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일기

커리어를 스타트업에서 시작한 것이 속도 12 러닝 머신에 올라타는 것인 줄 그땐 미처 몰랐다. 그저 성능이 좋아 보이고, 디자인이 예쁘고, 커스터마이징되어 있길래 택했다. 분명 빠르게 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더 빨리 뛰라고 채근했다. 러닝 머신은 동료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추면 옆 사람이 피해를 봤다. 내 자세는 금세 무너졌고, 숨이 차서 내려왔다. 

러닝 머신에서 내려오지 않고선 온전히 쉴 방법이 없었다. 충분히 숨을 고르고, 이내 다시 올라탔다. 이번에는 더 오래 타겠어, 다짐하며. 성능이 떨어지지만 디자인이 예쁜 러닝 머신, 디자인이 별로여도 성능이 최고인 러닝 머신… 하지만 이내 속도를 버티지 못하고, 매번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10년 동안 같은 러닝 머신을 타는 동료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는지 자책했다.

어쩌다가 속도 12인 러닝 머신만 쏙쏙 골라서 탔지? 어쩌면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에 그 방법밖에 몰랐던 게 아닐까? 나는 초등학생 때 입시 미술에 뛰어들었다. 6학년 때는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화실에서 12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오전 9시에 가서 밤 10시쯤 집에 돌아오는 365일을 보내고, 밥은 늘 30분 이내에 먹어야 했다. 4시간에 그림을 한 장 완성할 때마다 A+부터 C-까지의 점수를 받으며 평가를 받았다. 매일 밤 나에게 남는 건 3장의 그림과 3개의 점수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까지 총 8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때도 그것들이 쉽진 않았다. 적응을 하지 못해서 5학년 땐 화실을 옮겼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자퇴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땐 실기 수업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다시 돌아갔다. 그때의 나는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서 돌아갔던 걸까? 아니면 마음과 체력을 회복해서 돌아갔던 걸까? 어린 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단 지구력이 부족한 나의 탓을 했다.

하지만 더는 이 속도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속도 12에 올라타면 일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가 일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닌 걸 깨달았다. 물론 일은 내 삶의 중심축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나에게 회사로부터의 독립은 속도 12의 러닝 머신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나만의 러닝 머신을 만들어서 타기로 결심했다. 이젠 내가 속도를 낮추거나 올릴 수 있고, 원한다면 잠깐씩 내려와 쉬었다 다시 탈 수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여러 러닝 머신에 연결된 상황이 아니어서, 내가 속도를 내지 않으면 멈춘다는 사실이 때론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도 누군가의 속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만의 속도로 갈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는 “그러기엔 아직 우리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아?”라고 반문한다. 누군가는 “맞아, 나도 한국의 속도에 정말 지쳤어.”라고 공감한다. 다행히 나의 준거 집단은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득문득 준거 집단보다 넓은 서울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낙오자 모양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서울보다 더 넓은 시야의 세상을 바라본다. 전체의 평균 속도는 5~6쯤이란 걸 깨닫는다. 우린 스스로 더 빨라야 한다고 자책하며 러닝 머신에서 자꾸 나가떨어지는 선택을 한다.

물론 생계의 문제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절박해진다. 속도가 좌절감이 되어 나를 삼키지 않도록 부단히 달려본다. 이렇게 달리고 있다 보니, 내가 단순히 속도를 늦추고 싶어서 러닝 머신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에너지를 누구와 무엇을 모색하며 어떤 희망과 목적을 갖기 위해서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지내고 싶었다. 무엇이 중요한 일, 기쁜 일인지에 대한 ‘참조 체계’를 바꾸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을 하려면 기존과 같은 속도로는 불가능했을 뿐이다. 지금은 나에게 알맞은 속도를 찾으며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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