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평소 일기를 쓰시나요? 저는 요즘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책에 대한 단평을 적는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매일 꾸준히 쓰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많은 날일수록 일기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각들을 일기장에 옮기면 그 생각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거든요. 제가 일기를 쓸 때 느끼는 만족감은 하루 24시간 중 내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만을 '선별'하여 기록한다는 통제감과 그러한 선별 과정에서 느끼는 약간의 장악력에서 오는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한 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체험이고, 이것을 설명하거나 잊기 위해(또는 기억하기 위해) 탈각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라는 전능감에서 오는 만족감이죠. 

   새해 계획을 세우며 '일기 쓰기'를 목표로 삼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일기'와 관련된 두 책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한 권은 '일기'에 대한 다채로운 철학이 담긴 세라 망구소의 책 『망각 일기』, 다른 한 권은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들고 책 앞에 섰던" 장일호 기자의 『슬픔의 방문』입니다. 

   오늘 레터 하단에는 『여자를 돕는 여자들』 도서 증정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어요. 평소 한국일보 이혜미 기자의 '허스펙티브' 뉴스레터 등 다양한 활동을 응원하고 계셨던 분이나 '인터뷰'라는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 등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이런 것들이 내 최초의 기억이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내 삶에 대한 기록인 만큼 당연히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하며, 어쩌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세라 망구소가 《더 화이트 리뷰》와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지난날의 스케치』 중 한 대목

   소설가 줌파 라히리가 "오늘날 영미 문단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작가"로 극찬한 세라 망구소의 책이 한국에 번역·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요. 이번에 한국에서 번역된 두 권의 책은 "시간과 기억의 유한함을 인지하고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실험한" 『300개의 단상』과 『망각 일기』입니다.

   그 중 오늘 소개할 『망각 일기』는 세라 망구소가 일기에 관한 생각을 담은 책으로, "단일 항목으로서의 일기, 산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거대한 한 항목으로서의 일기"에 관해 쓴 작품입니다.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매 순간이 너무나 감당하기 벅차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다. (...) 오늘이라는 시간은 몹시 벅차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이 아니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이 없다면 나는 오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하루하루 사이에 여분의 하루하루가, 완충 역할을 하는 하루하루가 필요하다.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목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15-16, 『망각 일기』

   책의 중반까지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잊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망구소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강박에 가까운 '일기 쓰기'는 그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뭔가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을 막기 위해 동원한 방어기제"이자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맹렬하게 붙드는 과정은 잊고 싶은 기억을 밀어내는 데에도 효과적이었으므로, 망구소에게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그 일이 전부였다는 확신을 품고 싶다." - p.25, 『망각 일기』

   이렇게 기록을 통한 기억의 편집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던 그에게도 새로운 챕터가 찾아 오는데요. 바로 아이를 만나게 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간은 필멸과 결부되었다. 나는 계속 일기를 썼지만,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우려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 p.57, 『망각 일기』

   저자는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작은 숟가락으로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순간마다 자신의 뇌가 전언어적 기억(언어로 서술할 수 있는 '명시적 기억'이 형성되기 이전의 생의 초기 기억)을 저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여태까지 그에게 '기억'이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잊을지' 솎아내는 작업이었고 그 작업을 언어화 과정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이가 촉발하는 기억들로 인해 그의 믿음이 깨진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기억'만이 삶의 총체가 아니며, 언어로 붙들지 못한 시간들, 그러니까 '망각'으로 인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오히려 내가 살아있음을 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버지니아 울프의 대목을 인용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아이를 만나기 전 늘 "이렇게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자 애썼던 그가 "망각이 내가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 대가임을, 시간에 무심한 어떤 힘의 영향임을 이해하게"되었고,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역시도 중요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일테니까요.

   세라 망구소의 책을 읽으며,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간을 남기고, 어떤 시간을 잊고 싶어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내가 기억하는 순간들보다 내 삶에 더 묵직한 영향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으로 말이죠.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 p.10, 『슬픔의 방문』

   『슬픔의 방문』은 <시사IN>의 기자 장일호가 자신의 경험을 책에 포개어 써 내려간 에세이집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일기'라는 키워드로 분류한 까닭은, 이 책이 저자 본인의 기억을 펼쳐 놓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서 경험을 토대로 그 기억에 새로운 '해석'을 붙이는 과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일기란 단순히 시간과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장르이니까요.

   소설부터 사회과학서, 철학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독파하며 얻은 지혜는 저자의 삶 구석구석에 녹아 있습니다. 그는 책 속 단어와 문장, 문제의식들을 토대로 자신과 타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비하고, 희망을 떠올립니다. 

"대런 맥가비는 《가난 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바랐듯 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 p.76, 『슬픔의 방문』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책 속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이냐'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혁명은 우리 평생에 없을 것'이라는 말에 하이라이트를 주며 무기력을 느낄 수도 있겠죠. 그에 반해 정일호 기자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몰고 오는 일시적이고 폭발적인 사건이 아닌, 뭉근하고 끈질긴 여정으로서 삶을 인식하며 밑줄을 긋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좋은 저널리즘을 해내기 위한 그의 노력과도 이어집니다. "다름을 이야기하되 또 이해하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며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저는 왠지 자세를 고쳐 앉고 무언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을 믿었던 장일호 기자처럼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어떤 가능성을 믿어보자는 막연하고 끈질긴 희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 김소연, <너를 이루는 말들> 부분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 p.165, 『슬픔의 방문』
✍️ 1월, 들불에서 저자와 함께 하는 '읽기+쓰기' 프로그램을 온라인/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합니다. 각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는 아래 이미지 하단의 링크 또는 들불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이주혜 작가의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는 책의 2부에서 앞서 소개한 장일호 기자의 책처럼 다른 작가의 글을 통해 삶의 실마리를 얻고 희망을 발견하는 내용을, 『돌봄과 작업』에는 『망각 일기』의 세라 망구소가 그랬듯 아이를 만나고 양육하며 새로운 삶의 챕터를 맞이한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일과 작업에 대한 창조성과 지속성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분투해야 했던 여성들의 노력을 담고 있어요. 사정상 글쓰기 워크숍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께도 두 권의 책 모두 앞서 소개한 책들과 함께 읽어보시길 적극 추천 드립니다 😊
✍️ 작업책방 씀과 함께 하는 1월의 writing club! (오프라인)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 일시(총 3회, 120분 진행)
1주차 : 1/11(수) 오후 7시 30분
2주차 : 1/18(수) 오후 7시 30분
3주차 : 1/25(수) 오후 7시 30분

- 장소 : 작업책방 씀

- 함께 읽을 책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이주혜 작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다잡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존재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힘든 집안일을 마치고도 늦은 밤 작은 상을 펴놓고 불경을 필사했던 할머니, 한없이 친밀하지만 태생적 불안의 근원인 어머니, 공동의 기억과 경험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여성들, 그리고 아직 자신이 하지 못한 이야기를 먼저 써서 들려준 작가들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기꺼이 베풀어준 사랑과 우정과 연대의 마음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자신도 글쓰기를 통해 그 고마움을 되돌려줄 수 있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그 마음이 뭇 사람들에게 닿아 묘한 위안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돌고래 출판사와 함께 하는 writing club!(온라인)
『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이설아 외
* 도서 제공

- 일시(총 2회, 120분 진행)
1주차(읽기) : 1/12(목) 오후 9시
2주차(쓰고 읽기) : 1/19(목) 오후 9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고 다양한 조건에서 양육을 하는 여성들이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모두 ‘엄마됨’, ‘양육’, ‘모성’ 같은 오해받기 쉬운 주제에 대해 용기 있게 발언하거나 표현해온 매력적인 필자들입니다. 물론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는 필자들이기도 합니다.

   외동을 키우거나 아이 셋을 키우거나, 직접 낳았거나 입양을 했거나, 아이가 어리거나 크거나, 아이의 기질이 예민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거나 조부모의 도움을 받거나 아무 도움도 못 받거나, 파트너와의 관계가 협조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풀타임 직장에 다니거나 프리랜서로 일을 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결혼과 출산에 익숙한 문화에서 자랐거나 그렇지 않거나, 아이 먹거리나 교육에 힘을 쓰거나 그렇지 않거나, 양육서를 읽거나 읽지 않거나. 열한 명의 필자들은 이 다양한 변수들을 통과해 나름의 선택을 하고 또 그 선택에 대해 나름의 책임을 지는 과정을 공유합니다.
*(광고) 도서출판 부키로부터 원고료를 지급 받아 작성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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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돕는 여자들』, 이혜미 인터뷰집

   불과 6~7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계는 주요 관객층인 20~30대 여성이 여성 주연의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현상을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에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언론은 충무로에서 여성 영화가 등장하지 않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여적여'와 무관하지 않다고 진단하기도 했죠. 


   이처럼 한 때 '여적여'는 여성들 사이의 개인적·사회적 관계는 물론, 여성의 소비 패턴을 분석할 때조차 유효하고 합당한 프레임처럼 활용되곤 했습니다. 그 결과 여성들은 근거 없는 말에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어요. 예컨대 여성 연예인들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눈빛과 표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다른 여성 출연자를 쳐다보는 장면이 악의적으로 캡쳐되어 '여적여' 사례로 낙인 찍힐 수 있기 때문이었죠. 


   이 때 페미니즘은 '여성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여성들은 '여적여'를 미러링한 단어('남적남')와 대항하는 단어('여돕여')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이 중 '여돕여'는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의 준말로, 많은 여성들이 그 현상을 실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 없는 낙인에 불과한 '여적여'와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덕분에 현재에 이르러 '여돕여'는 다양한 매체와 콘텐츠에서 활용되고 있죠. 


   하지만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여전히 '여적여'를 옹호하며, 여성들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말들은 그 생명력이 참 질기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러한 여성혐오의 질긴 역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곁에 '여자를 돕는 여자들'이 있음을 계속 증언하고, '여돕여'가 단지 '여적여'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써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상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소개할 『여자를 돕는 여자들』 또한 '여돕여'를 증언하고 증명하는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필경 생애 한번쯤은 다른 여자에게 빚지고 빚 주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 이혜미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균열을 내고 영토를 넓힘으로써 궁극적으로 다른 여성들에게 더 넓은 길을 열어 준 개척자 여성들을 조명"하기 위해 이와 같은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돕고 다른 여성을 돕기 위해 택했던 삶의 방식들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만들어낸 '우리'라는 영토가 약자들에게 어떠한 감각을 경험하게 만드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덩어리'를 만드세요!
  •    임소연(과학기술학자), 하미나(논픽션 작가)
    임소연 교수와 하미나 작가는 특히 여성들의 입지가 좁은 분야인 '이공계'에서 과학기술과 사회가 주고 받는 영향을 연구하는 여성들입니다. 이공계 진학과 진출이 어려운 한국의 지형에서 이들 역시 수많은 차별을 경험하며 분투해야 했는데요.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의 랩실에서 이공계 여성 연구자들이 겪는 부당한 억압('여자라서 그렇다'는 딱지를 붙이거나 '페미냐'고 묻는 등)에 대해 두 사람은 동료를 찾아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현재 디지털 성폭력을 연구하는 '백가을'과 함께 '과학기술여성연구그룹'을 만들어 '여자가 여자와 함께 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데요. 두 분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를 애정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드러나 인터뷰를 읽는 내내 훈훈한 마음이 들었어요. 또, 2023년에는 다른 무엇보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여성 동료들에게 관심을 갖고 뭉칠 수 있는 기회를 늘려보자고 다짐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답니다. 

    "목소리가 덩어리지면 권력이 생겨요. (...) 세상에 의해 내 능력을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반복하다보면 스스로도 의심하게 되거든요. 그럴 때 나를 보호해 주는 게 동료예요." (하미나)
✱  
   책에서 임소연 교수는 서구권의 이공계 성 편향 실태에 대한 질문에 비서구사회일수록 젠더 고정관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여성들이 그냥 재밌다거나 돈을 벌려는 등의 실용적이고 단순한 이유로 이공계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Olga Kahazan이 쓴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컴퓨터 관련 학위의 18%만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반면 알제리에서는 STEM 분야의 대학 졸업생 중 41%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좌측 도표 내 분포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 STEM의 여성 졸업생 비율(X축), 글로벌 성별 격차 지수(Y축))
✱  
  •    한승희(글로벌리더십컨설팅 대표)
    한승희는 일을 하기 위한 자원을 끌어오는 방식으로 '네트워킹'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네트워킹이 '사내 정치'라는 부정적 의미로 변질되어왔지만, 협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좋은 정치'는 분명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여자들에게 네트워킹은 서로를 돕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각별히 기울여야한다고 이야기하죠.


    한 때 조직에서 '여왕벌신드롬'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여왕벌이 벌집 안에서 유일한 권력을 갖는 것처럼 여성 리더가 자신이 쌓아 올린 권위를 다른 여성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했는데요. 이는 차별적 사회구조가 여성에게 기회를 적게 주는 동시에 그들 사이의 충돌과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적게나마 존재하던 여성의 자리마저 박탈하기 위한 동원했던 언어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도 조직 내 여성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끈하게 결속되는 것임을 이해한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에 의해 자취를 감췄는데요. 최근 조직 내/외에서 활발히 꾸려지고 이어지는 여성 네트워크들의 양상을 보면 그 노력을 절로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의 네트워킹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한승희 대표와 같은 여성 리더들의 솔선수범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한승희 대표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우리도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응원하고 끌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지게 되었답니다 👭

    "열심히 일하고 성과 내는 남자 직원에게 누가 '이기적'이라고 하나요? 그런 얘기 잘 안하잖아요. 이유는 간단해요. 숫자가 많아서 그래요. 얘도 잘되고 쟤도 잘되고 다 잘되면 그런 성취가 당연하게 인정이 돼요. 그런데 소수면 튀어요. 소수가 안 되려면 모두가 잘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진짜 아군을 많이 만들고, 잘되는 사람이 많도록 후배들도 도와줘야 합니다." (한승희)
✱  
🙆‍♀️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세요!
  •    김은희(테니스 코치)
    김은희는 2016년, 초등학생인 자신에게 성폭행 피해를 입힌 테니스 코치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어느 날 한 테니스 경기장에서 가해자를 마주친 후 충격에 휩싸였던 일을 떠올리며, '내가 용기를 내야 단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소송을 결심했다고 말하죠.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케이스를 선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김은희는 이제 여성들에게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낼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김은희의 말이 선두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 개척자만이 건넬 수 있는 가장 멋진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인터뷰를 읽는 내내 괜히 벅차올랐는데요 ☺️ 다른 여성을 위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시도를 감행했던 그 뜨거운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인터뷰였습니다.

    "지금 용기를 낼까 말까 망설이거나, 희망을 가지고 싶은데 차마 두려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내 행복과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은희)
✱  
   책에서 김은희 코치는 조두순 사건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아동성폭력사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정지되도록 하는 개정안 내용을 알게 되면서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최근 김은희 코치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위 개정안의 내용을 토대로 용기를 낸 한 사람으로 인해 지역 사회의 불안이 일소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미성년자 연쇄 성폭력 혐의로 15년을 복역한 뒤, 출소를 앞두고 있던 김근식이 2006년 당시 13살 미만이던 피해자의 신고로 재수감된 사건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2020년 12월, 피해자의 강제추행 사실 신고 이후 약 2년 여만에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인데요.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위 개정안의 내용을 알게 되고, 그 필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케이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여자를 돕는 여자들』에는 오늘 들불레터에서 소개한 여성들 이외에도 핫펠트, 김소연, 서한나, 류호정, 전수연, 나임윤경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할 연말에 함께 할 책으로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새해 목표를 세우는 데 귀감이 되는 문장들도 많고,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손을 맞잡으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거든요.

   끝으로 들불레터에서는 많은 분들이 '여돕여'로부터 영향을 받아 '단 한 명의 여자라도 도와주기!'를 새해 목표로 세워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자를 돕는 여자들』 도서 증정 이벤트를 준비했어요.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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