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국, 『야고보의 편지』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마케터 B입니다.


루터교 신자이자 17살의 나이로 홍콩 우산혁명을 이끈 조슈아는 어릴 적부터 소외계층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기도했던 가족이 1년 후에도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음을 마주하면서, 기도와 믿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그를 처음으로 ‘행동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게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오늘 독자님과 나눌 텍스트는 정성국 교수의 『야고보의 편지』(근간) 첫 부분인데요. 야고보서는 종교개혁가 루터에게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오해받으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지켜 온 서신입니다. 신앙의 온전함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월요일의 복음을 시작합니다!

#46 

‘믿음’을 온전케 하는 ‘행함’에 관하여

언젠가는 꼭 야고보서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다. 그것은 바울 신학자로서 야고보서에게 느끼는 일종의 부채 의식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가치에 합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다.

성경 안에 야고보서만큼 홀대를 받은 책이 또 있을까? 오랫동안 야고보서는 자신의 얼굴 그대로 읽히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책과의 비교를 통해 읽히고 평가되기 일쑤였다. 흔히들 야고보서 하면 먼저 믿음과 행함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떠올리지만 사실 야고보는 편지 서두에서 편지를 쓴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을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하고 성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약 1:4). 이것은 야고보가 교리적 논쟁보다는 존재의 변화와 삶의 형성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야고보서는 ‘온전함’에 관한 책이다.

소유할 만큼 소유하고 성취할 만큼 성취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를까? 믿음도 있고 교회 생활에도 열심이지만 이것이 삶의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아쉬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느낄 때, 그때 만나는 단어가 온전함이다. 우리는 온전함을 갈망한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인격, 온전한 관계, 온전한 삶을 꿈꾼다. 그리고 온전한 세상을 꿈꾼다. 온전함은 무엇이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질문이다.

온전함에 대한 갈망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을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하고 성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4).

친절하게도 야고보는 서두에서 편지의 목적을 직접 밝힌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함과 성숙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서신의 목적임을 밝힌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단순히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을 넘어 온전한 믿음을 지니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랫동안 우리는 ‘오직 믿음’을 외쳐 왔고, 개인이 지니는 ‘구원의 확신’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온전함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여전히 온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온전함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우리말 ‘온전함’에 해당하는 야고보의 헬라어 단어는 형용사 ‘텔레이오스’와 동사 ‘텔레이오우’다. 편지의 서두에서 ‘온전함’이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편지의 중반부에서도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야 ‘온전한 사람’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2:22에서는 믿음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행함과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사 ‘텔레이오우’는 출발점에서 시작한 무언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목적이나 끝에 이르다는 의미를 지닌다. 출발했으나 중간에 멈추었다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거쳐야 할 과정을 지나가지 않거나 갖추어야 할 요소를 생략했다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만 채워져야 할 것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전함은 완전함과 다르다. 거쳐야 할 과정을 거쳐 목적지까지 이르렀다 해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야고보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면서, 이를 무언가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1:4). 곧, 갖추어야 할 것들을 균형 있게 갖추고 정해진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온전함의 중요한 모습이다.

온전한 믿음과 삶, 야고보의 목회적 비전

안타깝게도 야고보가 드러내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들의 삶은 갈라져 있고, 다른 것과 섞여 있고, 마땅히 도달해야 할 곳까지 충분히 깊어지지 않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했다. 첫째로, 야고보는 가장 먼저 그들의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어져 있다(1:8)는 사실을 들추어낸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의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마음이 다른 무엇과 섞여 있는 상태를 뜻한다. 또한 하나님을 구하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겸하여 간절히 욕망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모든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둘째로, 야고보는 성도들이 반드시 함께 갖추어야 할 것들을 놓쳐서 그들의 삶이 기울어졌다고 질책한다. 짝을 이루어야 할 것들이 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1장과 2장에서는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 믿음과 행함의 짝을 말한다. 1:22-25에서 말하듯이, 말씀을 듣는 것은 말씀을 행하는 것과 짝을 이루어야 한다. 2:14-26에서도 말하듯이, 믿음과 함께 행함을 갖추어야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빠진다면 온전할 수 없다.

온전함은 균형을 상실하고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회복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특별히 야고보는 여러 관계의 온전함을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웃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여기는 이들에 대해서 야고보는 질책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같은 공동체 속의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은 저주한다(3:9). 종교적 일들은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경건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신앙(1:26-27)에 대해서 야고보는 한마디로 ‘헛된 경건’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개인의 경건을 자랑하지만, 이웃과 공동체를 돌아보지 않는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2:15-16). 자신의 외적 모습에 몰두하지만, 자신의 내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성찰하지 못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1:14-15; 4:3). 사실, 우리 주변의 잘못된 신앙 행태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이 전부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옳은 것 중 유독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균형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공동체와 이웃이 없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지 야고보는 편지 내내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셋째로, 야고보는 마땅히 도달해야 할 깊이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한 성도들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하나님을 알지만 자주 분노하여 그분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1:20), 하나님을 알고 이웃 사랑의 계명도 알지만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오히려 차별하고 있는 사람(2:1-13),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지 못하는 사람(3:1-18), 재물을 소유했지만, 선을 행할 줄 모르는 사람(4:17), 악한 부자의 불의와 폭력을 보면서도 그 앞에서 품꾼을 변호하거나 함께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5:1-6). 이들은 모두 충분한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들이다.

위의 예들은 온전함이 인격적 성숙과 연관된다는 점을 말해 준다. 야고보가 1:4에서 ‘온전함’과 ‘성숙함’을 함께 언급하는 것을 보라. 누군가를 성숙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나아가서 삶의 방식이 지니는 ‘깊이’를 평가한다. 헬라어 ‘텔레이오’의 의미가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목적지나 끝에 이른다는 의미임을 다시 기억하자. 앞으로 우리가 함께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관찰하겠지만, 야고보는 인간의 마음, 생각, 욕구, 감정, 언어, 행동, 나아가서 삶의 방식 전체가 그 목적지와 끝에 이르도록, 곧 더 깊어지도록 돕는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그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자라 갈 것을 기대한다.

한마디로 ‘온전함과 성숙함’에 이르도록 성도들을 돕는 것이 야고보의 목회적 비전이다. 이 온전함은 무엇보다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인격과 존재 방식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을 향한 단심을 품음으로써, 내면과 외면의 심각한 부조화를 보이는 이들은 믿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지만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품음으로써, 온전함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 야고보의 비전이다.

끝으로 야고보가 온전함과 성숙함이라는 삶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여기에 이르게 하는 덕목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라.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한다(1:4). 인내를 지닌 사람만이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견뎌 내기 때문이다. ‘인내하라’는 권면으로 편지를 시작한 야고보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다시 ‘오래 참음’과 ‘인내’의 주제로 돌아오는 것을 보라(5:7-11). 그리스도인의 외적 모습은 지녔지만,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깊이와 품격에 이르지 못한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면서 야고보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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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섯 번째 <월요일의 복음>은 정성국 『야고보의 편지』(근간)에서 발췌했습니다.

<월요일의 복음>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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