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끼끼 D에게


주변에 끼끼가 많다. 끼끼란 원숭이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로, 우끼끼~~~! 하면서 신나게 냅다 뛰는, 그러다 우당탕 뭔가를 떨어뜨리거나 어딘가 부딪히는 친구들을 뜻하는 말이다. 나의 대표 끼끼 D는 생각해보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유난히 어리게 느껴지는 친구다. 실제로 둘 다 20대이던 시절 만났기도 하고 전 회사에서 팀장과 팀원으로 만난 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녀가 끼끼이기 때문이다. 사실 끼끼라는 말도 그녀를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

사무실에서 매번 뛰어다니고(급한 일 하나도 없음), 매일 한번씩 “아 맞다!”를 하고, 술 먹고 무단 지각을 n번 해서 반성문을 n번 쓰고, 넘어지고 쏟고 베이는… 그야말로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녀의 일상… 당연히 먹고 노는 것도 아주 좋아해서 쏘주를 칵 마시다가 별안간 <아름다운 강산>을 열창하기도 하는 그런 끼끼. 어떤 사람인지 조금 그려지시는지? 한 마디로 굉장히 까부는 사람… 까불이…

지금까지 내가 D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D 님, 차분~히 앉아서 침착~하게 생각을 해봐요…” 일 것이다. 성질 급하기로는 남 부럽지 않은 나지만 D만 보면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냉철하고 침착한 사람이 된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미내 님은 왜 안 넘어지고 왜 안 쏟아요? 매분 매초 항시 주위를 살피나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님에 비해서는 더더욱. 나는 저거 쏟겠다 싶으면 안으로 밀어 넣고 다치겠다 싶으면 주의를 주는 사람. 인생의 대부분을 비슷한 사람들과 지내왔기에 이게 어떤 특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어른이 되면 다들 이렇게 되는 거 아니야? 아니라는 걸, D를 비롯해 주위의 끼끼들과 싹스틱들을 보며 깨달았다.

얼룩을 싹 지워주는 싹스틱. 부주의해서 늘 뭔가를 흘리는 친구들을 지칭하는 말.


‘매분 매초 항시 주위를 살피’는 나는 최근 DP라는 별명을 얻었다. 드라마 <DP>에서 김성균이 정해인에게 “내 양말 무슨 색이야”라고 묻는데, 정해인은 거울에 비친 김성균의 발목을 보고 양말 색을 맞춘다. 그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장난 삼아 “내 양말 무슨 색이야” 물었는데 난 그 양말이 회색 땡땡이라는 걸 맞출 수 있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이미 봤기 때문이다. 김성균이 다른 걸 물어봤어도 나는 무난히 DP가 됐을 것이다. 내 뒤에 앉은 학생이 어떤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지, 누가 뭘 입고 신었는지, 식당에서 우리가 앉은 테이블 번호가 뭔지,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본 적 없는 아저씨의 성격이 어떤지, 옆 옆에 앉은 젊은이들의 소개팅이 망했는지 흥했는지.

원래는 귀만 좋았는데 2년 전에 라섹을 한 뒤로는 눈까지 좋아졌다. 좋은 눈과 귀로 접하는 세상은 필요 이상으로 고해상도다. 김성균의 아무 질문에 다 답할 수 있다는 건 곧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늘 피곤하고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버릇처럼 ‘개인 시간’을 요구했다.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때 더 피곤하다고 믿었다.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까먹는 일, 뭔가를 흘리는 일,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일, 테이블 번호를 확인하러 왔다갔다 하는 일은… 가뜩이나 힘든 인생을 더 좆같이 만들지 않아?

DP의 활동 기간은 1년 6개월, 한때는 2년이었을 것이다. 나는 30년을 넘게 살았다. 수명이 다 된 것이다. 2년 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순두부라고 생각하고 샀는데 집에 와보니 낫또였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걸 보니 보일러 고장이 분명하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멍이 생겨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 매우 지쳤거나 스트레스가 극심하거나 몸이 아팠을 때 벌어진 일들이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나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가 짊어진 것들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몸을 가볍게 하고, 모든 잎을 떨구고, 웃자란 가지를 쳐낸 뒤 수월하게 인생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 방법은 얼마간 먹혔다. 어떤 드라마에 나온 “넌 꼭 힘들 때 나부터 버리더라?” 하는 대사를 뒤통수에 달고 다시 예전의 편안하고 예리하고 정돈된 삶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D를 비롯한 행복한 끼끼들이 내 주위를 맴돌며 왁킹을 한 사바리씩 추는 걸 볼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변해갔다. 인생 긴데, 저런 태도도 나쁘지 않을지 몰라. 무엇보다 내 주위에서 가장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다니는 사람인 D가 불행할 리는 없다. 물론 내가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D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한계가(’바닥이’ 라고 썼다가 미안한 마음에 고침) 있으니까. 아, 그 한계는 바닥에도 있고 천장에도 있다. D는 광주 출신으로 매번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병어조림이니 육전이니 하는 메뉴들로 나의 태생을 원망하게 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번 생에는 가질 수 없을 맛수저.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삶을 통해 행복하고 바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D는 나에게 대충 살기를 전도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사소한 건 틀리고 빼먹고 실수해도 큰일 나지 않고, 결과만큼 과정에서 껄껄 웃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 꼭 그렇게 칼같이 모든 걸 정하고 잘라낼 필요 없다는 것. 편의점 커피를 흘리고 하얀 식탁보에 떡볶이 국물을 묻히고 복숭아를 깎다가 피를 보고(어째 다 먹는 얘기) 엉뚱한 버스를 타도 인생 별 일 생기지 않는다는 것. 아직도 밥 먹다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일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하면 응 죽여줄게 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지만 D는 “아이 왜 그래요~” 하면서 한번 더 기회를 주기를 권한다. 물론 다시는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며 엉엉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D에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닭똥 눈물이 장판을 뚫든 말든, 힘들 때 사람부터 버리는 사람보다는 힘들 때 사람부터 만나는 사람이 더 나은 인간이다.

처음 D를 봤을 때 속으로 하 이놈 멀리해야겠어… 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어떻든 D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인생에 비비고 들어왔다. 지금 우리 집 현관에는 D의 어머니가 그려주신 호랑이 민화가 있다. 악귀를 쫓아주는 그림이라는데 커다란 눈이 어딘지 귀엽고 맹하고 웃기고 결코 든든하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 D를 닮았다. 어이없는 차이나카라 잠옷도 D가 이직 후 첫 월급으로 사준 효도 선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 따라 3년을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나의 끼끼 D는 이렇게 나에게 관대함을 (강제로) 가르쳤다. 물론 매우 열받고 약오르는 방식이지만 확실히 배운 것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매일 비난한 그들의 힘 빼기가 나에게 정말 필요한 기술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차분~히 앉아서 침착~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다소 우끼끼 시끄럽더라도 별 생각 없이 사는 게 낫다는 것도. 무엇보다 D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건 건대 안주마을의 홍어삼합과 백합탕의 조화. 이건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구.

본인 제공, <행복한 끼끼> 

[추천합니다😎]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링크

겨울이면 뉴욕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거짓 추억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구장창 봐온 영화들 때문입니다. 나홀로 집에, 러브 액츄얼리, 로맨틱 홀리데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그런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결코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젊음 때문인지 그 비슷한 생기가 있거든요. 요즘 데이식스의 <예뻤어>에 늦어도 너무 늦게 꽂혔는데 그 노래와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다 지났지만 넌 너무 예뻤어’라고 말하는 책이에요. 너무 예뻤던 너는 ‘세이디 그린’이기도 하고 그들이 두고온 시간이기도 하고 게임이기도 하고 젊음 그 자체이기도 하겠죠.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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