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단미입니다. 첫 번째 레터는 잘 도착했나요. 가닿은 마음의 궁금증이 채 가시기 전에 벌써 두 번째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인데요. 오늘 체감 날씨가 무려 영하 19도 라고 해요. 따듯한 남쪽 지방에서 태어나 스무살까지 살았던 저는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이라 생각했어요. 한데 스무살에 서울로 오고서 알았습니다. 그저 지금까지는 극강의 추위를 경험 한 적이 없었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피부가 따끔거릴만큼 아픈 추위를 겪으며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깨닫는 요즘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에 추위가 찾아와 손가락 마디 끝이 파리해질 때면, 사람의 온기를 찾아 몸도 마음도 데우곤 하는데요. 여러분은 온기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찾으시나요. 진한 커피 한 잔, 보드라운 고양이, 뜨끈한 전기 장판, 언제든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은 가족...이렇게 추위 속에서 온기를 떠올리다보니 문득,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요. 어렵고도 복잡한 '가족'에 대해 두 번째 글을 준비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누구인가요.
비빌언덕의 두 번째 레터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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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일 것 같은데, 형제가 어떻게 돼요?”
“아...”
“고향은요?”
“경상도예요”
“그럼 부모님도 고향에 계시는 건가?”
으레 인사말로 건네는 몇 마디 물음에 숱한 고민이 스친다. 대강 둘러댈 거짓말을 해야 할지, 살아온 시간을 소상히 밝혀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정의부터 설명해야 할지 말이다.
나는 첫째가 맞고, 부모님이 고향에 계시는 것도 맞다. 이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통상적인 질문에 부합하는 답변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를 첫 번째로 낳았고, 이후에도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으니 네 명의 자녀 중 첫째가 맞다. 나를 낳아준 이는 내가 고향이라 말하는 경상도에서 지내고 계시니 이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한데 이 답변이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 묻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낳긴 했지만 키우지 않았던 (혹은 키울 수 없었던) 모친과,살 맞대고 산 기억 하나 없이 이름도 가물가물한 세 명의 아이를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특별히 밉거나 싫은 감정조차 들지 않지만, ‘가족’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가타부타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엄마와 세 명의 자녀, 그들을 나의 가족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다 함께 둘러앉아 밥 한번 먹은 적 없는 이들을 가족이라고 한다면, 인생사 지독히도 외롭다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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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겨울, 수두에 걸린 보육원 동생들과 은지 어린이 (집단생활에서 전염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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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정상 범주의 가족주의를 내세우거나 무례를 내보이는 사람도 있다. 부모의 존재가 당연히 있을 것이란 가정하에 던지는 질문이나 보편의 가족구성을 자랑하듯 열거하는 경우다. 그런 이들에게는 “저는 부모가 없어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의 난처한 모습을 보며 가만히 즐기곤 하는데 ‘어디 한번 당해봐라.’ 하는 뒤끝 있는 마음이랄까.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럼에도 당황하라고 던진 말에 착하게 잘 컸다고 칭찬하거나 짠하다며 동정표를 건네는 사람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다.
세상이 인정하는 가족은 아니지만 내게도 가족은 있다. 그것도 아주 많다.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엔 들고남이 잦은데, 나 역시 가족의 범주를 어디까지 둘 것인지 고민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두와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아니다 보니, 가족을 세는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은 대체로 보육원에서 무사히 퇴소까지 마친 이들이다. 가출하거나 감옥에 가 있는 이들과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기곤 하는데, 그럴 때면 미안함이 스민다. 우리끼리만 안온한 울타리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은 부채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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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잘 살고 있길 바라는, 동생, 친구, 언니, 오빠와 함께 (지금은 없어진 대추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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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족이지 뭐’를 구호처럼 외는 가까운 이들로는 두세 살 터울의 동생들과 그들이 꾸린 가족들이 있다. 이젠 조카들까지 생기다 보니 한번 모일라치면 그 인원이 보육원 하나와 맞먹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어릴 적 부모가 없다고, 고아원(보육원)에 산다고 누구 하나라도 놀림을 받고 올 때면 떼로 뛰어가 혼쭐을 내곤 했다. 가족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라포는 아니었으나, 부모의 부재로 만들어진 결핍의 동질감은 또 다른 끈끈함이 있었다. 코흘리개 동생들은 하나둘, 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동생들의 결혼식이 있을 때면 혹시나 가족 친지 석이 비어 보일까 싶어 무조건 가족석부터 떡하니 차지하고 앉는다. 그리고는 “가족 친지 사진 찍으러 나와주세요.”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 나와, 다 나와”라며 빈자리 없이 가족의 자리를 꽉꽉 채운다. 이런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무어라 말인가.
우리가 가족석을 점유하는 행위는 단순히 자리를 메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혈연이라는 견고한 성벽 위에 쓰인 제도적 약속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수정하는 실천이다. 국가는 보호받을 권리와 돌봄의 책임을 오직 ‘정상 가족’의 틀 안에서만 승인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대소사를 지키며 그 승인의 범위를 삶으로 밀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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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살 아래 동생의 결혼식_2016년 (쪽수는 맞췄으나 한복에서 밀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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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인 서류 한 장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이일지라도, 서로의 생애 주기마다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이 관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사랑이 소유가 아닌 ‘행위’라면, 우리의 가족 됨 역시 상태가 아닌 ‘권리의 행사’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허락받아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곁을 지키겠다는 결심과 실천으로써 스스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쟁취해 낸 셈이다.
세상이 정해둔 답변의 목록에 내가 찾는 답이 없다면, 내가 직접 그 목록의 바깥에 새로운 항목을 써넣으면 그만이다. 우리가 차지하고 앉은 그 가족석은,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의 선언이 아닐까. 혈연 너머에, 제도 너머에, 우리가 발명한 새로운 가족이 여기 ‘떡하니’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말이다.
원하는 대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 '지금, 여기, 우리' 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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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빌언덕의 한 마디
단미의 비빌언덕이 되어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요 𓂅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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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미
저에게 은지는 삶을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배우고 다듬을 것이 더많은 저 이지만, 그럼에도 은지는 제게 더 큰 삶의 질문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 질문에 함께 답해주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으로부터 함께 언덕을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어떻게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무엇이 더 함께 살 수 있는 언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으로 부터 더 나은 사회를 해석하는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은지의 글을 응원합니다.
🪼 맴이
어릴땐 같이 안놀고 각자 크느라 바빴던 사이였는데 크고 나서야 슬슬 친해져서 어느 순간 제일 편한 사람이 됨ㅋㅋㅋㅋㅋ 추정 5살때부터 봤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알고 지내는것도 신기함^^! 이정도면 언니랑은 그냥 가족이지 뭐 ㅋㅋ 우리앙니~~응원해요❤️🩷💜 잘되서 부자됐음 죠케땅ㅋㅋㅋㅋ💰💰
🧤 조영현
은지의 프로젝트 메일을 받고 은지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오래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어. 2001년 그 해, 은지가 기거하는 곳에서 3명의 신입생이 왔고 은지랑 다른 1명이 우리 반이었구나. 은지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이 여러 가지의 이유들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일련의 시간 속에서, 혹시 은지도 중간에 학교와의 인연이 끊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 걱정은 사실 너무나 부질없던 것이었지. 언제나 어른스럽게 시설 선생님의 조력자가 되어 동생들을 챙기고, 학교를 떠나 방황하는 동기 친구들도 챙겨 우리에게 안부를 전해주고,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 선생님들께 내 어깨가 다 으쓱한 칭찬을 듣게 했던 은지... 그 시간들이 어찌나 대견하고 감사하던지, 종종 내가 어른인지 은지가 더 어른인지 항상 헷갈렸단다.
졸업하고도 은지는 계속해서 대단한 소식을 전해주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거하던 시설을 나와 서울로의 상경 소식을 전할 때, 간디학교 선생님의 시작을 알릴 때, 구청과 연계한 도시락 벤처 사장님의 변신을 들을 때, 은지의 이름이 떡하니 공동 저자로 적힌 책을 선물 받았을 때, 뉴스에서나 들을 수 있는 국회의원의 보좌진이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제나 이야기의 마무리는 그 모든 힘듦을 묻어두는 특유의 선한 웃음과 “잘 되겠죠” 하는 한마디였구나.
스스로의 일상을 책임지고 꾸려나가기도 힘들텐데, 주변을 살펴 다른 힘든 이의 비빌 언덕을 꿈꾸는 톡을 받고 미안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샘이 참 부끄러워지는 시간이었다. 그저 은지의 도전으로 생긴 인연들이 네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기만을 바랬는데, 첫 번째 레터를 읽으면서 은지의 주변에 은지를 아끼고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좋더라. 은지가 얼마나 진국인지 잘 아니까 이 모든 일련의 시간들이 은지를 더 단단하게 하고 더 따뜻한 온기로 은지의 주변을 밝히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학교 2학년 때 은지가 책상을 딛고 올라가서 창문을 닦다 넘어지는 일이 있었지. 급하게 달려간 정형외과에서 은지가 내민 의료보험증(그때는 병원가서 의료보험증을 제출하던 시절이라)을 받아 접수대에 제출하던 장면이 항상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이 옛날 사람이라 지금도 선생님이 가진 소망이 있어. 은지의 이름만 있어서 너무 속상했던 의료보험증의 그 여백에 은지의 소중한 가족 이름이 가득했으면 하는 주책없는 바램을 가져본단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해. 종종 소식 전해줘 - 은지의 중학교 1.2학년 담임선생님 조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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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 danmieunj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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