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좋은 등급의 배아를 선별해 시술했던 터라 평소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분명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괜찮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다름 아닌 ‘포도즙’ 때문이었다. 갑자기 웬 포도즙?!


시험관 시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 회사 선배가 포도즙을 선물해 주었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첫 아이를 준비하면서 직접 챙겨 먹었던 제품이라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격려의 말과 함께였다. 포도즙이 착상에 도움이 된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뭔들 못 먹겠는가. (게다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포도다.)

나는 냉장고 한켠에 포도즙을 줄 세워 놓고 이식 시술 이후 하루 하나씩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반찬을 주러 온 친정엄마가 냉장고 속 포도즙을 발견하곤 던진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었다.


“얘, 포도즙 당이 많아서 살쪄! 먹지 마!”


평생 딸의 몸무게에 예민했던 엄마를 뒀기에 이 정도 잔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앉은 자리에서 포도 한 송이를 먹을 정도로 포도를 좋아하는 나를 알기에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엄마에게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포도즙이 착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선배가 선물해 준 거야. 이식 후에만 챙겨 먹고 있으니까 걱정 마.”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가슴 한복판에서 ‘뚝’ 하고 뭔가 밧줄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서러웠다.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 포도즙을 먹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먹고 있는지 모르면서 자기 할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가 미웠다.

분에 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포도즙이 착상에 좋다고 해서 이식 후에만 챙겨 먹고 있단 말이야!!!!”


엄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엉엉 울었다.

순간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폭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한마디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쌓아 둔 초조와 실망,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이번 시술의 결과 때문에 나는 슬펐고 속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좌절하면 이번 시술 역시 완벽한 ‘실패’, ‘무쓸모’였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참 울고 나니 오히려 마음의 부담과 긴장이 되레 풀어졌다.


속이 시원했다. 감정의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건 폐허가 아니라 깔끔해진 마음이었다. 이렇게 한 번씩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의 눈물은 내가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을 해소하고 다시 나를 추스르게 해주는 시작이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고, 힘들면 힘든 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내가 잘 살아가기 위한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포도즙은 이후에도 잘 챙겨 먹고 있다. 언젠가 기쁨의 순간이 온다면 이 포도즙을 와인잔에 가득 따라 건배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난임 치료를 하면서 아쉬움이나 답답함, 서운함을 느꼈던 적이 있나요?

병원 내 의료진은 물론 가까운 지인이나 남편, 엄마, 직장동료, 친구가 내 마음 몰라줘서 감정이 북받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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