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리더십(ง •̀_•́)ง 첫 번째
  명심하십시오. 강한 ZA가 정의로운 ZA, 그것이 BUSHIDO 입니다.

  사무라이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정말 많다. 신물이 나게 많다. 사무라이 영화계의 ‘다이묘‘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명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 <거미의 성> 부터 양산형 저예산 찬바라까지… SAMURAI의 TAMASHI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소재다.

  그렇다면 사무라이의 매력이란 뭘까? 져야 할 때를 깨닫고 ’앗빠레‘하게 스러지는 비장미일까? 배를 갈라서라도 지키고싶은 명예와 신념 때문일까? 강자를 향한 본능적인 동경일까?

  글쎄.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장을 하나 써본다. 우리가 꿈꾸는 SAMURAI는 반쯤 허상이다. 오리엔탈리즘. 동양에 대한 외곡된 환상. 남성성에 대한 선망. 힘에 대한 갈망이 우리가 보는 SAMURAI들의 8할을 채우고 있다. SAMURAI는 사실상 옛 영광에 대한 노스텔지어에 가깝다. 오이는 거의 95%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실상 물이 아니냐는 조롱을 받고 있는데, 그렇다면 거의 80%가 구라와 ‘뽕’으로 이루어진 영화 속의 SAMURAI들도 사실상 개구라삥뽕이라고 조롱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서구는 다소 SAMURAI Leadership에 중독되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볼까. <라스트 사무라이>의 기자회견 현장은 일본의 ‘SAMURAI 스피릿’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오오, SAMURAI. 
오오, 신비로운 동양. 
오오, 약자를 보호하고 주군에게 충성!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숨겨진 죽음의 역사를 모른다. 동양의 신비와 무사의 ‘앗빠레한 비장미’ 속에 숨겨진 서민들의 삶, 투구도 깃발도 없는 아시가루들, 천수각처럼 드높은 남성성 뒤에 가려진 여자들. SAMURAI는 환상이다.

  하지만 물론 세상에는 SAMURAI가 아닌 ‘사무라이’를 보여주는 영화도 있다. 몰락해가는 무가, 공허한 제도와 그 사이에 끼어 죽어가는 약자들. 기원정사의 종소리와 제행무상의 울림.

  그래서 SAMURAI들 사이에 진짜 사무라이도 몇 편 끼워 보았다. 부디 여러 편의 SAMURAI 영화들 속에서 당신이 꿈꾸는 BUSHIDO를 찾을 수 있길…

  자, 그럼 키리스테고멘!
6현의 사무라이
Six-String Samurai

랜스 문기아ㅣ1998ㅣ91'ㅣ화요일 2시
7인의 사무라이

구로사와 아키라ㅣ1954ㅣ207'ㅣ화요일 5시
란
乱

구로사와 아키라ㅣ1985ㅣ162'ㅣ수요일 2시
목 (쿠비)
首

기타노 타케시ㅣ2023ㅣ131'ㅣ수요일 5시
6현의 사무라이
Six-String Samurai

랜스 문기아ㅣ1998ㅣ91'
10/27 화요일 2시
   다음 로큰롤 왕은 누가 될 것인가?

   소련이 미국을 점령한 지 40년. 황무지가 된 미국에서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하던 ‘로스트 베가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하고, 새로운 ‘로큰롤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기타를 맨 사무라이들이 베가스로 향하기 시작한다. 다 헤진 양복과 우산, 일본도와 1957년산 할로바디 6현 기타를 들고 다니는 ‘버디’ 역시 그중 하나. 그리고 버디는 긴 여정에서 그를 끈질기게 따라오는 아이, ‘키드’를 만난다.

  버디는 키드를 보호하려는 다정한 어른은 아니다. 따라오지 말라며 아이에게 겁을 주기도 하고, 아이를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사람도 아니다. 버디는 끝내 위험에 빠진 키드를 지나치지 못하고 목숨까지 바쳐 지키며, 키드와 함께 자신이 정한 ‘로큰롤 황제’가 되기 위한 길을 끝까지 나아간다. 버디의 신념은 선함이나 도덕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택한 길과 그 안에서 맺은 관계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 <6현의 사무라이>가 그리는, 버디의 ‘사무라이 마인드’다.

  한편, 그렇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던 버디 앞에 죽음의 사무라이, ‘데스’가 나타난다. 헤비메탈을 상징하는 데스와 버디는 일본도와 기타를 무기 삼아, 강렬한 음악과 함께 죽음의 결투를 벌인다. 버디는 치명상을 입고 키드를 지키다 죽음을 맞고, 키드는 데스의 약점을 찾아 그를 쓰러뜨린다.
 키드는 버디의 옷과 기타, 일본도, 그리고 그의 ‘길’까지 물려받는다. 버디의 뒤를 쫓기만 하던 아이는 이제 스스로 버디가 걸었던 길을 따라 로스트 베가스로 향한다. 버디가 남긴 말처럼, 버디가 걸었던 길을.

  Keep going, kid.
글쓴이 눙
7인의 사무라이

구로사와 아키라ㅣ1954ㅣ207'
10/27 화요일 5시
   전국시대 말기, 산기슭의 작은 농촌 마을은 매년 추수철이면 찾아와 곡식을 약탈해가는 도적떼의 위협에 시달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마을 사람들은 논의 끝에 사무라이를 고용해 마을을 지키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곤 밥 한 끼뿐인 가난한 농민들에게 선뜻 나서줄 사무라이는 없다. 그러던 중 늙은 사무라이 칸베에가 굶주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도둑으로 변장한 자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본 농민들은 그에게 마을을 지켜달라 간청한다. 칸베에는 처음엔 거절하지만, 결국 그들의 절박함에 마음이 움직여 마을을 위해 나서기로 하고, 자신과 뜻을 함께할 여섯 명의 사무라이를 하나둘 모은다. 침착한 부관 고로베에, 순박한 청년 카츠시로, 익살스러운 헤이하치, 검술의 달인 큐조, 오랜 벗 시치로지, 그리고 사무라이 흉내를 내는 농민 출신의 기쿠치요까지, 성격도 배경도 제각각인 일곱 명은 마을에 도착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도적떼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영화는 단순히 선한 사무라이와 악한 도적의 대결로 이야기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사무라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농민들의 모습, 자신들의 딸을 사무라이들로부터 숨기려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과거 사무라이들에게 착취당했던 농민들의 원한이 뒤늦게 터져 나오는 장면까지 가감 없이 담아낸다. 특히 기쿠치요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가장 복합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사무라이가 되기를 갈망하는 그는, 사무라이 계급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농민들에게도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경계인이다. 그러나 바로 그 경계에 선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사무라이와 농민 사이에 놓인 계급의 벽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영화 후반 두 집단 사이의 오해와 반목을 봉합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전투 자체보다도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의 디테일에 있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중 실제 전투 장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영화는 마을의 지형을 파악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적 과정,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에게 창 쓰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무라이와 농민 사이에 쌓여가는 신뢰와 균열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이러한 연출은 전쟁이라는 것이 결국 소수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라, 저마다의 두려움과 이해관계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사투임을 보여준다.

  쿠로사와 아키라는 이 영화에서 다이내믹한 텔레포토 렌즈 촬영과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활용한 편집으로, 이전까지의 일본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속도감과 사실성을 구현해냈다. 특히 진흙과 빗물 속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결전 장면은 전투의 낭만화를 철저히 배제한 채,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참혹하고 무질서한 것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이후 사무라이 영화라는 장르 자체의 문법을 새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라 작가주의적 성취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실 <7인의 사무라이> 이전까지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즉 '지다이게키(時代劇)'는 대체로 권선징악의 구도 속에서 사무라이의 충의와 검술을 낭만적으로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장르였다. 그러나 쿠로사와는 이 영화를 통해 사무라이라는 존재를 신화화된 영웅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존재 이유를 잃어가는 몰락한 계급으로 재해석한다. 영화의 마지막, 살아남은 사무라이 칸베에는 무덤가에 늘어선 죽은 동료들의 칼을 바라보며 "이번에도 우리가 진 것이다. 승리한 것은 저 농민들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 한마디는 사무라이 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을 정면으로 뒤집는 대사다.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사무라이들이지만, 그 싸움의 진짜 결실은 계속해서 땅을 일구며 살아갈 농민들의 몫이라는 것. 쿠로사와는 이를 통해 무사 계급의 헌신을 예찬하면서도 동시에 그 헌신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결국 소모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냉정하게 짚어낸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쿠로사와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라쇼몽>에서의 진실의 상대성에 대한 탐구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의 신분을 초월한 인간애에 대한 관심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는 언제나 장르의 표면적 쾌감 아래에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도덕적 모호함을 함께 심어두는 감독이었고,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러한 작가적 세계관이 액션 활극이라는 대중적 형식과 가장 완벽하게 결합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를 비롯한 수많은 서부극과 액션 영화들이 이 영화의 구조를 차용했다는 사실은, 쿠로사와가 단순히 하나의 걸작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집단이 힘을 합쳐 약자를 지킨다'는 서사 원형 자체를 만들어냈음을 방증한다.

  결국 <7인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 장르의 관습을 성실히 따르는 동시에 그 관습의 이면을 응시함으로써, 장르 영화이면서도 작가주의 영화로 남을 수 있었던 드문 사례다. 칼을 휘두르는 액션의 쾌감 이면에서, 이 영화는 계급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스러져가는 존재들에 대한 쿠로사와 특유의 씁쓸하고도 정직한 시선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글쓴이 martini
란
乱

구로사와 아키라ㅣ1985ㅣ162'
10/28 수요일 2시
   전국시대, 17세의 어린 장수 시절부터 수없는 학살과 토벌로 세 개의 성을 거느린 늙은 영주 히데토라는 어느 사냥터에서 문득 자신의 노쇠함을 깨닫고 가문의 실권을 장남 타로에게 물려주기로 선언한다. 차남 지로와 삼남 사부로에게는 각각 다른 성을 나누어 주고 형을 도와 셋이서 가문을 지탱하라 명하지만, 오직 사부로만이 아버지의 이 결정이 훗날 형제간의 분열을 부를 것이라 직언한다. 히데토라는 이를 불충으로 여겨 사부로를 추방하고, 그를 두둔한 충신 단고마저 함께 내쫓는다. 그러나 사부로의 예언은 곧 현실이 되고, 장남 타로는 자신의 가문을 멸족시킨 히데토라에 한을 품은 아내 카에데의 부추김을 받아 아버지의 실권마저 빼앗으려 한다. 이에 반발한 히데토라는 차남 지로의 성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도 비슷한 냉대와 배신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두 아들에게 모두 버림받고 자신의 군사들마저 잃은 히데토라는 평생을 바쳐 일궈 온 모든 것을 잃고 끝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채 폐허가 된 들판을 떠돌게 된다.

  영화는 이렇게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늙은 지배자가 자신이 평생 쌓아온 것들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파멸해가는 과정을 장대한 스케일로 담아낸다. 히데토라가 젊은 시절 무력으로 정복하며 무수한 피를 수반했던 과거는 이제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고스란히 되풀이되는데 이 되풀이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서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타로의 아내 카에데는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킨 히데토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략을 꾸미는 인물로 그녀의 복수는 이 비극이 히데토라 한 사람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쌓인 정복과 살육의 역사가 마침내 그 대가를 치르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광기에 빠진 히데토라 곁을 끝까지 지키는 광대 쿄아미와, 히데토라가 과거 눈을 멀게 하고 성을 불태운 원한을 지닌 채로도 끝내 그를 원망하지 못하는 츠루마루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이 비극에 어떤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묻는다는 데 있다. 쿄아미는 광대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몰락한 주군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으며 애도와 조롱을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광대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일본적인 정서를 표상한다. 츠루마루는 히데토라에게 성을 빼앗기고 눈까지 멀게 된 인물이지만, 정작 그는 그를 파멸시킨 히데토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매형이자 히데토라의 아들인 지로를 향해 총구를 겨눔으로써 이 영화가 그리는 복수와 원한의 구조의 순환성을 드러낸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영화에서 압도적인 색채 미학의 활용을 통해 전쟁과 파멸의 대서사시를 그려낸다. 세 아들의 군대를 각각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 깃발로 구분하고, 이들이 뒤엉켜 서로를 살육하는 성 함락 장면은 총성과 비명 대신 오직 음악만이 흐르는 무성에 가까운 연출로 그려진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폭력은 소리를 잃은 채 순수한 시각적 색채와 형체의 충돌로만 제시되는데, 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든다.

  특히 이 영화 전반에 짙게 깔린 불교적 세계관은 <란>을 단순한 셰익스피어 각색을 넘어선 구로사와 고유의 작품으로 만드는 지점이다. 히데토라가 마지막에 되찾은 정신으로 츠루마루를 만나 잠시나마 평온을 얻는 순간, 그를 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인간의 칼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에 가까운 사건이며, 마지막 장면에서 맹인 츠루마루가 벼랑 끝에 홀로 남아 우연히 부처상을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끝맺어진다.

  <란>은 한 가문의 몰락을 통해 권력과 폭력의 되풀이를 웅장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서구적 개인의 비극에 초점을 맞췄다면 구로사와는 여기에 윤회와 업(業)의 세계관을 덧입혀 이 파멸이 한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역사 전체가 짊어진 순환적 숙명임을 이야기한다.
글쓴이 martini
목 (쿠비)
首

기타노 타케시ㅣ2023ㅣ131'
10/28 수요일 5시
  전국시대,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킨 뒤 자취를 감춘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와 히데요시에게 아라키를 찾아낼 것을 명령하고, 무라시게의 행방을 둘러싼 추적은 곧 노부나가의 후계자, 나아가 일본의 천하를 다스릴 자리를 둘러싼 거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쿠비>는 ‘혼노지의 변’을 배경으로, 노부나가를 배신한 미츠히데, 그리고 천하를 차지하려는 히데요시의 욕망을 그려낸다.

  영화는 관객들이 갖고 있던 낭만화된, 영웅적 사무라이 이미지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노골적으로 권력욕과 목숨을 충성과 명예 위에 두고 살아가길 택한다. 서로의 목을 노리는 이들에게는 숭고한 사무라이 정신보다도 질투와 욕망, 비겁함이 먼저 작용한다. 
 영화는 노부나가와 모리 란마루, 미츠히데와 무라시게 등 여러 관계 속에서 성적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시 무사 계층에서 찾아볼 수 있던 남성 간 성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해 내면서도 그들의 관계를 숨기거나 숭고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권력과 질투가 뒤섞인 인간적인 관계로 비춰 낸다.

  결국 영화에서 사무라이는 칼을 휘두르는 강인한 남성도,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는 충신도 아닌, 그저 욕망과 권력에 침식된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사무라이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하여 사무라이에게 덧씌워진 환상을 과감하게 파괴해 낸다.

   한편, 영화에서 끝내 살아남아 천하를 향해 발을 뗀 히데요시는 불과 10여 년 뒤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묘사되는 그의 승리는 단순한 ‘천하통일’의 완성으로 바라볼 수 없다. 오히려 훗날 한반도까지 전쟁을 확장한 히데요시를 볼 때, 그의 승리는 오히려 끝없는 욕망의 시작이기도 하다.
글쓴이 눙
SAMURAI SEKAI..

   안녕하세요, <휴대-영화>의 라라입니다. 10월 27일과 28일의 상영정보와 페이퍼를 보내드립니다! 벌써 서늘한 10월 말이 되었네요. 온도 차이를 체감하고 계신가요?

   이번 주에는 '동탁' 씨께서 기획하신 사무라이 영화를 상영합니다. 칼을 든 무사와 그 시대의 풍경,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무라이 영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부터 조금은 낯선 이미지까지 함께 보려고 합니다.

  칼의 서늘한 긴장감이 넘치는 영화들을 만나보세요. 이번 주에도 시떼에서 뵙겠습니다!


이화 시네마떼끄 
이화여대 학생문화관 343호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