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신기했던 점은 각 교실에 놓인 스피커가 한국과는 조금 다른 용도로 쓰인다는 점이었다. 미국 고등학교는 학년과 반으로 교실을 구분하는 한국과 달리 선생님의 이름이 곧 교실의 이름이다. 적어도 내가 다닌 미국 남부의 해밀턴 고등학교는 그러했다. 따라서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담당 과목 선생님이 있는 교실로 이동해야 한다. 선생님이 직접 학생들의 교실로 찾아가는 한국의 시스템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것이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첫날 내가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이유다. 학년과 반을 통해 금세 원하는 교실을 찾을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교실을 하나하나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런 방식 덕분에 각 선생님의 취향과 개성에 따라 교실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10학년 물리 과목을 담당하던 비즐리 선생님의 방은 푸르고 짙은 녹색 빛이 돌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차분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다소 차가운 교실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비즐리 선생님은 누구보다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었지만 말이다. 덥수룩한 수염 아래로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의 얼굴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따금 생각나는 이유다. 10학년 영문 수업을 담당하던 서튼 선생님의 방은 그보다는 좀 더 분홍빛이 돌았다. <앵무새 죽이기> 같은 고전 작품의 표지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친밀하고 따뜻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교실 한쪽에 놓인 선생님의 책상도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책상을 줄곧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물리선생님이다)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로 책상을 가득 채운 선생님도(영문선생님이다) 있었다. 그 책상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조그만 스피커가 정중앙에 한 대씩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그 스피커는 교실 오른쪽 천장에 달린 한국 학교의 스피커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벨이 매시간 (3초간 날카롭게) 울리고 전교생에게 공지 사항을 알리는 용도로도 활용된다. 다만 미국 교실의 스피커가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수업 중에도 벨이 (꽤 자주) 울린다는 사실이다.

수업 중에 울리는 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특정 학생을 호출하거나 전교생 또는 학년 전체를 호명할 때. 실제로 벨이 울린다는 건 아니고 스피커를 통해 오피스 레이디가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정도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선생님이 교실 앞에서 수업하고 있는데 책상에서 별안간 치지직 소리가 들린다. “XX학생 지금 오피스로 오세요” 그러면 해당 학생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문을 열고 뚜벅뚜벅 오피스로 간다. 수업 중에 돌아오기도 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나도 호출을 받고 몇 번 불려갔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중요한 학교 행사가 있을 때는 전교생을 호출하기도 한다. 한 번은 화학 수업을 듣다가 벨이 울린 적이 있었다. 학기 초였기 때문에 아직 학교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을 때였다. 교실 앞에서 치지직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오피스 레이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름이 호명되지 않았으니 나와 관련된 일은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피스 직원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학생들이 전부 교실을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나도 눈치껏 책을 덮고 필기구를 정리한 뒤 학생들을 따라 나왔다. 복도가 몹시 혼잡한 걸 보니 아무래도 전교생이 어딘가로 함께 이동하는 듯했다.

모두가 현관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관? 학교 밖으로 나간다고? 대체 어디를 간다는 거지? 나로서는 전교생이 수업 도중 특별한 허가증도 없이 학교 밖을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좀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학교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어디를 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앞서가는 학생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5분에서 10분 정도를 걷다 보니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건물로 학생들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건물 안쪽에 오래되고 낡은 강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커다란 칠판과 단상, 빽빽한 의자들이 전부인 강당이었다.

학생들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년을 잘못 따라온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가는 방법도 모른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10학년 역사 수업을 담당하는 잭슨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단상 앞에 서서 무어라 짧게 말하더니 서너 명의 학생을 강당 앞으로 불러냈다. 가장 왼쪽에 있는 학생부터 차례로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잭슨 선생님이 연설을 끝마친 이들을 강당 밖으로 내보낼 때야 비로소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 전교 회장을 선출하는 자리인가 보군! 

후보들을 빼고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선생님은 곧바로 첫 번째 학생에게 투표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들어서 투표한다고? 영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해밀턴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은 그렇게 학생들의 공개 투표로 정해졌다. 나는 후보자 중 누구도 알지 못했으므로 (해밀턴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500명도 채 안 되는 학교이기 때문에 학년이 달라도 서로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손을 들지 않았다. 그 뒤로 강당에 가는 일은 다시 없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기묘한 형태로 남아있다.

수업 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울리는 종이 내게 뜻하지 않은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학기 초 얼렁뚱땅 공개 투표로 진행된 전교 회장 선거가 지나가고 얼마 뒤 전교생을 체육관으로 불러내는 벨이 울렸다. “학생들은 지금 체육관으로 가세요”라는 말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마자 모두 자리를 정리하고 교실을 나와 동쪽 복도와 이어져 있는 체육관을 향해 이동했다. 혼자 복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키가 180은 훌쩍 넘을 것 같은 듬직한 느낌의 여자애였다. 체육관에서 같이 앉게 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리릭이라 소개했다.

그날부로 리릭과 나는 베스트프렌드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나를 살뜰히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리릭은 같은 학년의 친구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는 늘 함께했고 점심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핼러윈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그녀의 동네 친구들과 함께 밤샘 파티를 하기도 했다. 2학기 때는 물리 수업을 같이 듣게 되어 내가 머무는 집에서 같이 과제를 하기도 했다. 만일 그때 벨이 울리지 않아 체육관으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리릭과 친구가 되지 못했다면 나의 학교생활은 얼마나 달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잔잔한 소름이 돋는다.

그 정도로 리릭은 내가 미국 생활을 버티는 데 엄청난 힘이 되어준 존재다. 그런 베스트프렌드를 만나게 해준 벨에게 여전히 고마운 마음이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거를 굳이 손을 들어 뽑는 건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뽑고 있는지 내심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