그렇게 하면서 작업을 했어요.” - 57쪽 “절대 이상적인 게 아니거든요. 영화를 한다는 게. 이거는 직업이고, 이거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되게 현실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 - 81쪽
모두가 꿈을 꾸고 있었지만, 아무도 막연한 파이팅 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에 대한 객관화된 판단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 불안정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이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향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인생을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겪어내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꿈과 낭만 속에만 있지 않았으니까. 지망생들은 꿈과 현실의 간극에 굴하지 않았고, 불안의 연속인 삶조차도 사랑했다. 이제서야 그들이 왜 불안하지 않은지, 불안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OOO를 꿈꾼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웠던걸까. 아니, 두려운 걸까. 자꾸 되묻게 된다. 내가 가진 것들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 ‘보통의 삶’ 조차 살아내지 못할 것에 대한 우려, 과정이 단지 과정으로만 머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모든 것들을 제하고 나면, 지금 이 순간이 남는다. 어쩌면 나는 이미 격렬하게 선택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흔들리기도 하지만, 어찌 됐건 여기까지 왔으니까.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고 계속해서 꿈을 꿀 용기를 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당당해지는 것이다. 당당하게 꿈을 꾼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이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기꺼이 살아내는 것 말이다.
이시주 | 리뷰로 콘텐츠를 만드는 '오글리'를 친구들과 함께 꾸려가고 있습니다. 창업 1년 차이고, 선천성 걱정벌레 증후군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쭉 걱정벌레일 테지만, 행복한 걱정벌레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 그것에 대한 걱정만은 접어두고 있습니다.
오글리의 별책부록
✍🏻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망생들의 열정을 응원하는 것이다', 저자 인터뷰
이 책의 저자 김보라는 처음에 영화 현장을 떠나는 동기를 보며 지망생들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다루려 했답니다. 하지만 막상 지망생들을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불안해거나 불행해하지 않았다는 거죠. 오히려 구조적인 잣대로 분석할 때 지망생들이 피해자로 규정될 것을 경계했고,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이들이 보여주는 단단한 힘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창의 노동자'들의 과정을 이해하고, 과정에 대한 존중과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김보라.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까요? (인터뷰 보러 가기)
📕 ‘책처럼 깊이 있게, 뉴스처럼 빠르게’ 북저널리즘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은 미디어 콘텐츠 브랜드 북저널리즘(Bookjournalism)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젊은 혁신가를 겨냥하여, 책만큼 깊이 있으면서도, 뉴스처럼 속도감 있는 콘텐츠를 다뤄요. 주제 선정부터 인쇄까지 이르는 출판의 전 과정을 2개월로 단축해 시의성이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학위를 가진 전문가보다는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글을 맡기며 미디어의 혁신을 이끌어가고 있답니다. (홈페이지 방문하기)
- 😉 별책지기 J
오늘의 리뷰어, 이시주 님의 취향문답
**** 리뷰어의 취향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 지금 내 침대 맡에 놓여있는 책 브로드컬리 편집부, <서울의 3년 이하 퇴사자의 가게들: 하고 싶은 일 해서 행복하냐 묻는다면?> 쪽프레스, <한쪽으로 읽는 기호 04: 버스> 🎬 보려고 찜해둔 영화 <땐뽀걸즈>, <유니콘 스토어>,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 <케빈에 대하여>, <요노스케 이야기>, <남극의 쉐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등 🎧 요즘의 플레이리스트 Lauv - Paris In the Rain (여담이지만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라고.) Jeremy Zucker - Comethru 짙은 - Life Is Good New Hope Club - Start Over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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