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막아, 일렉 기타와 관련된 너의 따뜻한 이야기를 잘 들었다.
 
035_정신적으로 유리한 픽션 + 에픽 판타지 장르를 사는 이들을 위하여.
한아임 to 오막
2023년 12월
 

오막아,


일렉 기타와 관련된 너의 따뜻한 이야기를 잘 들었다. 오막이 따뜻한 도시 남자라 그런지, 너의 일화도 참말로 겨울겨울하고 포근하구나. 혹시 누가 아니. 정말로 그 친구가 뮤지션이 되어서 너에 대한 일화를 어딘가에서 풀게 될지.


그런 의미에서 일단 포근한 크리스마스 노래로 시작해 보겠다.

Tori Kelly - 25th

크리스마스 바이브란 참 좋은 것이지!


작년에는 열심히 크리스마스 노래를 찾아 들었는데, 올해는 또 왠지 크리스마스이면서도 크리스마스 아닌 기분이 든다. 그것은 크리스마스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올해 전반적으로 시간이 가면서도 안 가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시간이란 참말로 미스테리한 것… 나는 요즘에 0.5cm 더 컸다. 태어나서 제일 건강한 때가 지금이란 말이지. 이것은 내가 회춘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러할 때여서 이러한 것인가? 즉, 춘으로 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원래 지금이 그러한 때인 건가?

그리고 ‘그랬구나’란 엄청나게 좋은 단어다. ‘그랬구나’가 나왔던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이었던가? ‘당연하지’랑은 별개였던가?


아무튼, 지난 편지에서도 짧게 언급했는데,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매우 오래도록 이 ‘그랬구나’라는 단어의 신비로움에 대해 얘기할 텐데, 모든 언어가 다 이러한 형태의 문장을 쓸 수는 없잖아. ‘그랬구나’에는 주어가 없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말을 내면작업하면서 매우 잘 쓰고 있다.


방금 전의 문장을 봐봐라. ‘누가’ 내면작업을 하면서 ‘그랬구나’를 매우 잘 쓰고 있는가? 맥락상, 그것을 매우 잘 쓰는 건 한아임이다. 그러나 사실 저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이것은 한국어의 신박한 특성이며, 내면작업에 매우 유리하다.


영어 같은 경우를 보자. 주어가 없으면 문장이 성립이 안 된다. 문장이라고 치지도 않는다. ‘그랬구나’는 의미상 ‘I see’ 정도가 될 텐데, 여기서 ‘I’가 누구이며 (혹은 무엇이며), 그걸 대체 왜 결정해야 하는지 등의 의문이 생긴다. 만약 ‘Is that so?’라는 식으로 ‘그랬구나’를 번역한다면, 거기서도 ‘that’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써 문장이, 말하자면, 꽉 채워진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그랬구나’가 가능한 것이다. 빈칸이 남으면서도 비지 않는 (왜냐하면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부재를 느끼지 않으니) 희귀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누가’ 그랬구나가 아니고, ‘무엇이’ 그랬구나가 아니고, 그저 모든 것이 그러한 현상이 가능한 것이다…!


오막이 나에게 ‘그랬구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러한 것인가? 오막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것인가? 내가 지난 편지에서 언급한 음악이 그러한가? 그것들을 만들어낸 창작자들이 그러한가?


그 모든 것이 그러하지…! 이렇게, 그러함을 알고 있는 ‘나’가 있으나 나는 그 그러함에서 빠질 수도 있는 그러한 상태가 다른 언어에서는 아예 설명조차 불가할 수가 있다 이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박한지는 끝도 없이 설명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리 랜덤스러운 한아임이라고 할지라도) 고막사람이라는 경로에는 좀 너무 생뚱맞을 것 같기 때문에 짧게 요약해보겠다:


어느 특정한 개체로 제한되지 않은 ‘그러함’을 언어 구조상 자동으로 ‘아는’ 사람과, 언어 구조상 상상하기도 어려울 수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어 사용자들에게는 이 자동적 앎이 탑재되어 있다. 이 앎이 언어 구조상 존재할 수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용자들에게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근데 한국어 사용자들은 기냥 알 수도 있다 이 말이다…! 앞으로 펼쳐질 100년? 20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이 정신적 강국이 될 거라고 여기는 이유 중 하나다. 누가 그렇게 여기는가? 내가! 그런 측면에서 한국어는 매우 아름다운 언어라 하겠다.

그런데 마침 오막의 지난 편지에는 ‘영화처럼’이라는 비유와 우주가 참 많구나. 그리고 그래, 김승민 님 목소리는 킹 독보적이지.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 같아. 음색이라고 하잖아. 어떤 스킬이 아니다. 갖고 태어난 특성인지라,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냥 목소리가 좋은 건 좋은 것…


플러스, 클럽 에스키모 얘기를 전에도 언젠가 했던 것 같은데 (밀릭의 앨범 Vida 전체가 킹 명반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그중 내가 매우 좋아하는 곡은:

Millic - You (feat. ta-ku)

그리고 내가 기리보이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리보이가 우주 얘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ㅋㅋㅋ


그리고 음색 하니 생각 나는 따마:

기리보이 - 빈집 (Prod. By dnss) (Feat. THAMA)

이것은 광기. 크리스마스 시즌과 어울리는 어두움인 것 같기도 하면서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러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원래는 오늘의 편지를 크리스마스 노래로 채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의식의 흐름은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우주 얘기가 나왔잖니? 그런 의미에서 갑자기 얼마 전 컴백한 에스파가 생각난다.

Aespa - Drama

3년쯤 전, 에스파 데뷔 당시, 많은 이들이 대체 광야가 뭔데 광야광야거리냐고 했다. 그때도 나는 광야가 좋았다. ㅎㅎㅎ 사랑 노래가 아닌 가사도 좋았고, AI? 게임 컨셉도 좋았다. 그때는 겉과 속, 상상과 현실을 지금만큼 진짜로다가 구분 없이 볼 때는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좋았음. 당시에도 나는 픽션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은 픽션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으니까. 다만 지금의 나는 그 둘이 정말로 얼마나 진정으로다가 구분할 수 없는지를 더 자주 관찰하고 의도하고 있다. 즉, 예전과 방향이 다른 게 아니라, 정도가 다르다.


우리가 현실에서 이용하는 모든 서사가 전부 다 픽션이다. 세상에 '원래 그러한' 건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표면적 현상만 봐도 관찰이 가능하다.


여기서  ‘표면적’이라 함은, 말 그대로 표면에 드러났기에 표면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외부에서 관측 가능한 그 표면에서 드러나는 일이라서 표면적이라고 하는 것이란 말이지. 표면적 역사만 봐도, 우리가 믿는 모든 게 다 픽션이란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걸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라든지. ‘이 특정 신분 계층은 이래야 한다’라든지. ‘이 특정 성별은 이러저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라든지. 전부 다 역사상 단 한 순간도 미동 없이 멈춘 적이 없었던, 늘 변하던 관념이다. 애초에 두 개체가 공유할 수 있는 ‘한 시공간’이란 게 없으니까…


근데 이걸 요즘엔 더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누가? 내가.) 그리고 에스파의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특유의 SM적인 아름다운 상업성을 지녔음과 동시에 가사가 놀랍도록 정신적이다…! 집중해서 들으면 충격적이다.


'드라마'의 가사를 보아도 그렇다. 빛을 따라서 달려 나가 다음 세계를 연다든지. 모든 드라마가 나로부터 시작한다든지.


'Next level'도 그랬다. 광야로 걸어가더니 저 너머의 문을 열고 Kosmo에 닿을 때까지 제낀다…! 감정들을 배운다는 표현도 생각해 보면 희한하다.

Aespa - Next Level

'도깨비불'은 더하다. 일단 영어 제목이 Illusion이고, 도깨비불 자체가 환각이니까… 널 끌어당기는 데다가 관심을 먹고, 환상도 먹고, 유일한 목격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Aespa - Illusion

나는 SM 상술에 걸려들었지새해에 걸맞는 가사 아니겠니? 파이팅 넘치지.

광야 얘기를 하니까, 에픽 판타지라는 장르가 떠오른다. 장르로서 굳어진 에픽 판타지는 톨킨 판타지류를 말한다. 엘프가 나오고 오크가 나오는, 그러한 판타지다. 나는 그러한 장르를 찾아서 소비하지는 않는데, 에픽 판타지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 단어가 딱 엘프/오크형 판타지로 굳혀져 사용되는 것이 좀 아쉽다. 약간은 마치 페이스북 같다. 페이스북 이 녀석이 ‘메타’라는 이름을 독점함으로써 그 멋진 단어를 쓸 때 이제 좀 화가 난다고 ^^… 에픽 판타지라는 단어에는 화는 안 난다만, 그래도 좀 아쉽단 말이지. 얼마나 에픽하고 판타스틱한 단어냐 이 말이다! 에스파의 광야는 에픽하고 판타스틱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 장르가 에픽 판타지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인생 장르 고르는 거, 이거 되게 유용하다. 오막도 해봐라. 같은 사건이 펼쳐져도, 자신이 누아르에 산다고 여기는 사람과 로맨틱 코미디에 산다고 여기는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예를 들어, 시체를 발견했을 때, 누아르에서는 주인공이 경찰에 붙잡힐까 봐 튀는 거고, 로코에서는 경찰이랑 사랑에 빠지는… 뭐 그런 것이다.


나는 인생 장르를 에픽 판타지라고 설정했기에, 120살까지 살 계획이며, 맨날 우주 얘기를 하고, 광야를 파는 SM의 상술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좋아하지:

Imagine Dragons - Who We Are (From “The Hunger Games: Catching Fire” Soundtrack)

배고픈 게임을 하면서도 신나게 활을 쏘는 캐트니스 언니에게 어울리는 이 노래는, 일이 어떻게 됐든지, 누가 우리더러 미쳤다고 하든지, 그게 우리라고 말한다.


에픽 판타지… 이것은 삶의 장르로서 택하기에 꽤 괜찮은 장르다. 추천한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승화가 가능해진다. 나는 내게 펼쳐진 모든 걸 다 써먹을 수 있어.


자, 이쯤에서 크리스마스 노래를 하나 더 듣자.

Loving Caliber feat. Mia Pfirrman - Christmas In My Heart

근데 오막 형님? 형님 저번 편지에서 갑자기 더 열심히 한 거 티나 ㅋㅋㅋ 엉? 분홍색 볼드체도 쓰고, 화살표도 막 넣고 엉? ㅋㅋㅋ 그것은 내가 나의 지난번 편지를 특히나 즐겁고 길게 써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서도, 또 한편으로는, 형님이 만난 구독자 분이 누구십니까? 저도 좀 만나고 싶어요, 예?


진심입니다. 예. 왜냐하면, 이 글을 읽고 계신 고막사람 친구들, 제가 내년에 한국에 갑니다, 예. 봄에 가요. 몇 달은 있을 거고요, 고막사람에 항상 피처링되는 이혜원 친구의 범고래출판사와도 뭔가 함께하는 일을 벌이게 될 것 같고, 저번에 고막사람에 참여해줬던 Editor_J가 자기가 일하는 곳을 견학시켜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꼭 했으면 좋겠고, 박지지 님도 만나고 싶음.


근데 아무튼 간에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게 제 말입니다, 고막사람님들! 표면적으로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더니… 이것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받아들이면 진짜 그렇게 되더라?


한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펼쳐졌다. 약간 믿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졌어. 너무 어이가 없어가지고 내가 스샷도 찍어놨고, 혜원이도 증언해줄 수 있다!


분명 나는 2022년 11월 16일에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2023년 7월 1일에 만료될 거라는 이메일을 받았어. 그런데 그 마일리지로 티켓을 살 정도의 양은 아니었어. 그래도 아까우니까, 대한항공 온라인숍에서 어떻게든 써버리려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한테 제발 아무거나 좀 사서 써주면 안 되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온라인숍에서 내가 직접 쓰기란 매우 귀찮게 되어 있음. 무슨 맨날 한국 폰 번호 물어보고… 하… 아주 그냥 마일리지를 티켓에 쓸 게 아니면 아무 쓸모가 없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싶었음.) 근데 친구들이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았었음. (마일리지 소유자 본인이어야 이마트 쿠폰이나 네이버 쿠폰 같은 걸 쓸 수 있다고 함…) 그리고 어차피 별로 쓸 만한 게 없었음. (대한항공이라고 쓰인 텐트나 가방을 누가 갖고 싶냐고요. 예?! 한우 세트는 맨날 품절임. 쳇.)


그래서 그냥 ‘아, 마일리지 날렸구나,’ 했었어.


그런데 그 상태에서, 마침 혜원이가 2024년 상반기에 범고래출판사/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에 투자할 시간이 좀 많아질 것 같더군. 그러자, ‘아, 이번 기회에 한국을 가면 딱인데’ 하는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어. 마일리지는 만료되었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가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 이 생각을 한 것은 2023년 10월쯤이었다. 그런데 이미 마일리지가 날아갔다고 생각하니까 (7월에 만료될 거라고 이메일을 받았으니까), 왠지 싫은 거야. 가고 싶은데 가기 싫은 거야.


그러고 있었는데, 2023년 11월 1일에 대한항공에서 또 이메일이 왔다. 이번에도 마일리지 만료 이메일이었는데, 저번에 만료될 거라던 그 마일리지가 아직도 만료가 안 되고 그냥 있더군???? 7월에 만료될 거라더니, 이마트 쿠폰에 쓰려고 시도해봤던 소량을 제외하고는 전부 그대로 있더군???? 그리고 2024년 1월 1일에야 만료가 될 거라더군????


그래서 어? 뭐지? 하면서 티켓을 확인하기 시작…

그런데 어? 마침 가족 마일리지 풀에 마일리지가 킹 많네?

그런데 또 어? 마침 우리 가족 중 아무도 마일리지를 쓸 계획이 없어… 이거 그냥 쓰래, 가족들이. 심지어 마일리지가 너무 많아서 프레스티지 타래…


여기까지만 하면 ‘뭐야, 그냥 마일리지가 원래 많았으니까, 일부 만료가 됐든 안 됐든 한국에 갈 수 있는 거였네’라고 할 수 있을 거야.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근데 핵심은, 마일리지가 원래는 7월에 만료 된다고 분명 이메일 왔었는데, 갑자기 6개월이나 만료가 미뤄지면서, 그사이에 나는 한국이 가고 싶어졌고, 한국에 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고 (혜원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어져서), 마음 상태가 달라졌다는 것이야. 게다가 만약 두 번째 만료 알림 이메일이 안 왔으면, 가족 마일리지 풀에 아무리 마일리지가 많았어도 안 갔을걸? 가족 마일리지 풀에 마일리지가 많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거야. 왜냐하면 그 이메일이 마치 신호탄 같아서, “지금 가!” 하는 것 같았거든. 1월 1일에 만료되기 전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티켓을 사야 할 것 같았어. 그래서 그제서야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제대로 상황을 봤단 말이지.


심지어 마침 K-ETA 홈페이지에 이렇게 나와 있다.


“대한민국 전자여행허가제 한시 면제.”


2023년 4월 1일부터 2024년 12월 31일까지 면제래.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고작 한아임 한 녀석을 위해 ETA를 전면 면제를 해줬다는, 그런 표면적인 해석에 기반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국에 가고 싶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으면 면제니, 가족 마일리지니, 나의 마일리지가 만료가 되지 않고 그대로 있음이니를 알 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 게 유리하다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가 내게 유리한 쪽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 건 순전히 선택의 자유인데, 선택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하면 진짜로 유리해진다. 반면,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지' 같은 불리한 관념을 진심으로 믿고 살면, 슬픈 예감은 정말로 틀리지 않게 된다.


세상은 나를 (우리 개개인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세상이 나를 실망시킬 거라는 믿음조차 실망시키지 않지...!


내가 맨날 두리뭉술하게 명상 혹은 내면작업이라고밖에 표현을 안 했던 것의 구체적인 효과가 말하자면 이거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런데 거기에 어떤 억울함이나, 받아내야 한다는 결핍이 없고, 매우 당연하면서도 감사해지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모두 픽션 속에서 살고 있으니, 유리한 픽션을 택하는 편이 낫다.


고막사람 친구들이 한아임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만, 2024년 새해에, 부디 꼭, 누가 됐든지, 자기 인생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세상이 별로라고 믿을 수야 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믿을 수도 있지.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 퍼뜨리는 건 사기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봐, 내 인생에서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았으니 네 인생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어! 이것이 확률적으로 맞아!" 그런 덫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지. "저 사람은 자기 인생이 엿 같다고 하는데 나는 왜 저 사람 말을 듣고 있지…? 저 사람 말이 다 맞아도, 최선의 시나리오는 저 사람이 엿 같다고 말하는 그 인생을 똑같이 사는 거잖아?" 즉, 우리가 죽는 날, "아, 역시 내 말이 맞았어.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역시 내가 x, y, 혹은 z를 못 한다고 믿었듯, 딱 그 말대로 나는 그것들을 못 했어. 내가 다 맞았어." 이런 걸 위안을 삼을 건지? 그걸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내가 이거에 한이 맺힌 이유가 있다. 저러한 사기를 진심으로 믿어서, 아름다운 사람이 자기 세상을 펼치지 못하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옳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억울해하는 동시에, 억울해하는 것이 권리라고 여긴다. 그것은 비극이다. 우리가 모든 한계에 대한 관념을 녹일 필요는 없지만 (예를 들어, 나는 앞으로 새로운 외국어는 추가로 배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매우 원하며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영역들에서 스스로 '나는 이것을 가질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동시에 마치 누구 다른 사람이 내 길을 막기라도 했다는 듯 억울해하는 경우는 비극적이란 얘기다.


2024년 새해, 누가 그대들에게 ‘넌 이거 못 해.’ ‘이거 하면 안 돼.’ ‘남들도 그냥 살잖아.’ 이딴 말을 한다 한들, 그것은 그들이 사는 픽션임을 인지하고, 부디 그대들이 하려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픽션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뭔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 자체가, 그 욕망 자체가 신성한 것임을 믿길 바란다.


정말 한번만 고려해봐줘. ㅜㅠㅠㅠ 내게 (우리 개개인에게)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고귀한 것임을 내가 인정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리할지를 한번만 고려해봐줘. 우리는 일단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Yes라고 말해야 한다. 누가 Yes라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것이 전부다.

Lana Del Rey - Say Yes To Heaven

(천국은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님. 한아임은 무교.)

그런데 오막 형님, 러닝 하십니까? 그러면 나 한국 갔을 때 러닝 같이 할래? 나 요즘에 그거 해. 뭐냐. 이름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는데, 심박수를 130-140 정도로 유지하면서 오래 달리는 트레이닝 기법이 있다. 엄청 잘 뛰는 아프리카 대륙의 마라톤 선수들이 평소에 이렇게 훈련한대. 그 낮은 심박수로 하루에 몇 시간을 기냥 달린대. 근데 나는 마라톤 선수는 아니니까 몇 시간을 달리는 건 아니고, 이틀에 한 번 정도 130-140 심박수로 50분 정도를 달린다. 오막도 이런 훈련법 들어봤어? 혹시 하고 있는가? 내가 본격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130-140으로 달리려면 좀 많이 느려. (너무 느려서 발이 꼬일 지경…) 오막의 심박수 130-140은 속도가 꽤 빠를 수도 있는데, 아무튼 혹시 속도가 얼추 맞다면 같이 러닝을 하자. 너가 너무 빠르면 따로 러닝하고서 국밥 콜? 러닝 + 국밥은 왠지 좋은 조합일 거 같은데.


아무튼, 캬… 뭘 먹든지 간에… 이거 너무 멋지지 않냐… 얼마나 서로 도움이 되는 친구냐… 만나서 러닝 하는 친구는 진짜 만나면 좋은 친구 아니냐? 그때가 되면 봄일 것이고, 달리기에 가장 이상적인 때 아니겠니. 루니(오막네 장수견)는 혹시 요즘에도 뛰면서 산책할 수 있어? 루니도 같이 달리면 좋겠다. 얼마 전에 인스타에서 닥스훈트 전용 맞춤 옷을 파는 계정을 봤다. 그냥 강아지 전용 맞춤 옷도 아니고, 루니 같은 닥스훈트 전용 맞춤 옷만 파는 계정이었어. 왕귀여움… 세상은 넓고 귀여운 건 많지. 이것도 유리한 믿음 중 하나다. '세상은 넓고 귀여운 건 많다.' 고막사람 친구들, 2024년에는 한번 테스트해보기를... 아무 믿음이나 유리하게 들리는 걸 골라서 한번 테스트해보면 진짜 그렇게 되는 걸 알 수 있다.


'세상은 넓고 귀여운 건 많다.'

'세상은 넓고 귀여운 건 많다.'

'세상은 넓고 귀여운 건 많다.'


이제 곳곳에 세상이 넓고 귀여운 게 많다는 증거가 채워질 것이다. 진짜임. 마침 닥스훈트를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올해의 마지막 고막사람 편지를 이쯤에서 마치겠다.

모두, 넓은 세상에서 귀여운 거 많은 연말을 보내기를.

아임 총총.
이번 편지를 보낸 한아임은...
아무 데에도 아무 때에도 있었던 적 없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 사이의 해석자다. 원래도 괴란하고 괴이하고 괴상하며 해석함 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여러모로 괴하다. 이런 성향은 번역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하고 사나, 뭘 쓰고 뭘 번역했나 궁금하면 여기로.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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