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인스피아 저널, (54), 2022.8.17,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책의 몰락’이라고들 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멀리합니다. 

그런데 뜯어보면 실상은 ‘독자의 몰락’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인의 절반 이상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는데, 발간되는 책의 종류는 10년 전과 비교해 오히려 늘었고요.(링크1 링크2) 여전히 ‘작가님’이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유료 강좌나 유튜브, 플랫폼의 인기가 높습니다. 즉, 작가는 너무 많고 독자는 너무 적은 시대입니다.

앤드류 포터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에서 이런 세태를 보고 “그렇게 다들 창작에 여념이 없다면 대체 누가 그걸 소비할 시간이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곰곰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쉽게 쓰여지는 글’과 ‘독자의 실종’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꼬리를 문 뱀처럼 이어진 문제가 아닐까요. 골똘히 읽는 사람이 없다보니 작가나 책을 만드는 사람도 읽히는 상황을 상상하지 않고서 단지 팔기 위해 책을 만들고, 독자는 번번이 그런 책을 만나다보니 실망해서 책 자체를 멀리하는 식으로요.

그래서 오늘 레터에서는 ‘쉽게 쓰여지는 글’과 ‘독자의 실종’을 반대로 뒤집어서 ‘어렵게 쓰여진 글’과 ‘대단히 덕후같은 독자’에 대한 해찰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많이 사랑하는 책들을 지팡이로 들어보았습니다.

만약 어떤 책 한권의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위와 같은 내용이라면 어떨까요? ‘어떻냐’를 떠나서 대관절 그런 책이 있는지부터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컨셉으로 쓰여진 책이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조지 스타이너가 쓴 <나의 쓰지 않은 책들>입니다. 

이 책은 총 7개의 독립적인 챕터로 이루어져있는데요. 이 각각의 챕터가 바로 ‘한권의 쓰지 않은 책’의 대략적인 내용과 이를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이 한권의 책은 동시에 ‘7권의 쓰지 않은 책’이기도 하죠. 예를 들면 이중 한 챕터에서 그는 이 시대의 문해력과 관련된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오늘날엔 고전 문해력이 아닌, 음악-건축학-수학-생명공학 문해력 4종 세트가 필요하다!”)를 설득력있게 밝히는데요. 본인의 주장에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는 식입니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방대한 작업으로 유명한 박식가 중국학자 조지프 니덤의 평전(<중국 취향>), 유태인 박해 역사의 이유를 성큼성큼 호쾌한 필치로 짚어본 책(<시온>) 등 ‘있을 뻔했는데 없는’ 책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의 ‘쓰지 않기로 한 성실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대충 자신이 ‘대가인척’ 하면서, 먼 발치에서 체코 다스콜리에 대해 ‘남의 이야기하듯’ 관찰하는 책을 써도 됐을텐데,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체코 다스콜리에 대해 자신이 ‘관심을 가진’ 순간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점을요. 즉, 독자와 스스로를 속이면서 쓰느니 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죠.

여기서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봅니다.

이 작은 책을 덮고 나면, 마치 7권의 가장 독창적인 책(그 이상)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재, 7권의 책을 ‘내지 않기로’ 결심한 글을 보면서  책임있게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그가 ‘쓰지 않은 책들’에 대한 ‘책’을 내준 덕분에 이런 귀중한 해찰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한 즐거움입니다.

‘관심경제’의 시대에는 ‘독자’만 해서는 수지가 안맞습니다. 남의 글을 읽을 시간에 내 글을 한자라도 더 써야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혹은 장단기적인 ‘쓸모’를 위해, 연료를 여며넣는듯한 황급한 독서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어떤 목적도 없이 단지 ‘읽는 즐거움’만을 위해 읽은, 대단한 책 덕후 독자가 있습니다. 심지어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도 모든 것을 잊고 책을 맹렬하게 읽어갔을정도니 어쩌면 ‘쓸모’의 측면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독서라고도 할 수 있겠죠.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호주의 평론가 클라이브 제임스(링크)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내려간 독서 일기입니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책을 통해 시공을 넘어 신나는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요. 

한편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저자에게 힘과 영감을 주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독자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한 시대에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 수 있게 해주는 대단하고 든든한 ‘동료’이죠.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1967년부터 2017년까지 약 50년 간 그가 쓴 문학 비평, 서문, 칼럼 등을 모아놓은 책인데요. 즉 이 책은 그가 ‘쓰는 인간’이기 이전에 ‘읽는 인간’으로 살아온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만큼 이 책을 가지런히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이 책을 통해 우연히 처음 접하게 된 작가-평론가인데요. 처음엔 제목을 보고 '독서를 통해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본 책인가?'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여기서의 '죽음을 이기는'의 의미는 어쩌면 '극복overcome'보다는 '냅둬'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당장 추운 상황에서 추위 자체를 최고로 의식한 상황에서 '극복'한다기보다는, 아예 추위 자체를 잊을만큼 다른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추위? 그까이거 냅둬'의 상태가 되는 경지랄까요. 그만큼 이 책에선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정작 물 밑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으며,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못말리는 '책 덕후'가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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