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불립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또는 진부성, banality of evil)’을 통찰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집요한 추적 끝에 예루살렘 법정에 세운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독일의 유태인 집단학살 현장책임자였습니다. 아렌트가 <뉴요커>지 특파원으로 예루살렘 재판과정을 모두 직접 방청한 뒤 쓴 보고서를 책으로 펴낸 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그는 아이히만이 가족이나 동료 등과의 사적 영역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존재였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르고도 교수형에 처해지기까지 끝내 반성하지 않는 모습은 충격을 넘어 차라리 시시했다(banal)고 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본성이 악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reflection)할 줄 모르는 ‘무사유(無思惟, thoughtlessness)’가 자리 잡은 탓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아이히만뿐만이 아니라 나치시절 독일인 대다수가 ‘무사유’의 덫에 빠져들어 있었다고 봤습니다. “나치정부가 비밀경찰을 통해 잔혹한 언론탄압에 나서자 독일인들이 처음에는 신변 안전을 위해 말을 삼갔지만,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말을 하려는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됐다.”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이유입니다.
관훈클럽 영시(英詩)공부모임은 박정찬 고려대학교 미디어대학원 특임교수의 진행으로 아렌트의 통찰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얼마 전 가졌습니다. 박 교수는 “우리가 전체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치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말에 주목했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정치에 대한 언급을 피한 것과 달리 아렌트는 ‘정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렌트는 인간의 근본활동으로 labor(노동)와 work(작업), action(행위) 세 가지를 꼽았는데 이 중에서 action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정치적 활동으로서 action에 올바로 참여하지 않으면 전체주의의 빌미를 제공해 생존-생활 수단으로서 labor와 work이 왜곡되거나 제약받게 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공동체(폴리스)가 민주주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것은 여러 사례를 통해 그런 모델을 제시해줬기 때문으로 봤습니다.
아렌트는 폴리스가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자유’를 꼽았습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전체주의를 경계한 이유입니다. “정치적 공론장에서 누가 한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지 않으면, 그래서 진실이 가려지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기준이 되는 발판 자체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 집단이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상대방 입장에서 공통의 감각(common sense, 상식)을 모아가는 것을 ‘정치’로 봤습니다. “정치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간의 의견, 판단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예술과 같다. 취향이 다르므로. 그러나 공통의 분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참여자 각자가 감히 현명하게 처신(dare to be wise)해야 하고, 그러려면 공정(impartial)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