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도 버거운, 나의 가려진 것들에게

견디기도 버거운, 나의 가려진 것들에게

- 이진주 & 앙리 베르그송 '순수지속이론' -

2025.01.10(금)

님과 de tour, 우리의 열네 번째 발걸음이에요.

님은 특별하게 생각나는 기억이 있나요? 우리는 보통 어릴 적 경험한 특별한 기억을 하나쯤 안고 살아갑니다. 이 기억은 각인이 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우리의 기억 저편에 남아있습니다. 때로는 분명히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흐릿하지만, 그만큼 우리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그 추억이 행복한 순간이었든, 아니면 잊을 수 없이 충격적인 경험이었든 말이죠.

이처럼 기억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미술가가 있습니다. 바로 2023년 프리즈 서울에 참여해 많은 이목을 끌은 동양화가 이진주입니다. 이진주 작가는 꾸준히 자신을 괴롭히던 어릴 적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그러한 이진주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

1980년 한국 부산에서 출생한 이진주는 현재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2003년 홍익대 동양학과를 졸업해, 지금은 모교의 같은 동양학과의 교수직을 맡고 있는데요. 2023년 열린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정도면 '프리즈 위크'가 아니라 '이진주 위크'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요. 최근에는 영국 최고 갤러리 중 하나인 화이트 큐브에도 전시하면서 더 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죠.

The Unperceived (Detail),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22x488cm, 2020

이진주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자신의 기억에 집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섯 살 즈음 납치될 뻔했다가 도망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기로 하였는데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지만, 문득문득 어릴 적의 경험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이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녀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내가 왜 이 기억을 피해야 하나? 나는 왜 이 기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가?"와 같은 질문이었죠. 이 질문을 시작으로 그녀는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찾아보았지만, 어릴 시절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2008년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며,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작업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던 중, 그녀는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내 삶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해하고 싶지만 불가해한 이 지점에서부터 예술가의 시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그녀는 자신의 끔찍했던 기억을 그림으로 승화하는 작업 스타일로 확립하며, 점차 스스로도 정신적으로 회복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솜털까지 보이는 심리 풍경화

Blazing Radiant,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88.7x65.5cm, 2023

님은 평소에 동양화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여러 개의 손이 얼굴을 가린 여성 그리고 그런 그녀를 오묘하게 품고 있는 검정. 이 작품은 이진주의 <지각>이라는 작품으로, 동양 채색화의 한 종류입니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동양 채색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장지'라는 한지 대신 천의 일종인 '광목'을 사용하는데요. 광목에 '아교반수'라는 코팅 작업을 한 뒤, 작은 부분부터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타일 덕분에 그녀는 동양화의 물성과 기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동시에 작가 특유의 미스터리함을 잘 드러낼 수 있었죠.

이진주의 작품은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주관적입니다. 그녀의 특기는 세밀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화폭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솜털이나 머리카락까지도 손에 잡힐 듯 묘사합니다. 정묘하게 묘사하는 기법적인 측면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려진 그림에는 사물의 형상과 함께 정신까지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조선시대 초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줄곧 "초현실주의적이다"라는 오해를 받곤 합니다. 이는 작품 속 사물들이 종종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자세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작품은 일종의 '심리 풍경화'와 같으며, 작품 속 사물들의 배치는 자신의 심리나 직관에 의해 재조합되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현재까지도 자신의 심리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나 망각되어 버려 불완전하게 남아있는. 어릴 적에 경험한 모순적인 형태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즉 이진주의 작품은 기억과 망각이라는 두 주제가 과거와 현재를 모호하게 오가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앙리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이론

이진주의 작품세계는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순수지속이론'(La durée pure)으로 해석해 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192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앙리 베르그송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과학적 성과를 자신의 철학에 반영한 독특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바로 뇌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기억이었죠.

님은 '나 자신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시나요? 이 질문에 어쩌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언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정신이 데카르트에게 생각함 즉 사유라면, 베르그송에게는 정신의 본질은 기억입니다. 그는 사람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물질적인 것 즉 육체란 세상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물질로 이뤄진 몸체일 뿐입니다. 실제적으로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태어나 시간이 흐르며 쌓아온 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의식은 우리의 모든 경험을 의미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든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저장하고, 필요 없는 정보는 잊는 과정이 필요한데요. 이것이 바로 기억의 역할이죠.

베르그송은 대표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크게 습관 기억(lesouvenir-habitude)과 이미지 기억(I'image-souvenir)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습관 기억은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기억입니다. 마치 외국어를 외우기 위해 단어를 반복해서 읽고 소리 내는 학습법과 같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체의 운동이 반복되면 우리에게는 하나의 운동 메커니즘이 만들어집니다. 이 운동 메커니즘은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때 취할 태도나 행동을 미리 결정하며, 실용적인 역할을 합니다.

반면 베르그송이 진정한 기억이라고 여긴 이미지 기억은 이미지 형태로 축적된 잠재적 기억입니다. 그에 따르자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를 최초의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전의 기억에 비교했을 때 이미 경험했던 문제라면, 이는 습관기억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반면 처음 경험한 상황 즉 인상적인 기억이라면, 이미지 기억으로 남게 되죠. 이미지 기억은 습관 기억처럼 질서 정연하게 조직되지 않으며, 현재 직면한 상황과 무관한 비신체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우리 삶에서 독립적이고 고유한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는 단순 사물이나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감정을 포함할 수도 있죠. 베르그송은 그러한 이미지 기억의 총체를 순수기억(mémoire pure)이라고 칭했습니다. 쉽게 말해, 순수기억은 완전히 과거의 영역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기억의 저장고라면, 여기서 꺼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데이터 하나 하나를 이미지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반복되고 변주되는 우리 삶처럼

Deceptive Well, Korean paint on linen, 260x528cm, 2017

베르그송의 독특한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요 개념인 시간과 '지속'(al durée)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베르그송은 사람들이 시간을 습관적으로 공간처럼 인식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공간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크기나 부피 등으로 수치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질적 연속체로 파악합니다.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아가는 흐름으로 보는 기존 시각은 시간을 공간처럼 수치화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그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생소한 시간의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 '지속'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에게 지속이란 '어떤 상태가 오래 계속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연속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즉 모든 물질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통된 지점을 유지하면서도, 매 순간 조금씩 세상과 반응하며 계속해서 이질적이고 차별적으로 변화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음악을 예로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님이 잘 알고 계시듯, 음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청각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시간성을 갖고 있는데요.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음악을 뜯어 감상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앞뒤 흐름으로 이해하고, 총체적인 인상으로 인식하죠. 아시다시피, 음악은 리듬과 멜로디가 반복되면서도 변주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음악에 지겨워하지 않고 지속해서 즐길 수 이유일 것입니다. 과거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또 미래로 흐르며 자신 나름의 동일성을 가지지만, 그 과정에서 변주되어가는 음악은 마치 베르그송이 이해하는 시간과 지속과도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죠.

어둠 속에서 살아 숨쉬는 기억들

Clearly Revealed,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88.7x65.5cm, 2023

배르그송의 기억과 지속은 이진주의 <블랙페인팅> 시리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블랙페인팅> 시리즈는 배경을 검정보다 더욱 어둡게 칠하고 그 안에 얼굴이나 손 같은 몸의 일부만을 부각한 이진주만의 독창적인 작품 시리즈입니다. 그녀는 기존에 사용하던 검정 물감이나 먹을 사용하려 했으나, 깊은 어둠 속에 은폐된 사건이나 그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대상들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배경이 조금 더 진한 검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남편인 화가 이정배와 함께 'JB블랙'이라는 특수 제작한 물감을 특수 제작했다고 합니다.

YEON,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016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기억 속 주변 인물들을 끌어옵니다. 때로는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 부부의 얼굴을 노출시키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연>은 독감으로 앓아누운 그녀의 아들의 얼굴을 그린 작품인데요. 이 작품의 경우, 솜털 하나하나가 모여 휘몰아치듯 배경을 채우며, 당시 떠오른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을 표현했습니다. 이외에도 그녀는 <블랙포인트> 시리즈에서 불이나 꽃을 쥐고 있는 손, 서로 얼굴을 밀착하고 있는 여성들과 같은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피사체들은 그 무엇보다 세밀하게 그려졌지만, 대상을 완전히 재현해 냈다기보다는 연상 혹은 회상의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사실 기억은 모호합니다. 기억이 최근의 것이든 아주 오래된 기억인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억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지만, 또 어떤 부분은 흐릿하거나 망각되어 왜곡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특정한 기억들은 구체적인 상황이나 대상이 아닌, 아련한 감정과 이미지만을 남기기도 합니다. 마치 베르그송의 이론처럼, 이진주의 작업처럼 말이죠.

이미지 면면에 세겨진 새로운 의미들

또한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잠재성을 포함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물은 '지속'하며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포착한 이미지란 변화하는 사물의 단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미지는 사물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기억이나 관습에 의해 왜곡되기 전에, 사물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인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예술 작품에서 모티프가 맡는 역할과도 유사합니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순수지각, 즉 직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All Names, Korean Paint on Linen, 94x122cm, 2018

이진주의 작품에서도 직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억 속을 헤집어 선명한 것을 발굴해 내듯, 그녀는 이따금 일상에서도 의미 있는 것을 식별하기 위해 자신의 직관을 활용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부터 작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늘 평범하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갑자기 특별해지는 순간을 포착해 이를 세밀화로 그려내는데요. 그렇게 일상적인 것들은 그녀의 직관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관점의 차이, 이미지, 주관성이란 하나의 가능성인 셈이죠.

견디기도 버거운, 나의 가려진 것들에게

The Unperceived, Korean color and acrylic on linen,

122x488cm, 122x 488cm, 122x244cm, 122x220cm, 2020

이러한 양상은 과거 이진주 작가가 열었던 개인전 '사각死角'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동명의 작품, <사각>를 구상하는 과정에 대해 그녀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관에 전시된 두루마리 그림을 보면 말려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 늘 궁금했다. 숨겨져 있지만 존재하는 세상을 이번 전시에 펼쳐보고 싶었다"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사각>는 긴 캔버스 두 개를 A자 형태로 세운 뒤, 그 안쪽에 또 다른 그림을 숨겨둔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숨겨져 있던 회화 속의 세상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관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죠.

Unseen, Korean paint on linen, 215.5 x 213 x 6.5(d) cm, 2019

그녀는 줄곤 자신의 예술을 기억과 망각, 그리고 왜곡의 작용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 대상은 어릴 적의 트라우마인만큼, 다소 자전적인 서술이자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진주는 더 이상 자신의 기억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의 기억에까지 닿고자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그림에는 환경 파괴를 상징하는 식물들이 가득하며, 나체인 듯 아닌 듯한 팬티스타킹을 입은 여성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 등 여러 인물들이 작품의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도망친 다섯 살의 그녀를 성인이 되어 바라보듯, 세상 모든 위태한 것들을 비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잔뜩 웅크린 있는, 우리 주변의 가려진 것들. 그들이 응당 은폐되지 않고 우리들 앞에 선명히 드러나는, 그런 이야기처럼 말이죠.

관중 앞에 여백은 유연하게 흐른다

님은 회화의 요소 중 하나인 여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이전에 저희 de tour에서도 여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미술가를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우환이었죠. (➡️ 이우환 편 보러 가기!)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이 두 미술가 모두 자신의 작품에서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그 활용의 방법은 사뭇 다릅니다. 이전에 소개해드린 뉴스레터에서 이우환의 작품은 게슈탈트 이론으로 해석될 수 있었는데요. 그는 그어지거나 뭉쳐진 물감(피사체)을 여백과 극단적으로 대조시키며, 감상자에게 물감의 존재감과 울림을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명명한 '여백효과', 즉 여백을 공간적으로 인식하는 미술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진주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백은 그 성질이 다른데요. 이우환에게 여백이 공간적인 요소라면, 이진주에게는 시간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일전에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내 작품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끌고 싶다"라고 말했었는데요. 앞서 설명한 전시, '사각死角'에서 그러한 그녀의 의도가 현실적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사각>와 같은 작품들은 관객들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그림 앞에 머물고 작품을 감상하게끔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시장 내부도 작품 간의 거리, 즉 여백을 충분히 넓게 두었습니다. 작품의 외현적인 형태나 전시장을 공간이 아닌, 유연한 감상을 하기 위한 시간의 요소로 인식한 것이죠.

Act 3,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22 x 182cm, 2022-2023

이러한 여백의 시간적 활용은 '사각死角'의 시리즈 뿐 아니라 그녀의 작품 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녀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로 오해받곤 합니다. 이는 작품 속 이미지들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이미지들은 작가 특유의 세밀화로 인해 관객의 시선을 강하게 이끄는데요.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일관된 유사성, 즉 내러티브 없이 나열되어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여백이 크게 삽화되어 있습니다. 당황스러운 전개 앞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 집중하는데요. 그 결과 갈피를 잃은 관객들의 시선은 화폭 위에 무수히 많은 불규칙한 선들을 그리게 되죠.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일지도 모릅니다. 연관성의 부재와 여백의 존재는 이미지들간의 관계 형성을 의도적으로 방해합니다. 이에 이미지들은 분절되고 더욱 세밀화되어 흐름을 잃고 해체되는데요. 그렇게 무의미 속에 부유하던 이미지들은 점차 그 의미가 변화하게 됩니다. 바로 해석을 위해 방황하는 관객의 시선에 노출되면서 말이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혹은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부분으로'. 자유롭게 변형되어 가는 관객들의 시선에 의해, 이미지는 매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치 베르그송이 말한 시간의 특징, '지속' 개념처럼 말이죠. 이진주의 가여운 '이미지'들은 그녀의 말처럼 단순히 왜곡된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관객들의 시선에 의해 점차 세밀해지며 '지속'해간다면, 그들은 더 이상 망각되지 않는 제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진주, 그녀가 원했듯이 말이죠. 관중 앞에 유연하게 흐르는 여백,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 작은 것들을 위한 예술이지 않을까요?

오늘의 de tour의 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님, 사실 기억에는 이름이 많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추억, 트라우마, 습관, 암기 외에도 우리는 경우에 따라 꿈, 데쟈, 첫인상 등을 기억의 범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이름을 붙이듯, 우리에게 기억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죠. 어쩌면 예술가에 있어 기억이란 중요한 원천임과 동시에, 가장 견제해야 할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알아본 베르그송의 개념에 의하면, 기억은 때때로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도 많기 때문이죠.

님은 기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님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기억은 무엇인가요? ' 피드백 하러 가기 '를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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