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속을, 분투하며 산책하기 : 도시와 SNS [11월의김스피]

인스피아 2024년 11월 마지막주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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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사람 : 김스피

받는 사람 : 연구자님

소음 속을, 분투하며 산책하기 : 도시와 SNS

[11월의 김스피]

서울에 첫눈이 내린 26일 밤, 한 시민이 세종대로 네거리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11월 레터의 비하인드 : 소음 속을, 분투하며 산책하기 : 도시와 SNS

>11월의 해찰 피드 : #도서관특별사면 #대학공동체

>11월의 김스피 책장 : 작은 책꽂이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어느덧 옷장 속 두꺼운 털옷을 챙겨입게 되는 11월입니다. 수능날까지만 해도 낮에는 겉옷을 벗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날이 춥지 않았지만, 금세 날이 추워졌습니다. 최근 폐렴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열심히 레터 마감을 하고 있던 26일 늦은 밤엔 서울에 첫 눈이 펑펑 쏟아졌는데요. 연구자님이 계신 곳에도 눈이 왔었는지 궁금합니다.

11월의 첫째주에는 ‘소음과 노이즈캔슬링’(링크), 셋째주에는 ‘수능과 가성비 평가’(링크)에 대해 다루어 보았습니다.

‘소음과 노이즈캔슬링’은 요즘 유행인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및 ASMR 등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 주위의 소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할까?를 고민해본 회차였고요. ‘수능과 가성비 평가’는 가성비라는 다소 독특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과연 평가에서 가성비만을 앞세워도 될지를 고민해본 편지였죠.

특히 이 중에서도 ‘소음과 노이즈캔슬링’ 회차는 저 역시 귀를 자주 막고서 생활했던 사람으로서는 반쯤은 궁금한 마음, 반쯤은 반성하는 마음으로 적어내려갔던 회차이기도 합니다. 소음이란 무엇인가? 과연 소음을 완전히 막아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등을 궁금해하면서요.

지난 레터를 쓴 것을 계기로 11월 한 달 간은 되도록이면 귀를 열고서,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린 걸음으로 걸어다녀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도시 산책’이 즐거울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고개를 젓게 됩니다.

한적한 시간의 공원이나 뒷뜰, 탁 트인 옥상 같은 곳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오늘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한복판을 즐겁고 고즈넉하게 거니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근처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라곤 대체로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오가는 소리, 경적 소리들 뿐이고요. 버스에서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광고가 흘러나오고, 풀벌레 우는 소리라도 듣고 싶으면 공원처럼 ‘초록이 모여있는 곳’을 굳이 찾아서 가야 합니다. 그런 공원에서 여러바퀴를 트랙을 돌고 오곤 하는 것을 오늘날의 도시민들은 주로 ‘산책’이라 부릅니다. (그나마 집 근처에 이런 장소라도 있다면 다행이긴 하죠)...

이렇게 적다보니 조금은 시무룩해지는데요. 그러고보면, 결국 도시 소음이란 산책과 떼어놓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귀를 열고 가만히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소음을 들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모든 소음을 없앨 수 있다면 좋은 산책, 좋은 도시에서의 삶이 가능할까요? 귀를 콱 막고 싶어지는 소음이란 무엇일까요? 소음을 모두 다 없애는 것은 가능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번 에세이 회차에서는 ‘산책’과 ‘소음’이라는 키워드로 해찰을 해볼까 합니다. 단순히 ‘거리를 걷는 것’을 넘어, 내게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 해찰까지 조금 더 뻗어나가보았습니다.

👤11월 레터의 비하인드 : 소음 속을, 분투하며 산책하기 : 도시와 SNS

질문 하나로 글을 시작해봅니다.

‘도시는 산책을 하기 좋은 장소일까요?’

(한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 거주하는) 저는 느리게 걷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도시 한복판에서 산책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는 않습니다. 시끄러운 곳에 가면 각종 소음 때문에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서게되기 때문인데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차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어슬렁대는 것은 민폐이기도,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유유자적 산과 들을 거닐며 새와 바람과 더불어 ‘산책의 즐거움’을 노래한 옛 시인, 작가들의 글을 볼 때마다 약간 샘이 나고 시무룩해지곤 했습니다. 저의 ‘산책’은 대체로 그렇게 우아한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난 레터를 보내드린 뒤,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1878~1956)가 자신의 산책을 다룬 에세이 <산책자>(링크)를 읽다보니 미묘한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의 ‘산책’은 속세를 벗어난 신선같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 대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처럼 소음과 난장판에 깜짝 놀라고 고개를 젓게되는 일들의 연속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제로 젊은 시기를 베를린 등 대도시에서 지내기도 했고요. 때로 그는 신경을 거스르는 도시 소음으로 인해 “차라리 귀를 막고 싶다!”며 소리치기도 했죠.(물론 그가 살던 당시엔 손가락으로 귀를 막는 방법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당대에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에게 사랑을 받고 이후 페터 한트케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작가 로베르트 발저(1878~1956)가 쓴 산책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은 책 <산책자>. 유머러스하고 소탈한 글들이 가득합니다만, 그의 '산책'은 결코 쾌적한 것들로만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 (왼쪽) 그는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심지어 죽는 순간에도 산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한겨레출판, Gais(1954)

그럼에도 발저는 평생 삶이 ‘쓰기’와 ‘걷기’로만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산책에 진심이었는데요. 왜 그는 엉망진창인 산책도 사랑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에겐 번잡함, 소음을 이겨내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소음을 이겨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산책을 통해 소음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웠고 - 그것이야말로 그의 ‘산책법’이자 살아가는 방법이었죠.

저는 이 책을 ‘소음’이라는 독특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읽어가다보니 흥미로운 지점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키워드를 꼽아보았습니다.

ㄱ. 소음으로부터의 해방? : 소음은 ‘현실’이다
ㄴ. ‘나’로 향하는 시선 : ‘나’도 현실의 일부다

ㄱ. 우선, 위에서도 짧게 언급했듯 -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은 대체로 ‘우아하고 고즈넉한 들판’을 걷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고요한 풍경을 걷는 장면도 나오지만, 그보다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만큼이나 시끄러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저자는 복작이는 도시에 살면서도 매일같이 산책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기는 19세기 말~ 20세기초였기 때문에 이미 커다란 마차와 함께 자동차가 큰 길을 빵빵거리며 어지럽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동주택에 모여 살며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는 떠들썩한 나날입니다.

이 때문에 발저가 아무리 관대하고 자유로운 산책자라곤 하지만, 이 책에는 여러차례 그가 분통을 터트리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두드리는 소리’를 중심으로 한 짧은 글이 인상적인데요. 저자는 어느날 하숙집에서 누워있다가 하숙집 주인이 양탄자를 팡팡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기분이 좋지 않아졌습니다.

어제와 그저께, 그그저께도 하숙집 여주인은 (양탄자를) 두들겨댔다. “왜 두드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두드리는 일은 참으로 즐겁다. 하지만 그걸 듣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 벽에 액자를 걸려면 먼저 못을 박아야 한다. 이때도 두드림이 발생한다.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건 당신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잖아요” “좋습니다. 그러면 끽소리 없이 짜증을 억눌러야 한단 말이군요.” “그게 뭐가 어때서요”

참으로 품위 있는 대화다. 그렇지 않은가? 탁탁! 탁탁! 귀를 틀어막고만 싶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이하 동일)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마치 요즘도 문제가 되는 층간소음 문제가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로베르트 발저는 실제로 저택에서 우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거의 아무런 짐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대도시의 하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기에 그의 실제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글이겠죠.

하지만 제가 이 에피소드를 인상적으로 읽은 이유는, 이 글에서 저자의 이야기는 단지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기 때문에 진절머리가 난다!” 에서만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짤막한 글에서 ‘두드림’을 단지 남이 내는 불쾌한 소음으로만 바라보기보단,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게 되는 소란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들은 존재하는 한(?) 양탄자나 옷이나 침구류의 먼지를 두드려 털어야 합니다. 못을 박기 위해서는 벽을 두드려야 하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두드림’은 때론 어떤 사람에 대한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나와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는 어느정도는 침범이자 폭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쉽고 당연하게도 두드리는 소리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어느정도 불퉁해진 채로 체념을 하며 글을 끝맺죠. 약간 비꼬긴 하지만요.

옷이나 매트리스도 두드려야 한다. 그러니 현대 도시는 사방에서 두드리는 소리 천지이다. 불가피한 것에 화를 낸다면, 그가 천치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마음껏 편하게 두드리시죠.” “뭐에요, 그 말은. 비꼬는 거에요?” “맞습니다. 약간은요.”

어쩌면 소음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긍정적이지도 않은 일일지 모릅니다.

저자는 어느날 고즈넉하게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산책하던 중, 갑자기 분주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무리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 방해꾼, 불청객들을 향해 “조용히 좀 하라구요!” 소리치는 대신 다르게 생각하죠.

이곳, 이 순간은 ‘소음까지 포함하여’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고, 완벽하게 현실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나만의 무소음 유토피아’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요. 저자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요.1)

‘한밤에 울리는 소야곡(小夜曲, 세레나데)에 취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한밤이 아니고 기사들이 활약하던 중세도, 그렇다고 15세기나 17세기도 아니며 햇빛이 환한 평일 어느 날이고, 한무더기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껏 내가 만나보았던 그 무엇보다 무례하고 거칠며 퉁명스러운, 기사도 정신이라고는 없는 자동차들과 더불어 학술적이고 낭만적인 내 관찰의 충만함을 무척이나 방해하고 있었고, 성을 노래하는 시와 중세의 몽상을 내게서 간단하게 앗아가버렸기에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섬세한 조사 작업을 하기가 너무도 힘이 드는구나. 거칠고 무례하게 방해를 해대니 차분하게 정신을 집중하고 생각에 잠길 수가 없군 [...]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살아가는 한, 반드시 자기 몫의 소란을 부리고 자기 몫의 소음을 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란, 소음이 항상 불쾌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즐거운 소리와 소음의 경계는 굉장히 모호합니다. 발저는 한 작가(클라이스트)의 시선을 빌어 시골 마을 시끌벅적한 장날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푸른 앞치마와 농부 아낙네들의 의상이 온갖 것들과 함께 길거리와 골목길을 가득 메우는 장날도 좋아한다 […] 클라이스트는 각양각색의 유쾌한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며 돌아다닌다 [...] 사람들의 체취가 옷을 뚫고 풍겨나온다. 여관 겸 식당에서는 춤추고 먹고 마시는 소음이 흘러나온다. 자유를 만끽하는 그 소음과 소리들! 종종 마차가 통과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말들은 물건을 거래하고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번득이는 햇살은 온갖 물건들과 얼굴과 수건과 바구니, 그리고 상품들 위를 정통으로 비춘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으니, 태양 광선의 번득임 또한 당연하게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클라이스트는 기도하고 싶다. 그는 이런 인간들의 왕성한 활동이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우며 그 어떤 영혼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ㄴ. #‘나’로 향하는 시선

로베르트 발저는 소음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소음과 함께 사는 쪽을 택했죠. 그것이 내가 타인과 함께 복작대며 살아가는 시대이자 공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소음은 ‘극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지난 레터에서도 짧게 소개했었습니다만, 과거 19세기 중후반 대도시에 살았던 대부분의 유명한 작가, 학자 등 엘리트들은 소음에 진절머리를 내며 떠돌이 악사의 연주, 마차 소음, 구걸 소리 등 모든 거리 소음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했습니다. 쇼펜하우어 역시 거리의 마부 채찍 소리 등을 치가 떨릴 정도로 증오했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죠. 이렇게 보면, 오히려 소음에 대한 로베르트 발저같은 반응 쪽이 굉장히 드문 편이겠죠.

발저는 산책을 다니며 온갖 시끄러운 소리에 맞닥뜨리지만 그런 시끄러운 소리를 그냥 집 안의 먼지를 쓸어 날려버리듯 ‘청소’해버리거나, 소음이 있는 곳에서 단순히 도피하지 않습니다.

‘산책자’로서 그는 아무곳이나 들르고, 해찰하며, 아무 소리를 듣고, 좋은 소리에는 기분이 좋아 하면서도 나쁜 소리에는 잠깐 기분이 상하더라도 곧 거기서 무언가 얻을 만한 생각을 얻어내거나 혹은 생각을 전환하죠.

도대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역시 때론 소음을 내는 시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나도 소음을 내니까 다른 사람들의 소음도 억지로 감내한다기보다는, 나와 타인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죠. 남이 만드는 것이 소음이라면, 나 역시 소음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내가 남을 비판을 한다면, 나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 소란을 피우는 사람에게는 소란이 흥겨운 일이다. 나도 경험이 있어서 잘 안다. 야단법석을 피우고 있으면 자신이 뭔가 썩 대담한 일을 하는 것만 같다.

* 번쩍이는 황금색 활자 간판을 내건 빵집 앞에 도달하게 된다 [...] 내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이란 말인가, 진실한 인간이 야만적으로 번쩍거리는 회사 간판을 눈앞에서 봐야 한다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연풍경에 이기심과 탐욕, 완전히 발가벗은 영혼의 야비함을 저토록 비참하게 새겨 넣어야 한단 말인가 [...]”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즉시, 신사다운 모습과 품위있는 언행에 부합하도록 […]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다 […] 타인을 가차없이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은 소중하게 감싸고 관대한 취급을 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비판자는 진정한 비판자라고 할 수 없으므로 작가는 글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뒤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소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부으면서도 갑자기 ‘태세전환’을 해서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인상적인 대목이라 함께 옮겨보았는데요.2)

야멸찬 반박이 고스란히 상대만을 향할 수는 없는 이유는, 자신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비록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요란하게 굴진 않을지라도, 다른 어떤 측면에서는 남에게 불완전한 존재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존재는 가끔 산책을 하고, 소음을 내고, 소음을 듣게 됩니다.

즉,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는 자주 소음 등으로 인해 난감하고 분통이 터지는 상황에 직면하지만, 언제나 필요 이상의 증오와 분노로 자신의 산책을 망치지 않는데 - 그 이유는

1.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좋은 시절이나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꿈꾸며 도피하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 조차도 현실을 구성하는 한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2.자신 역시 그 현실의 일부이므로 어떤 것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반드시 자신 역시 비판의 대상에 놓아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발저의 ‘산책자 정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 내내 제가 떨치기 어려웠던 해찰의 잔가지 하나를 따라 생각을 조금 더 뻗어나가 봅니다.

과연 이런 산책자 정신은 문자 그대로의 ‘걷는 산책’에만 해당되는 얘길까요?

저는 어쩌면 우리가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SNS의 글들을 살펴보는 행동에도 역시 발저의 ‘산책자 정신’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늘날의 산책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실제 공간에 대한 산책 말고도 ‘디지털 공간’ 속에서의 산책 역시 빼놓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실제로 디지털 매체에 친숙한 세대일 수록 현실에서 소통하는 것만큼이나 커뮤니티, SNS 등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내고 댓글 등을 통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작가들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SNS를 살펴보는 것을 ‘시간 낭비’라며, ‘ 우리를 멍청하게 만드는 집중력 분산 기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분연히 주장합니다. 실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SNS 피드에는 혐오와 증오, 나쁜 소식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에는 SNS에건 현실에건 ‘소음’이 너무 가득하기 때문에 이런 소음들을 사라지게 하고 나의 세계를 ‘좋은 것’의 울타리 안에만 가두어 놓으면 되는 일일까요? 이 모든 것은 탐욕스러운 SNS 알고리즘의 문제이기만 한 걸까요? 그것들을 없애면 우리 시대는 ‘소음’에서 벗어나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집중하며 살 수 있는 걸까요? 애초에 무엇을 위한 집중일까요? 어디까지가 소음이고 어디까지는 소음이 아닐까요? 또한, 당연하게도 SNS 피드에 혐오와 증오만 범벅인 것도 아닙니다.

부정적인 소식으로 가득한 SNS 피드를 끝없이 멍하니 내리면서도 이를 그만두지 못하는 행동을 ‘둠스크롤링Doomscrolling’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분명 더 나은 방식으로 시스템을 조정할 필요는 있겠지만, 테크기업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습니다. (왼쪽)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모나 숄레는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Chez soi: Une odyssee de l'espace domestique>에서 SNS피드를 바라보는 것을 '산책'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불쾌한 것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의 자아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도구라는 거죠. / Gettyimage, Amazon

프랑스 저널리스트 모나 숄레는 ‘사적 공간’에 대해 쓴 에세이에서, SNS 피드를 둘러보는 것을 산책에 비유하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내 세계’를 확장하는 수단으로서요.

나아가 그는, ‘모든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집중(↔도둑맞은 집중력)’에 대한 오늘날의 환상을 지적하기도 하죠.

언제나 똑같은 몇몇 사이트에서 매번 똑같이 단순한 산책으로 만족하던 시절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 소셜 네트워크가 시간 낭비거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짓이라고 선언하며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종종 '흥미로운 것들'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내가 저항하기를 그만두는 순간부터,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인터넷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것들과 내가 하는 작업(글쓰기) 사이에 놀라운 공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 겉보기엔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던 청소년 시절의 내 방에도 이미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내가 읽던 책과 잡지, 내가 주고받던 편지 속에도 있었다 [...] 어쩌면 웹 2.0은 단지 이런 존재를 강화한 것이 아닐까?

-모나 숄레,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링크)

과연 역사적으로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시대가 있었을까요?

심지어 발저의 시대를 비롯해, 과거 어떤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지나치게 부박하고 소음이 가득한 진절머리나는 곳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정말로 저는 SNS에서 벗어나 ‘엄선된, 좋은 것’들만 보면 되는 걸까요?

로베르트 발저는 가끔 소음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자신을 닦아세우는 한 인물에게 - 자신에게 있어 산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 길게 말합니다.

“산책은 […]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 침울하게 움츠러들고 푹 꺾인 채로 있지 말고 눈을 활짝 열고 응시하기만 하면 그는 오감으로 이것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 산책자는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생명체라도 어린아이나 개, 모기, 나비, 참새 […] 누군가가 구겨서 던져버린 너절한 종잇조각조차도, […]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 최대한의 사랑과 주의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남루한 것, 가장 진지한 것과 가장 유쾌한 것, 산책자에게는 이 모두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끌리며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

이기심을 버리고 세심한 시선으로 사방 모든 곳을 둘러보고 살펴야 합니다 [...] 매 순간 그는 동정과 공감과 감동의 감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바라건대 그것을 느낍니다. 그는 뜨겁게 열광할 줄 알아야 하고, 한없이 깊은 곳에 숨겨진 한없이 작은 일상의 사건에도 푹 빠져서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하며, 추측컨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물론 오늘날의 SNS에서 빅테크 기업의 편향적 알고리즘, 중독성 디자인 등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맞습니다. 장애물로 가득하고 다양성이 사라진 도시를 걷는 것도 분명 시무룩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산책지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를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는 발저의 ‘산책자 정신’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요?

발저의 책에서도 알 수 있듯, 좋은 것을 향유하는 것만이 산책이 아닙니다.

저는 나쁜 소식들을 볼 때마다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며 소리를 지르고 ‘즐겁고 귀여운 소식’만 바라보고 싶지만, 어찌됐든 간에 저 역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현실엔 당연히 좋은 것도 있지만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저열하고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도 많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꿈꾸기보다는 현실에 기반해 모든 것을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 역시 현실의 구성 요소 중 하나기 때문이죠. 그리고 대체로 처음엔 ‘싫고 끔찍하게만’ 여겨졌던 소음 역시 찬찬히 관찰하고 듣다보면 소음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 친숙하지 않은 것을 소음으로 여기는 경향이 큽니다.

또한,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맹렬하게 상대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의 강도만큼이나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동등하게 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ㅡ

일반적으로 언론, 학자들은 ‘필터버블*’의 문제를 일부 바보 사람들의 것으로 한사코 치부해오고 있지만, ‘소음’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는 것은 과연 일부 극단적이고 어리석은 사람들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필터버블(filter bubble) : 팔로우·알고리즘 등의 영향으로 어떤 사람이 좋아할 법한, 찬성할 법한 게시물만 접하는 현상

그리고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 소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것을 듣지 않고서도 평온하게 살 수 있거나 이를 규제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엘리트, 권력자들이었습니다.3)

<사운드스케이프>를 쓴 작곡가, 음악학자 머레이 쉐이퍼는 소음noise이란 “듣지 않도록 배운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산책자에게 있어서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발저는 자신의 이기심과 편견을 버리고, 어떤 소리든 가능한 한 온전히 듣고 해찰하도록 노력하고, 또 곰곰 생각합니다. 산책을 통해 사려깊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넓혀갑니다.

어쩌면 오늘날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구호나 규탄보다도 더 많은 산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 이렇게 평정을 깬 소음에 대한 분노로부터 벗어나 비장하게 마음을 다잡은 발저는, 느닷없이 불과 두 문장 다음에 갑자기 길거리에 누워있던 새카만 털을 가진 강아지에게 진지하고 긴 대화를 시도합니다(!). 검은 강아지는 눈을 꿈벅꿈벅하며 한참동안 (당연하게도)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잠자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개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을 통해, 소음으로 인해 고즈넉한 연구와 성찰의 시간을 침해받은 데에서 온 약간 남은 마음의 앙금은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은 많은 불행은, 그 순간 즉시 관심을 돌릴 만한 다른 것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견디기 용이해지는 측면도 있죠.

2) <산책자>에서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이 한참 화를 내다가도 이후 곧 자신의 분노를 후회하고 반성하는 대목이 몇번 등장합니다.

3) 관련해서 더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지난 레터의 챕터2를 참고해주세요.(링크)

👤11월의 해찰 피드 : #도서관특별사면 #대학공동체

11월 한 달간 SNS에서 특별히 이슈가 되었던 기사, 이슈가 된 사건 등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좋은 칼럼 등을 소개합니다.

#도서관특별사면

지난 21일 서울도서관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연체자 특별사면’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책을 연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달 10일까지 책을 반납하면 패널티를 없애준다는 건데요. 많은 언론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사람들을 다시 도서관으로 끌어올 수 있는 기회라는 거죠.(링크) 저도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뒤집어 '연체 패널티'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패널티는 필요합니다. 모두가 책을 빌려서 '자기것'처럼 오래 반납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빌리지 못할테니까요. 하지만 현재 공공도서관 연체 패널티는 크게 두가지(①대출중지 ②연체료)인데 이중 연체일자만큼 대출 중지 기간을 두는 방식이 더 일반적이고, 서울도서관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책에의 접근을 막는 '대출중지'는 과연 좋은 패널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기회에 관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만한 기사들을 모아봤습니다.

연체료or대출중지? 상상력을 발휘하라

독서 시간: 약 6분 / 글자수 : 약 3800자

👤글 속 한문장

“필자가 직접 서울시 소재 공공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모두 190곳(2021년 말 현재)을 조사해봤다. 공공도서관 중 연체료를 받는 곳은 전체의 22% 정도다. 이곳도 무조건 연체료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출정지가 원칙이나 제한 조치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부득이하게 연체료를 선택하는 경우다...미국은 3월 첫째 주를 '대출도서 반납주간'으로 정하고 도서를 제때 반납하도록 독려한다. 이 주간은 1953년 캘리포니아 세인트메리병원 사서였던 한 수녀의 일화에서 비롯됐다. 그는 나중에 유명해진 제자에게 도서관 이용자들이 빌려간 책을 늦게라도 반납해 다른 사람도 독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홍보해 달라는 청탁을 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이용훈 도서관사연구회장의 도서관 연체료 관련 칼럼입니다. 필자는 직접 서울 시내 공공도서관들의 연체 패널티 산정 방식을 조사했고, 해외 사례 등을 감안해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하면 도서 장기 연체를 방지하고, 도서관 입장에서도 수월하게 도서를 관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마일리지'라든지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을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물론 기본적으로 공공 도서관의 도서 접근성은 평등해야 하지만, 이용자나 도서관에 최소한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기 반납을 독려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현재 일부 도서관들은 우수이용자들에게 대출 권수를 늘려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양이사진 주면 연체 풀어드립니다

독서 시간: 약 3분 / 글자수 : 약 1600자

👤글 속 한문장

“미국의 한 도서관이 책이나 물품을 분실·훼손한 이용자들에게 고양이 사진이나 그림을 제출하면 도서관 이용카드를 되살려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호응을 얻고 있다[...]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며칠 만에 수백 권의 책을 반납한 사실과 도서관 한 쪽에 마련된 게시판이 이들이 제출한 고양이 사진으로 가득 찬 상황을 전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올해 3월 미국 우스터공립도서관에서 한달 간 고양이 사진을 도서관에 가져오면 연체 패널티를 없애주는 이벤트를 진행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도서관 측에서도 얼마나 참여가 많을까 반신반의했지만, 프로그램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약 400명의 이용자가 고양이 사진을 가져와 연체 패널티에서 벗어났다고 하죠.

도서관이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계기는, 그간 코로나로 인해 주거지가 바뀌거나 생활에 변화가 생기면서 경황이 없어 책을 반납하지 못하게 되어 도서관을 오랫동안 이용하지 못하게 된 이용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는데요. 그렇다면 집에 고양이가 없는 이용자는 아무런 혜택도 못받는 걸까요? 꼭 자기집 고양이가 아니어도 된다고 하는데요. 도서관 관계자에 따르면 “책을 반납하지 못한 7살짜리 이용자는 크레용으로 직접 그린 고양이 그림을 제출한 뒤 도서관 카드를 재활성화했다“고 합니다.

120년만에 반납된 책, “잘 보관됐다”

독서 시간: 약 3분 / 글자수 : 약 1300자

👤글 속 한문장

“뉴베드퍼드 공립 도서관 관장인 올리비아 멜로는 “이 책은 우리가 돌려받은 책 중 가장 오래 연체된 책”이라고 말했다. “상태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책을 좋은 책장에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고 아마 가족에게 물려주었을 것" [...] 도서관장 멜로는 종이책의 가치에 대해 강조했다. “이 책을 손에 쥐고 있으면 120년 전에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책은 100년 후에도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디지털이 아닌) 인쇄된 책은 언제나 가치 있을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1881년 출판되고, 1900년대 초반 대출된 책이 약 120년만에 도서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락 맥스웰이 쓴 <전기에 관한 기초 논문>인데요. 이 책은 한 대학 도서관 사서가 기증받은 책을 분류하던 중 발견했다고 합니다.
단순계산한 이 책의 연체료는 약 275만원이지만, 연체료 한도가 2달러(2600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 돈을 물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검색하다보면 이처럼 약 1세기를 두고 반납된 책들이 꽤 많은데요(링크). 대체로 서가에 섞여있다가 기증하는 과정에서 도서관책이 '발견'되는 경우입니다. 서가의 주인도 깜빡 잊었던 걸까요?

그나저나 도서관장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인상적입니다. 지금 제 책상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물건들 가운데(오렌지주스팩, 노트북, 양철통, 연필...), 120년 후에 후손 중 누군가의 관심을 한 시간 이상 끌만한 물건은 책 말고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뉴욕도서관엔 연체료가 없다?

독서 시간: 약 3분 / 글자수 : 약 1100자

👤글 속 한문장

“미국에 체류하면서 감탄하는 것 중 하나가 공공 도서관 시스템이다[...] 대출 권수가 한때 78권에 달한 적도 있다. 엄청난 책 물량뿐만 아니라 또 독특한 점은 뉴욕도서관엔 연체료가 없다는 것이다 [...] 뉴요커들의 도서관 사랑은 유별나다. 뉴욕시가 세수 부족으로 도서관 관련 예산을 축소하는데도 유명 건축가들이 동원된 도서관 신축·개축이 이어진다. 도서관 리노베이션 계획이 나오면 민간에서 후원금이 수백만달러씩 쏟아지기 때문이다. 최근 브루클린 어린이 도서관에 후원금을 낸 한 60대 독지가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가난하게 컸다. 그런데 도서관에만 가면 부자처럼 책을 쌓아놓고 읽으며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뉴욕도서관은 과거엔 쭉 연체 도서에 대한 연체료를 받아왔는데요. 지난 2021년 5월부터 연체료를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링크)
연구 결과 도서관의 연체료 시스템이 학생들에게 책임과 윤리를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도서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뉴욕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점차 도서관 연체에 대한 패널티를 없애거나 문턱을 낮추는 방법을 고민, 실현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한 추가 재원 마련 방안 등 역시 고려해야겠죠.

#대학공동체

대학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공동체’일까요? 아니면 가게처럼 단지 수업과 졸업장이라는 상품을 사고 파는 ‘상점’같은 곳일까요? 대학이 운영, 교육과 관련된 어떤 중대한 방침을 바꿀 때 학생 등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렴해야 할까요? 애초에, 대학이란 무엇일(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이런 새삼스런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향후 최소 수십년 간 우리가 이 질문을 상상치도 못한 맥락과 계기 속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 및 현실 변화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큰 변화를 앞두고 있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계속 중요한 질문에 제대로 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학전환’ 대학의 비민주적 의사 결정

독서 시간: 약 6분 / 글자수 : 약 2500자

👤글 속 한문장

“(이번) 사태는 일부 교수님들이 수업 시간에 ‘내년부터 남학생들 들어온다더라’라고 얘기한 것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여자대학이 공학으로 바뀐다는 것은 매우 큰 학사 개편이다. 학교는 이를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입장 표명 요구에도 침묵했다. 대학 본부의 비민주적인 태도에 그간 누적됐던 분노가 터진 것이다. 지난해 학생이 교내에서 사고로 사망했을 때에도 학교가 흐지부지 넘어가 분노가 쌓였다. 무전공 입학이나 단과대학 신설 같은 학제 개편도 학생회에 일방 통보한 후 진행돼 불만이 누적돼왔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동덕여대 남녀공학 전환 건과 관련하여 현재 대부분 SNS 상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극단적인 루머, 인신공격 등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안의 초점을 대학의 결정 과정에서 과연 학생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소통의 주체'로서 어디까지 참여할 수 있으며 의견을 낼 수 있는지에 맞춰본다면, 당사자인 학생들조차 풍문으로 학교의 큰 결정을 알게 된 상황은 문제적입니다.

앞으로 학령인구 급감 등의 상황으로 인해 대학의 학과 폐지(링크), 통폐합 및 대학 간 통폐합, 변동 등은 일상처럼 일어날텐데(이미 진행 중인데) 과연 그 때마다 당사자인 학생들은 그저 등록금을 내고 '소비자'로서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가 학교 측의 결정에도 아무런 의견을 내지 못한 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를 바닥부터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윱니다.

인문사회 학술 생태계의 미래

독서 시간: 약 20분 / 글자수 : 약 25000자

👤글 속 한문장

“문제는 대학을 출세용으로만, 또 이런 지식 생산자들의 교육 과정을 학벌을 재생산하거나 아니면 계층상승을 하는 용도로만 생각하다보니, 이들에게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부여할 것인지, 즉 이 사회에 적절히 배치하는 과제가 완전히 실패해왔다는 거죠.
저는 대학에 와서 이 대학이라는 곳은 뭔가 중산층 이상을 위한 공간이라고 느꼈어요. 일단 노동이 다 망가져 있어요. 이 안에서 제대로 된 처우를 받으면서 노동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학원에서 일한다고 해도 이런 일은 내가 부모의 집에서 지원받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할 수 있는 노동인 거예요...부모의 지원이 있어야만 최종적으로 학벌을 획득할 수 있는 거죠.“

👤김스피의 블라블라

대학(원)은 가르치는 곳이면서도 연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곳이죠. 그리고 이 지식은 꼭 반드시 뾰족한 쓸모가 있거나, 돈을 버는 데는 당장 도움이 되진 않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제는 '지식'의 문제 뿐 아니라 당사자로서의 노동 등의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대학: 담론과 쟁점> 13호에 실렸던 글로, 공개 후 SNS 등에서 공유가 되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젊은 인문사회분야 문화연구자, 학자들이 오늘날 학술 생태계로서의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해 고민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11월의 김스피 책장 : 작은 책꽂이

매달 마지막주 레터에 한 달 간 출간된 신간 위주로, 제가 주목해 작은 책꽂이에 꽂아둔 책들을 간단히 소개해보려 합니다. 언젠가는 인스피아 레터에서 다루게 될지도요. 다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일부만 읽은 책들도 있습니다.
괄호 안에는 온라인 서점으로 연결되는 링크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류하경, <불온한 공익>, 한겨레출판사, 2024 (링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류하경 변호사가 쓴 책입니다. 왜 어떤 종류의 사익은 의심 없이 '공익'이라 불리고, 어떤 종류의 사익은 과격한 '떼쓰기'라든지 '밥그릇 싸움'이라고 불릴까요? 공익과 사익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군가가 공익이니까 모두가 지켜야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진짜로 공익일까요? 저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공익/사익'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볼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제임스 데이비스, 이승연 옮김, <정신병을 팝니다>, 사월의책, 2024 (링크)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달린 책입니다. 오늘날 정신의학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고, 수많은 담론들이 등장하고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지만 어째서 우리는 나날이 더 병들어갈까요? 과연 이런 '진단'과 '복용' - '개인적인 해결'로 '정신병'은 치유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어떤 접근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더 악화시키는 게 아닐까요?...이런 질문들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책입니다.

📚록산 게이, 최리외 옮김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4 (링크)

-이 책의 영어 원제는 간결하고도 묵직한, ‘Opinion’입니다. 사회의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앞장서서 가장 날카로운 말로 비판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칼럼니스트가 10년 간 쓴 칼럼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의 서문을 읽고서는 뒷장을 넘겨가며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한 사람이 절박하게 써내려간 ‘Opinion’은 단순히 지면을 메우는 역할이 아니라 그 시대를 추동하고 증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일란 파페, 유강은 옮김,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교유서가, 2024 (링크)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온 대표적인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책입니다.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종족 청소'라는 시각으로 파헤친 역사서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맥락을 바라볼 수 있는 책입니다. (※<팔레스타인 비극사>,2017,열린책들의 재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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