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는 서울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엘르보이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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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정신과 진료를 받던 날, 나는 곰팡이 핀 팥죽 같은 얼굴로 대기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이나 불면보다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는 패배감이 더 짙었다. 문득 의심이 솟기도 했다. 나란 애는 뭘까? 난 아픈 것일까, 나약한 것일까? 나약한 거라면 해결책은 어차피 노력과 능력의 영역 밖이 아닐까.

 

그때는 내게 죄책감으로 도피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사람은 너무나 복잡해서 죄책감에 짓눌리면서도 그 익숙한 고통에서 안도를 느낄 수 있는 존재다. 당시 가장 두려웠던 건 내 미래와 내일, 비전 같은 거였다. 젊은이의 상징임에도 젊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들.

 

그래서 만나본 적 없는 의사가 거북했다. 새로운 타인이 초라한 나를 단번에 간파하거나 아예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아서였다. 긴 대기 끝에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한 가지 다짐했다. ‘감정적으로 굴 바엔 차라리 로봇처럼 행동하겠어. 바보 같은 나를 철저히 감출 테야!’ 그러나 1분 후, 무슨 일로 찾아왔냐는 질문을 듣자마자 ‘뿌엥!’ 하고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하이쒸, 선생니임. 이인새애앵이 너어무 힘들고, 넘넘 짜아증 나아요. 흑흑흑.” 턱에 호두 주름이 생기도록 얼굴을 구기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는 환자라기보다 주말 밤의 취객 같았다. 선생님은 내게 위로의 티슈 뭉치를 건네고 알 수 없는 약들을 바리바리 처방했다. 나는 약봉지를 쥐고 집으로 달려가며 또 잉잉 울었다. 이전까지 난 연장자나 권위자의 능력을 통해 득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학벌이 좋을수록 이상하게 ‘재수 없고’ ‘착취적’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치료를 지속할수록 우리 사이에 호불호를 넘어서는 어떤 신뢰가 형성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솔직해졌다. 선생님이 나를 바보 취급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대신 혹시 제가 지금 띨띨해 보이냐고 여쭤보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무작정 칭찬과 격려를 퍼붓는 타입이 아니어서 뭘 묻든 그의 대답은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내 말이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잔소리도 애정이라니까요”라는 말을 해준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살면서 1000번쯤 들어본 말이지만 납득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언젠가부턴 더 이상 정신과가 무섭거나 무겁지 않았다. 나 역시 선생님을 만나 그간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던 셈이다. 혼자 끙끙대던 고민 중 하나는 선생님이 내게 너무 많은 약을 먹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보면 끼니당 5~10개쯤 정신과 약을 처방받는 사람도 드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약 때문에 주의를 받는 사람은 나였다. 정신과 약물의 신속 정확한 효과를 체감한 내가 오히려 약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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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혹시 부지런해지는 약은 없나요?”

“없습니다.”

“좋은 꿈 꾸는 약은요?”

“없죠.”

“그러면 운동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약은요?”

“제발 모든 걸 약으로 해결하려는 마음부터 버리세요. 제가 저번에 뭐라고 했었죠?”

“글쎄요.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철딱서니 없는 요구를 거절당할 때마다 조금 더 선생님을 믿게 됐다.

 

물론 선생님이 나를 믿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다. 나는 나아지다가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환자였고, 치료 7년 차인데도 여전히 불안정한 사고뭉치이기 때문이다. 정신 산만하고, 늦잠 자고, 툭하면 우는 버릇조차 고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가끔 선생님 얼굴에서 나에 대한 회한과 허탈감이 스쳐가는 걸 목격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선생님의 눈으로 보는 내 모습이 이제는 밉지 않다. 내 삶엔 여전히 두세 가지의 정신과 질환명이 따르지만, 이런 멋진 멘토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Writer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을 펴냈다. 얼마전  첫 소설〈언러키스타트업〉으로 소설가 데뷔를 알렸다.

- <엘르> 2022년, 11월호 발췌




너와 함께, 지금 여기_요주의여성 #73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양자경을 찬양함.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엘비스처럼 차려입은 젊은 동양인 여성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운데, 이에 맞서 양자경이 이마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고 쿵푸를 한다? 혹은 제이미 리 커티스와 양자경이 소시지 손가락으로 서로를 애무하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이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토록 가늠하지 못한 채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란 부제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라 이 작품에 붙여 마땅합니다. 제목부터 몇 번이고 고쳐 말하게 만드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의 이민자 여성 ‘에블린’은 어느 날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주인공임을 알게 되고, 다중우주의 수많은 ‘나’와 접속하며 그들의 능력을 통해 악당 ‘조부 투바키’에 맞서게 됩니다.

 

SF 판타지, 쿵푸 액션, B급 코미디에 가족 드라마와 러브 스토리까지 더해진 이 소란하고 기상천외한 영화의 중심에는 양자경(영어 이름 Michelle Yeoh)이 있습니다. 올해, 만 60세 생일을 맞이한 양자경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출신. 1980~90년대 홍콩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액션 스타로 이름을 알린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007 네버 다이> <와호장룡> <게이샤의 추억>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 등 작품을 이어가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안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처럼 최근 동양계 배우들이 중심이 된 프로젝트에서 양자경의 존재감과 카리스마는 분량 그 이상의 역할을 했지요.  

 

작품에서 주로 강인하고 위엄 있는 스승 혹은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했던 양자경은 2018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프레스 투어 중에 <에에올> 대본을 받았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고, 오직 나를 위해 쓰인, 마음 깊은 곳에서 늘 기다리던 그런 작품임을 직감했지만 동시에 본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기도 했죠. 결국 두 감독(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의 비전을 이해하고 도전하기로 결심한 양자경은 ‘에블린’이 차이나타운에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여성처럼 보이길 원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그 동안 간과되어온 엄마, 아줌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길” 바랐습니다. 미국 ELLE.com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동양계 이민자 여성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나요? 에블린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에 충분한 사람이에요.”

 

피로에 지친 푸석푸석한 얼굴의 에블린부터 멀티버스 속 다양한 버전의 ‘나’로 변신하는 양자경을 보자면 그야말로 이 영화는 ‘양자경의 모든 것’이 담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우먼 인 할리우드’ 이슈로 참여한 <엘르> 미국 인터뷰에서 그는 요즘 전과 달리 어느 곳에 가든 젊은 팬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고 “쿨하다”고 떠받들어 준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처음부터 끝까지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버무린 영화는 곱씹게 되는 여러 은유와 상징, 메시지를 남깁니다. 말하자면, 극 속에서 사람들은 평행우주 속 다른 ‘나’와 접속하려면 이상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더더욱 맥락이 안 맞고 이상한 행동을 할수록 더 먼 평행우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극 속에서 엄청난 코미디를 유발하는 장치이면서 ‘도전’에 대한 메시지를 주기도 하죠. 우주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가 바로 에블린의 딸 조이와 연결되어 있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때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수많은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 관계가 겹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이 비범한 영화가 남기는 가장 큰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다정하자”라는 것.  내가 왜 사는지, 지금까지 이룬 것은 무엇인지, 과거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누구나 이따금 한 번씩 이런 질문들이 떠올라 밤잠을 설치거나 여러 날 침잠하기도 합니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대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하죠. 그럴 때,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에에올>의 결말부이자 하이라이트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던 남편 웨이먼드(배우 키 호이 콴)의 방식대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에게 펀치를 가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달래고 채워주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 구멍’으로부터 마침내 조부 투바키를 구해내고 딸 조이를 향해 외칩니다. “난 너와 여기 있고 싶어!”

 

인생의 허무를 달래고 서로를 굳건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마주잡은 손이라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순간이라는 것. 너와 내가 함께 하는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의미라는 것. 깔깔깔 웃다가 눈물 짓고 마는 영화 <에에올>에 담긴 이야기를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 같습니다.




Writer 김아름
전 <엘르> 피처&라이프스타일 디렉터 김아름.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좋은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책과 영화, 각종 컬처 콘텐츠를 탐닉합니다.
 - <엘르> 2022년, 10월 웹기사 발췌




소중한 사람에게 난 몇 점짜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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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방식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한 아리님들
담당자가 뽑은 사연 3가지를 들려드릴게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소개해 드리는 사연1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열 번 정도는 문자를 쓰다 지우고, 열한 번째에는 날씨 이야기를 문자로 보내요. 어떤 날은 가을볕이 쨍하다고, 어떤 날은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고, 영국 사람도 아니고 시답지 않은 문자들이요. 하지만 그래도 친구는 알 거라 생각합니다. 괜찮은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에도 언제든 이야기할 존재가 필요하면, 날씨 핑계로 불러낼 누군가가 필요하면, 제가 여기에, 곁에 있다는 것을요:)


식스센스급 반전 센스에 치여
소개해 드리는 사연2
제 전 여자친구는 크리스마스가 생일이에요. 그래서 항상 생일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더라고요. 행복한 날이 다른 기념일과 대신해지는 게 내심 아쉬워 처음 함께 맞는 생일에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 2개를 준비했어요. 이제껏 어떤 사람도 그렇게 챙겨준 적이 없었다며 몹시 감동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지금은 아내가 된 제 짝궁에게 아직도 많이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한 땀 한 땀 아날로그 감성이 좋아
소개해 드리는 사연3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산국제영화제 부스에서 산 엽서 굿즈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어요. 늘 여행을 갈 때마다 해당 지역의 엽서를 사서 가족들에게 꼭 편지를 쓰곤 했는데, 영화제에 갔다 오는 길의 기억이 너무 좋았었나 봅니다. 카카오톡, 전화 등 다양한 수단으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도 있지만 때론 잉크가 펜보다 진하듯 엽서로 가족들에게 저의 진심을 담으니 저도 몰랐던 마음이 나오기도 했던 거 같아요. 아직도 안방에 가면 제가 적은 편지들이 보이곤 합니다. 독립해서 산 지 1년이 지나면서 저도 모르게 성격이 변하고 가족들에게 툴툴댔던 부분도 있던 거 같아요. 이번 뉴스레터를 읽으며 오랜만에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우리에겐 시간은 무한하지 않잖아요! 가족들에게 좀 더 잘해볼래요. 저도 한국인의 성적표로는 D 정도 받겠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 저는 A+인 사람이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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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구독자 보이스🔊
매주 여러분의 목소리 중 일부를 전해드립니다. 모든 분들의 소중한 피드백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있으니 오늘의 <엘르보이스>가 어땠는지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 

*글리치 궁금했었는데 외계생명체 판타지 내용인 줄 알았거든요 재미있게 봤어요.

*엄마랑 싸워서 2주째 말 안 하는 중인데 이번 뉴스레터 읽고 뜨끔했어요 ㅠㅠ 엄마랑 화해해야겠어요.

*일하면서 살살 읽는 재미가 좋습니다. 엄마가 바라는 건 작은 관심이고 .. 나도 내 속도대로 세상을 살고 싶었는데...그 속도가 몇키로인지 모르고 ..지나게 될까봐 두려워졌습니다.

*처음 글을 읽을 땐, 영화 내용이 전부 나온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좀 상했어요. 무척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여기 상영관에서 보지 못했거든요. 근데 그 내용과 이어지는 작가님의 글에서 앞선 마음이 사라졌어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  님, <엘르보이스> 41번째 레터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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