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기록] 4회 헤어질 결심, 박찬욱의 여성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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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4번째 취향 기록으로 찾아온 이관우입니다. 오늘은 한동안 핫했던 영화죠? 헤어질 결심을 중심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여성 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영화를 좋아하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쪽에도 관심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꼽아보자면 단연 홍상수와 박찬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박찬욱의 수많은 영화를 넘어선 그의 커리어 하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 헤어질 결심, 박찬욱의 영화에 대해 말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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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변태, 박찬욱
박찬욱을 일컫는 수많은 표현 중 가장 그에게 적합한 단어는 배운 변태라고 생각한다.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박쥐’, ‘아가씨’를 넘어, ‘헤어질 결심’까지. 그의 작품에서 서사의 중심에 세워지는 여성들은 하나 같이 매력적이다. 그 매력은 단순하게 외형적인 게 아니다. 박찬욱 감독은 그 서사에서 그 여성이 어떻게 보여지는 지를 알고 배치한다. 이러한 점은 예로부터 이어져 오던 남성 중심의 미디어 문화에서 여성은 한결같이 남성 주연의 보조자 혹은 동기, 매개체 등으로 소비되기 일쑤였다. 단적으로 그의 과거 작인 ‘공동경비구역 JSA’나 ‘올드보이’의 이영애, 강혜정을 ‘소비’한 포인트가 그러했다. 최근 도래한 성평등적 사회상의 대두 이전엔 여성 캐릭터는 유흥업소 여자 내지는 각박한 어머니 등 몇몇 고정된 인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저 역할을 위한 배우의 투입이었다. (좋은 사례로 들어봤자,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정도)
시대가 발전하며 미디어에서 비치는 여성상도 변화했다. 그 대표적 신드롬이 ‘Sex and the city’ 정도. 억압되어왔고, 제한되어왔던 여성들은 이제는 그저 주체적이기만 했다. 주체적이고자 하는 그 모습조차 고정된 몇몇의 인물상으로만 묘사되었다. 섹스에 지나치게 관대한 여성, 좋은 직업과 연봉을 바탕으로 원하는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사 모으는 여성 등. 복잡하고 모호한 사회적 인물로서의 여성은 아직도 그려지지 않았다. 최근에나 들어서 새로운 여성 작가들과 기획자들의 진출을 바탕으로 개선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장을 바탕으로 하였을 때, 박찬욱은 여성 감독이 아님에도 그 누구보다 여성 서사를 잘 그려내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거다.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묘사되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아닌 그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롭고도 공감할 수 있는 여성이 등장했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복수의 자아와 엄마의 자아, 이타적 자아와 이기적 자아가 모두 융합된, 그 자체로 사람 같다. 우리는 금자의 서사를 쫓아가다 보면 백 선생을 찢어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가벼이 죽일 수 없다는 심리를 이해한다. 희생당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분노에 휩싸이지만, 그저 분노가 끝이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심리. 그러한 입체적인 캐릭터의 서사는 ‘친절해 보일까봐’라는 대사를 도출하고, 속죄의 모티프인 두부를 본 따 만든 케이크에 얼굴을 파묻는 비애와 환희의 장면을 묘사했다. 그가 만들어 낸 이금자는 그의 세계였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만들어 내는 영화 속 세계는 피부를 뚫고 관객의 세계로 침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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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기존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던 건 ‘아가씨’였는데, 이번 작품은 ‘아가씨’를 뛰어넘는 여성 묘사와 전개, 미장셴과 플롯 배치 등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실 ‘헤어질 결심’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한 것이 놀라울 정도로 그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짧게 따라가자면, 서래의 등장 이후에 해준(박해일)의 시선으로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해준은 그의 상식 밖의 행동을 하고, 그의 규칙을 무너뜨린다. 중국 출신의 서래가 ‘붕괴’, ‘미결’, ‘마침내’, ‘영원’ 등의 단어를 읊조리는 장면들은 언어의 장벽을 대표로 내세운 서래와 해준과의 간극을 어색하게 끼워 맞추는 모습인 동시에 사랑이 정처 없고도 지독하게 얽힌 마음이란 걸 알게 한다.
영화에서 서래는 예쁘게 나온다, 물론. 예쁘니까.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판치는 배우 판에서 탕웨이의 외모가 ‘유독’ ‘남들과는 다르게’ ‘독보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미모는 아닐 것이다. (탕웨이의 미모를 폄하하는 것이 아닌,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작품에서의 배우들에게 완전한 몰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서래는 아름다운 것만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어의 장벽을 계기로 한 신비로운 이미지와 카메라의 각도, 묘사 등을 쫓아가다 보면 서래를 사랑하게 된 해준처럼 관객들도 서래에게 사랑에 빠진다. 관객인 나는 영화를 보면서 서래를 사랑하게 되고, 마치 성인물을 볼 때도 느끼지 못한 에로스를 느낀다. (영화 속 서래가 섹슈얼하게 묘사되지 않음에도 그 정도의 감상을 느끼게 한 연출자 박찬욱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성의 붕괴, 미결된 감정이 몰아친다. 서래는 그렇게 나에게 각인되었다. 이건 들어온 게 아니라 박힌 거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생동하는 불꽃이다. 그 순간의 형체를 온전하게 그릴 수 없지만, 손을 갖다 대고 싶게 만드는 반짝임, 불타오름. 존재들에게 파묻혀 버린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선택은 항상 박찬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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