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빛인. 한 주간 가슴 깊이 먹먹한 일주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여러분의 마음에도 안녕이 찾아오길 바라겠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날씨가 훅 추워졌더라구요! 추워진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내용을 가득 담아 댓잎레터가 돌아왔습니다😊 저희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이번 레터부터 드디어! 본격적으로 [프롬, 한빛] 졸업생 인터뷰가 시작됩니다! 처음으로 졸업생 인터뷰를 담게 되어 졸업생분께도 저희 댓잎레터에게도 의미가 큰 시간이었는데요.

졸업생분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한빛을 추억해 보기도 하고 어딘가에 ‘한빛’으로 연결된 멋진 선후배님이 계시다는 것에 든든한 격려를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호그와트에 '헤르미온느🧙'가 있었다면, 한빛고에는 '명건희🧑🏻‍🏫'가 있다! 이 분... 정말 하루를 24시간만 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고교 시절에는 학생회에 사생회, THB의 짱까지, 대학 시절에는 물리학, 건축공학,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며 교직이수까지, 마지막으로 교생실습 나갔던 학교의 교사가 되고 평생의 짝을 찾기까지!💖


다시보니 아무래도 24시간 이상을 살고 계신 것이 분명하네요!😇 모두 기다리셨죠? 댓잎레터의 첫 번째 졸업생 인터뷰! 8기 명건희님과 함께 지금 시작합니다.🎬

자기소개


🎤 :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 : 네, 안녕하세요. 저는 8기 졸업생이고요. 2019년부터 광주에 있는 금호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요. 올해 4년 차로 일을 하고 있고, 2학년 담임을 하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


🎤 : 이제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을 해보려고 하는데요. 초반에는 같이 한빛고 이야기를 나누며 학창 시절을 들어보려 해요. 처음으로 드릴 질문은 재학 시절에 관한 건데요. 어떤 활동들을 하셨는지, 학교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게 뭐가 있으신지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 : 먼저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것 자체에 너무 감사해요. 인터뷰를 통해 '내가 학교를 어떻게 다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됐어요. 확실히 오래되긴 했더라고요. (웃음) 덕분에 싸이월드도 오랜만에 들어가서 사진들도 살펴보고 그랬네요.


학교 다녔을 때 어떤 위치였느냐라고 한다면.. 1학년 때는 종교부 차장으로 시작했을 거예요. 주바라기도 같이 하고요. 거기서부터 학교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었고요. 2학년 때는 종교부 부장을 하며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이때가 제일 피크였던 것 같아요. THB짱도 했거든요. 이후에 사생회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학교에서 굵직굵직한 것들은 다 해본 거죠.



한빛고에 오게 된 이유


🎤 : 선배님도 한 끗발 날리시던 분이군요..! 정말 다 해보셨네요! 학교생활 이야기를 더 듣기 전에, 한빛고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왜 오게 됐는지 궁금해요.


🧑🏻‍🏫 : 제가 8기고 6, 7기에 친척 형, 누나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죠. 사실 그 당시에 교육과정이 좋고 대안학교라 남다른 교육을 하고.. 이런 걸 알고 오는 친구들이 몇이나 됐겠어요. 대부분 학생보다 부모님의 의지가 더 컸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당시에 한빛고란 학교와 대안학교의 이미지는 정말 좋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제 자랑일 것 같아서 먼저 죄송합니다만, 나름 제가 중학교 때 공부를 좀 했거든요. 아직도 되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게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왜 네가 그런 학교를 가려 하느냐’라고 하시며 정말 오랜 상담을 했어요.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그렇게 상담해 본 적이 처음이었어요. 선생님께선 ‘왜 이상한 데 가지’ 하고 엄청 설득하셨던 것 같은데요. 결국 저는 한빛고에 오게 됐죠.


솔직히 제가 한빛고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제가 남중을 나왔거든요. 근데 한빛고 남녀공학이었고, 두발자유교복도 없고! 사복 입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뭐 이런 게 제일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학교생활이 될 줄 알았는데.. 입학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죠.


'잘못 왔나 이 학교...?'


🎤 :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시죠…!

🧑🏻‍🏫 : 특이했던 건 제가 입학했을 때 두 개 학년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1, 2학년만 있고 3학년이 없었죠. 알다시피 우리의 입학식은 3월 2일이잖아요. 공식적으로는? 재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되니까 3월 1일에 입주를 하죠. 보통의 신입생들은 입학식 날 입주를 하고요. 근데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시는 상황이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일찍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에 있는 신입생이 저 혼자인 거예요. 하루 일찍 왔는데 ‘이게 내가 꿈꾸던 이상이 아니었구나. 진짜 잘못됐구나’를 직감한 거죠.


입학식 전날 밤, 짐을 풀고 앉아 있는데 방에 20명 정도가 앉아있었던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한 방 정원은 보통 4명 많으면 다섯 명이거든요.


🎤 : 손에 땀이 나네요.. 다들 신입생이 궁금해서 모였군요.

🧑🏻‍🏫 : 그렇죠. 네가 OO의 그 동생이구나! 하면서 다들 모인 거죠. 이 방 갔다 저 방 갔다 형들한테 계속 불려 다녔어요. 그렇게 정말 어려운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교무실에 꼼짝없이 앉아있었어요. ‘언제 입학식 시작하나’ 한참 기다렸죠. 이게 한빛고의 첫인상이었어요. 앞으로가 참 힘들겠구나 생각했죠.


🎤 : ‘잘못 왔구나’라고 생각하셨나요.

🧑🏻‍🏫 : 그렇죠. 완전히 첫 입학하기 전까지는..ㅎ

그때 그 시절 입학식, 다들 기억 나시나요?

한빛고 1학년, 섬진강과 지리산이 전부 아닌가요?


🧑🏻‍🏫 : 그렇죠. 정말 임팩트 있게 시작했어요. 그 이후, 1학년 기억이라고 하면 섬진강하고 지리산 기억밖에 없는 것 같네요.

🎤 : 저희도 그런 것 같아요. 두 체험학습이 너무 강력한 기억이라 뭔가 세부적인 걸 잊어버리게 된 것 같아요.


🧑🏻‍🏫 : 맞아요. 아직도 지리산 마지막 날 천왕봉에서 헤드랜턴 끼고 별똥별 봤던 건 잊히지가 않아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30초~1분마다 별똥별이 계속 떨어졌었죠. 본격적으로 학교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이것저것 에피소드들이 생겼던 건 2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은데요.


그전에 이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어요. 제가 한빛고에서 근무할 때 가장 안타깝기도 하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건데요. 요즘은 1학년 친구들이 섬진강과 지리산 가는 게 되게 이상한 분위기예요.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안 가서 그런 것도 있는데요. 사립학교의 한계이기도 한데, 선생님들께서 나이가 들어가고 계시거든요. 이제 퇴직하셔야 할 선생님들이 줄줄이 계세요. 그런 선생님들께 한빛고 교사라는 명목으로 3박 4일 지리산 종주를 강행하는 게 죄송하기도 하더라고요.


아마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건데요. 재학생들도, 졸업생들도 이런 부분들을 함께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 : 그쵸. 사실 섬진강, 지리산 저희가 가도 힘들잖아요. 그런데 선생님들은 그냥 오르기만 하는 게 아니고 학생들을 인솔해야 하니까 신경 써야 할 것도 더 많아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드실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른다는 게 실감이 되네요.



한빛고는 2학년이 전성기지!


🎤 : 그럼 이제 2학년 때 이야기를 해볼까요?


🧑🏻‍🏫 : 학생회도 하고, 사생회도 하고, 동아리도 하고 정말 바쁘게 보냈던 것 같아요. 한빛고 시절을 돌아보면, 바쁜 친구는 진짜 바쁘고, 한량인 친구는 정말 한량이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렇게 다니다 보면 어느새 3학년이 되고, ‘이제 내가 뭘 해야 하지?’ 라는 고민에 현타가 크게 왔다가, 엉겁결에 졸업을 하게 되죠.


2학년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영어듣기평가 때인데요. 그땐 방송실이 행정실 옆 교무실 가는 계단 아래 있는 창고였어요. 지금 방송실로 이사를 한 게 제가 최동희 선생님과 같이했던 프로젝트였죠. 아무튼! 2학년 9월 모의고사였나요. 영어 듣기 시간에 방송이 갑자기 고장이 난 거예요. 제가 이과라 부여반이었거든요. 교무실에서 제일 가깝잖아요. 선생님들이 어떻게 하지 하며 교실 쪽으로 오셨는데, 부여반이 있고! 마침 THB짱인 명건희가 있네? 하시곤 절 방송실에 데려가셨어요. 어찌저찌 하니 방송이 다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덕순샘 감독하에 방송실 옆 계단에 앉아서 영어 시험을 봤어요. 그 기억이 되게 오래가더라고요. 그때부터 방송부 일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3학년 예술제까지 했던 것 같아요.


🎤 : THB.. 혹시.. 최동희 선생님 오른팔이셨나요 ㅇㅁㅇ

🧑🏻‍🏫 : (웃음) 그때 그런 말이 있었죠. 2학년 때 생건도 했고요. 최동희 선생님이 2학년 담임선생님이었고요. 농활, 동학에도 항상 선생님이 계셨죠.

🎤 : 역시나군요!



만인의 연인 ‘4동 105호 장범준’


🧑🏻‍🏫 : 아! 또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제가 입학 전날 일찍 입주했다고 했잖아요. 거기가 4동 104호였는데요. 4동 105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범준이 있었거든요…!

🎤 : 앗!!! 장범준님이.. 7기였군요…!

🧑🏻‍🏫 : 그렇죠. 나름 그 시절에 한빛고에서 좋았던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장범준의 공연을 동축 때마다 봤던 거? 예술제 땐 장난 아니었죠 또.


🎤 : 와 동축과 예술제에.. 장범준이라니. 혹시.. 그때도 장범준 인기 많았나요?

🧑🏻‍🏫 :싸이월드에 일촌명을 알리잖아요. 많이들 했던 게 '만인의 연인'. 그때도 인기가 많았죠.

사실 대학교 가서도 아예 친분이 없는 건 아니었고 나름 얘기하면 얘기할 수 있는 그런 형, 동생의 관계였어요. 저 군대 갈 땐 밖에서 만나서 술도 한잔했었고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서 TV를 보는데 슈퍼스타K가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장범준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뭐지???’ 하고 바로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뜨더라고요..


🎤 : 이제 슈스(슈퍼스타)가 되어버린 그…

🧑🏻‍🏫 : 그때부터 연락을 못하고 지내다가 우연치 않게 경조사에서 한번 보게 됐어요. 이런 일이 있으면 또 다 모이게 되더라고요. 그때 우연하게 이제 만나서 ‘어 형!’ 했더니 ‘어 건희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죠. ‘아직 그에게는 명건희가 있구나’ㅋㅋㅋㅋ

이 이야기 꼭 넣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의 얘기를 했다, 우리 졸업생들이 이렇게 지내고 있다 말하고 싶어요.(씨익)

한빛고 예술제에 등장한 '만인의 연인' 장범준! 그가 '섬진강'을 언급했다..!

만약 한빛고가 아니라 인문계에 갔다면?


🎤 : 되게 학교생활 열심히 하시고 엄청 만족하면서 다니셨던 것 같은데요 ‘3년 동안 나 진짜 한빛고 오기 잘했다. 그때 인문계 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런 생각 하신 적 있으신가요?


🧑🏻‍🏫 : 음 사실 그 마음은 반반이긴 해요. 사실 제 성격에는 사실 어딜 가도 그냥 그 분위기에 맞춰서 적응했을 사람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한빛고에 와서 더 좋았다고 생각드는 거는 나라는 사람의 어떠한 장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게 되는 것 같아서, 그걸 이제 말 그대로 드러내는, 드러날 수 있는 활동들이 정말 많다는 거? 지나고 나서 보니 그런 것들이 참 감사했어요.


제가 지금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어서 더 느끼는 거일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런 말 하기 되게 좀 조심스럽지만.. 일반계 고등학교에는 참.. 아이들을 묵살한다는 느낌이 정말 강해요. 정말 일반계 고등학교는 학생들 하나하나를 이렇게 속속들이 다 보지 않아요. 숫자도 많을뿐더러, 3년 동안 사실 빛나는 친구들은 성적이 좋은 친구들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이게 모두 다라고 얘기하기는 참 그렇지만요. 사실 수면 아래엔 학생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잡아주려는 노력들도 있어요. 하지만 이게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왜 당신은 공부 성적을 올리는 데 집중을 해야지. 이런 것에 집중하느냐’라는 질타를 받더라고요. 현실적으로.



왜 대안학교여야 할까요?


🧑🏻‍🏫 : 사실 제가 한빛고에서 교사로서의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다른 학교를 알아봐야 했을 때, ‘왜 우리가 대안학교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한빛고와 비슷한 성향의 학교들을 다 제쳐두고 굳이 광주에 있는 일반계, 그것도 나름 학벌이 치열하다는 학교를 지원하게 됐죠. 아마 학생들도 고민하는 부분일 텐데요. 한빛고와 일반계 고등학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냥 일반고에서 하는 것들 다 하면서 자연체험학습과 동아리 활동 정도만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일반계에 와보니 정말 달라요.


그러니 이제 목적 자체가 다른 거죠. 우리는 우리다움을 추구하는 학교에서 나름대로 자랐던 거예요. 조금만 벗어나서 보면 ‘우리다움’보다는 ‘지표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걸 다들 겪잖아요. 한빛고를 다닐 때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어서, 덕분에 얻어진 게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학교를 다닌 학생으로 있을 때, 그다음에 교사로 있을 때도 항상 학생들에게 '네가 얻고자 한다면 정말 많이 해라. 너네들이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그만큼 얻는 것도 없다.'라는 말을 되게 반복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무의식적으로 너네들이 이런 걸 가져야 한다라고. 사실 가만히 있으면서 얻어지는 건 지금도 느끼지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직업병이라 그런지 이렇게 이런 얘기 하는 것 같아요.



학생에서 교생으로, 한빛고에 다시 오다


🎤 : 교생으로 한빛고에 처음 오셨고, 첫 교직을 한빛고에서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왜 교생실습 학교로 한빛고를 선정하셨나요?


🧑🏻‍🏫 : 아마 한빛고를 졸업하고 나서 교사를 꿈꾸는 친구들은 아마 대부분 여기로 오지 않을까 싶어요. 모두는 아니겠지만요. 사실 자기가 다녔던 학교를 지정해서 가는 게 제일 편하기는 해요. 다른 데서는 일을 안 시켜주거든요.


본인이 지금 계획하는 진도가 있는데 그 진도 안에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 하면 이거는 시험에도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니까, 사실 되게 예민한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일반 학교에선 교생들이 수업할 일이 거의 없고요. 그나마 이제 한빛고니까 중간에 한 번씩 수업도 들어가고 기숙사 살면서 학생들과 같이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요.


🎤 : 그렇군요. 하긴 저희 선생님들은.. 진도 안 지키실 때도 꽤 많잖아요 하하

🧑🏻‍🏫 : (웃음) 그쵸. ‘이게 뭐 중요하냐’하면서 이제 할 얘기도 하시고. (산책도..가고..)


아, 한빛고로 교생 오기를 망설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는데요. 바로 기숙사에서 한 달을 보내야 된다는 거예요. 사실 이제 와서 생판 모르는 학생들하고 한 달을 같이 보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 쉬운 선택은 아니거든요.


🎤 : 맞아요. 따로 방을 주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랑 함께 사용하라고 하니까요. 만약 저희가 선생님이라면.. 혼자 쉬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 : 네, 실제로 저도 거기서 한 달 동안 있으면서.. 맥주도 한 캔 마시고 싶고, 야식도 먹고 싶고 그랬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진짜 살이 좀 많이 빠지긴 했어요.


🎤 : 한빛고로 교생을 오기 전에 기대하는 게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했던 거 또 해볼 수 있겠다! 라든가요.

🧑🏻‍🏫 : 아! 정말 정말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건 교생 와서도 세콤을 뚫고 닭을 한번 먹어보자! 였는데요. 차마 거기까지는 하기엔 파장이 커질 것 같아서 못 했고요. 그나마 했던 건 같이 방 썼던 친구들과 마지막 날 사감쌤 몰래 라면 먹는 정도였습니다. 근데 이마저도 인스타에 남기긴 했죠. ‘사감쌤 얘네 몰래 라면 먹어요’하고요. 물론.. 사감쌤이 인스타 안 하시는 걸 아니까 ㅎㅎ


🎤 : 혹시 학교 다니실 때 어떤 치킨을 즐겨드셨는지요.

🧑🏻‍🏫 : 양동통닭하고 쉼터였고요. 쉼터는 지금 먹어도 진짜 맛있는 것 같아요. 교생 왔을 때 꼭 다시 가보고 싶다 생각해서 처음 먹었던 게 쉼터 치킨이었어요. 양념치킨이 진짜 맛있죠.


🎤 : 오! 그때도 쉼터가 있었군요. 쉼터 먹고 싶네요ㅎㅎ 그럼 교생 하시면서 가장 재밌었던 건 무엇이었나요?

🧑🏻‍🏫 : 음.. 사실 교생 때는 그냥 너무 긴장했던 시기였어서 그냥 오랜만에 학교에서 내가 학생이 아닌 모습으로 학교에 있다는 것. 그게 되게 그냥 신기하고 긴장되면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아쉬웠던 건 제가 딱 자연체험학습 전까지 교생 기간이었어서 따라가지 못했던 거요.

🎤 : 아! 정말 아쉬우셨겠어요! 그래도 체육제를 정말 뜨겁게 즐기셨던 걸로 압니다!🔥

8기 명건희님이 교생으로 참여했던 체육제 단체사진! 여기서 명건희님을 찾아보세요🔎

고등학교 때 꿈꿨던 미래, 교사는 아니었어요


🎤 : 혹시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이 하고 싶으셨나요?

🧑🏻‍🏫 : 되게 스토리가 좀 길긴 한데, 사실 저는 교사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첫 교사, 학교의 직분을 갖게 된 건 이제 한빛고가 처음이었고요.


사실 교직 이수를 했던 이유는, 대학교에서 제가 물리학과를 나왔는데 보통 성적이 좋으면 교직 이수를 할 수 있잖아요. 이게 이제 한빛고의 병이었던 것 같은데요.. ‘일단 해보고 나중에 뭐라도 되겠지 도움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나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빛고 같은 학교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내가 만약 이런 학교를 만들 수 있다면 여러 돕는 자들이 있겠지만 나는 거기서 수업을 하고 싶은데 그러면 교직 이수가 필요하겠네라는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게 됐던 거고, 사실 이걸 직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어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서 내가 내 영역에서 어느 정도 커리어를 좀 쌓아야 학교를 세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닌가란 생각을 했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여러 사연들이 생겼어요. 갑자기 아버지가 너무 아프셔서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는 부담해야 되는 상황이 됐거든요. 사실 정말 영화 같은 스토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한빛고 전화를 받았어요. ‘갑자기 자리가 생겨서 그런데 혹시 근무해 줄 수 있느냐’ 그렇게 한빛고에서 교사직을 시작했고 그게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 :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정말 드라마틱 하네요. 사실 한빛고에서 교직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다른 꿈을 꾸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애초에 물리학을 전공하셨고, 교직이수는 부수적인 거였으니까요. 고등학교 시절 꿈은 무엇이었고, 왜 물리학을 공부하려 했는지 궁금해요.


🧑🏻‍🏫 : 원래는 건축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대학교 갈 때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것 중에 하나가 초고층 빌딩이었어요. 지금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칼리파가 막 세워졌던 시기였고, 이게 한국의 기술로 세운 건물이라는 게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너도나도’ 건축공학 건축과에 대한 로망을 가졌던 시대였죠.


저도 그중에 하나예요. 그래서 건축학과가 가고 싶었는데, 3학년 때 고민을 했죠. 내가 거기 가서 진짜 잘하려면 전문가가 돼야 되는데.. 하나하나 따져봤더니 제가 진짜 미술을 정말 못하거든요. 손으로 그리고 만지는 걸 정말 못해요. 근데 건축과는 설계 도면도 그리고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건 도저히 자신이 없고, THB를 했던 장점을 살려 설계하고 조립하는 일을 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건축 공학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하나 알아보는데 결국 그 끝에는 물리가 있더라고요. 계산하고 측정하고 이런 것들.


결론적으로 물리학과를 가서 가서 나중에 대학원을 가든 아니면 어디를 가든 하면 되겠다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건축공학을 복수 전공했고요.


🎤 : 네? 물리와 건축을 복수 전공하셨다고요..? 정말로요..?

🧑🏻‍🏫 : 이게 되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1학년 때부터 복수 전공을 할 생각으로 학점을 당겨 들었죠. 그리고 제가 전공한 게 하나 또 있는데요. 컴퓨터 공학이에요. 제가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왔는데요. 그때 생겼던 것들이 몇 가지 있어요. 첫 번째는 이라는 게임, 두 번째는 스마트폰. 제가 전역하고 처음 가진폰이 갤럭시 S2였거든요. 그때 앞으로 컴퓨터 안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고요. 그래서 건축공학 복수전공을 부전공으로 내리고 컴퓨터 공학을 부전공으로 다시 껴놨어요. 그래서 물리 전공 – 물리 교직 – 건축공학 부전공 – 컴퓨터 공학 부전공 을 하게 됐죠.


🎤 : 정말 대단하시네요… 물리, 건축, 컴공 셋 중 하나만 해도 엄청날 텐데..

🧑🏻‍🏫 : 제 졸업 학점을 보면 200학점이 넘거든요. 1~2학년 때 학점이 18-21-24-24이었고요. 3~4학년 때 27-27 이렇게 들었던 것 같아요. 타이밍이 좋아서 저녁 시간에 학점을 더 들을 수 있었어요. 사실 30학점 만들 수도 있었는데 교생도 가야하니까 27학점 듣고 한학기를 더 했습니다ㅎㅎ


🎤 : 17학점이 아니고 27학점을 들으셨다고요.. 배움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 : 이게 사실 한빛고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정말 비싼 돈 주고 대학교를 다니니 등록금 아깝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다 생각했죠. 진짜 그렇게 보냈고요. 사실 교생하기 전에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입학하려고 했어요.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입학금만 내면 되는 상황이었죠. 근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부모님 아프신데 혼자 공부하겠다고 할 순 없더라고요. 어쨌든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게 나름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뿌듯해요!


🎤 : 한빛 그 자체란 수식어도 부족한 것 같네요. 그저 ‘빛’이십니다, 선배님! 지금 선생님 안 하셔도 뭐든 하실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혹시 앞으로 교사는 딱 몇 년만 더 해야지 이런 생각도 하시나요.

🧑🏻‍🏫 : 음.. 사실 이제는 계속하고 싶긴 해요. 다른 직업을 하기엔 이제 부담이 되는 그런 시기가 된 것 같아요. 아이도 있다 보니까 책임감이 생기고 좀 그러긴 하네요.


교생에서 교사로, 한빛고에 다시 오다


🎤 : 그렇군요. 말씀해주셨듯이 교생을 마치고 이후에 한빛고 교사로 다시 오시게 되셨는데요. 학생에서 교생으로, 교생에서 교사로 학교에 오니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 : 사실 한빛고에서 교직 생활을 제일 힘들었던 게 선생님들과의 관계였어요. 이젠 저의 선생님이 아니라 직장 동료잖아요. 나랑 같은 위치에 있는 분들인데 내가 이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됐어요.

정말 한빛고에서 일하면서 첫 한 학기 정도는 8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요. 사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요. 나는 일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제가 하는 분위기가 됐죠.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교사라는 직업은 되게 일찍 시작하고 늦게 끝나거든요. 우리 학생 때를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이 최대한 늦게 남아서 우리 얘기도 들어주고 뭔가 함께 해주면 좋겠다고 느끼잖아요. 근데 이게 교사 입장이 돼 보니까 딜레마가 크더라고요. 나도 해주고는 싶은데, 나의 삶이 있고, 그만큼 한다고 해서 보수가 챙겨지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때 가장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시고 도움을 주셨던 분이 둘리쌤이었어요. 따로 불러서 술도 한 잔 사주시고, 이야기도 들어주시고요. 그러면서 ‘선생님’의 모습을 알게 됐던 것 같아요. 이건 이따 자세히 얘기할 테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혼인신고서를 쓰잖아요. 제 짝꿍 증인이 둘리쌤하고 손은주쌤이셨고요. 제 쪽 증인이 배성호선생님이셨고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정말 둘리쌤과 은주쌤 덕분에 한빛고를 버텼고.. 제 짝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 ㄴㅇㄱ 어머어머. 그렇게 최동희파에서 박성준파로 넘어가셨군요ㅎㅎ

핑크빛으로 물든 그의 한빛💘

한빛고에서 평생의 짝을 만난 Lovё sŧØry💍


🎤 : 학교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스토리가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 : 맞아요. 이 중간에는 둘리쌤과 은주쌤이 계셨습니다. 덕분에 만나게 됐고요. 이게 학교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제 우리가 보통 쉴 때 같이 쉬잖아요. 예를 들어 전원 귀가? 그러면 그 기간에 선생님들이랑 ‘저녁에 같이 시간 좀 보내시죠’ 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모이고, 만나게 됐습니다. 여기엔 박주위 선생님도 있었어요 ㅎㅎ


🎤 : 둘리쌤과 은주쌤이 다리를 놔주셨군요. 역시 선배 사내 커플이 계셔서 덜 부담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선례가 있으니까요ㅎㅎ

🧑🏻‍🏫 : 그쵸. 사실 그런 부분이 조언 중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이었어요. 작은 교무실 공간 안에 cc가 두 커플이었으니까요ㅎㅎ 아마 제가 계속 한빛고에 있었다면 결혼하기 전까진 끝끝내 숨겼을 거예요. CC.. 아시잖아요..? 한빛고에서도 이미 많이 겪었고요. 직장은 더 상상을 초월해요..


이후에 제가 학교를 옮기게 됐고 바로 ‘결혼하자’ 약속하게 됐죠. 근데 같은 교사로서 되게 좋아요! 일단 얘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학교 수업이나 5.18 같은 행사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며 학생들에 대해, 더 나은 교육에 대해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더 나은 방향을 얘기하면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가장 정말 좋은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게 되게 사람이(짝꿍님) 밝아요. 긍정적이고 정말 에너지가 좋은 선생님이셔서... 아마 이 선생님을 만난 친구들은 다들 공감할 거예요. ‘되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잘 받았다’ 사실 제가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그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사. 랑. 꾼. )


🎤 : 정말 가볍고 궁금한 질문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혹시.. 학생들한테 들키신 순간 없으신가요ㅎㅎ

🧑🏻‍🏫 : 되게 조심했어요. 물론 봤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보통 데이트를 할 때 길거리는 못하겠고.. 그래서 영화 볼 땐 무조건 자동차 극장을 갔어요. 이런 적이 있어요. 광주 어디 아웃렛을 지나가다 저 멀리 학생을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어! 안돼!’하고 바로 뒤돌아서 도망갔죠.


🎤 : 거의 연예인이셨군요! 하긴 학생들이 노는 곳과 비슷하게 전대나 충장로가 데이트 장소가 되니 조심스러우셨겠어요. 근데 그게 또 하나의 묘미였을 것 같아요. 스릴 넘치고!

🧑🏻‍🏫 : 맞아요. 인터뷰 사전 질문지에 ‘한빛은 선배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라는 질문이 있었잖아요. 한빛은 저에게 아내하고 아이가 생긴 곳이에요. 사실 이럴지 몰랐는데 제 인생에서 한빛고와 교점이 너무 많아요.


조금은 거창하지만.. 한빛고는 저에게 운명이랄까요..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주 찰나의 나는 열심을 다해 고민했는데, 그 고민의 선택이, 선택의 순간, 선택이 나의 삶에 가져다준 영향을 따져보면, 한빛에서의 고민과 선택이 결국 현재의 "나"를 있게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우연의 순간에 선택할 저의 결과가 기대돼요. 지금까지 선택들이 밑거름이었고 힘이었고 선물이었어요.



재학생에서 졸업생으로, 졸업생에서 교생으로, 교생에서 교사로


🎤 : 선배님께선 재학생, 졸업생, 교생, 교사까지 다 경험하셨는데요. 다양한 신분으로 한빛고를 겪으며 느끼셨던 것들이 궁금해요.

🧑🏻‍🏫 : 재학생 시절, 학교에서 많은 직책을 맡으며 그 당시엔 안되는 것, 제약이 많은 것 등 불편한 것들 그리고 학교의 시설, 학교의 한계점을 꼬집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의 니즈를 위해서 동아리총회/식구총회/사생총회라는 기구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더 나은 결정을 위해 한걸음 발을 떼는 과정이.. 때론 그 시간이 길어져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시간들을 하염없이 쓰면서 배우는 과정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이러한 과정에서 배우는 소통의 기술은 누가 알려줄 수도 경험시켜줄 수도 없는 너무 값진 것들이었고 대학 시절을 보내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쭉 지켜보면 한빛고에서 책임을 지고 뭔가를 진행하고 이끌었던 사람들은 졸업 후 언제 어디서든지 뭔가 하나는 맡아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졸업생일 때는 한빛에서 배웠던, 길렀던 ‘끈기’. 그걸 가지고 대학교에서 정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봤고요. 한편으로 미안했던 건 동문회한테 연락하지 않았던, 그리고 선생님들한테도 찾아가지 않았던 거? 항상 마음속으로만 응원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죠..


이제 교생 때부터 완전히 바뀌게 됐는데요. 이때 다시 학교에 가면서 다시 또 뭔가 좀 뜨거워지는 것도 느꼈고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교사라는 걸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하게 되면서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언제든 기회는 오고 내가 기회를 알아차리고 잡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를 깨달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빛에서 교사로 지내다 광주로 오면서 한빛고와 같은 대안학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껴요. 한빛고를 졸업하고 ‘우리가 대안학교라고? 뭘 대안학교라고 하지? 뭐가 다르지?’라는 고민이 있었고요. 광주에서 입시, 학벌 경쟁이 치열한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해보면 대안학교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입학한 지 년수로만 따져보니 17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스마트폰이 있기 전 MP3 시절에도, 지금도, 대안학교의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해요. 그런 측면에서 한빛고의 정체성이 잘 지켜지길 바라요. 물론 이 정체성은 확고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변하는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학교의 슬로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자연사랑’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바탕으로 시대에 맞춰서 어떤 걸 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잘 어우러지는 게 학교가 오래 갈 수 있는 큰 방향성이지 않을까요? (이런 말 하면.. 참.. 선생님들이.. 그러시겠죠..?ㅋㅋㅋㅋ)


학교에서 보내는 이 일련의 과정이 사실 나를 위함이 아닌 모두가 함께 걸어가는 과정인데요. 한빛고가 아닌 다른 광주의 일반 교사로서 느끼는 것은 ‘함께하자’라는 말이 어려울 정도로 요즘의 시대가 변하고 있어요.  실제로, 현직교사들이 수행평가 영역에서 모둠프로젝트, 모둠평가를 지양하는 것도 이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로 인한 것도 있지만 앞으로 더더욱 그러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삭막하고 냉철한 사회에서 우리라도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해서요. 작은 발걸음이지만 서로의 손을 잡자고 제안하고 뻗어준 댓잎레터 제작진들에게 정말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합니다!


🎤 : 인터뷰 해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드리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전해주세요!

🧑🏻‍🏫 : 졸업생으로, 그리고 제가 일하고 있는 교사의 직업을 가지며 이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늘 하고 있어요. 고민할수록 우리 선생님들 참 대단하시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없이 진심으로 다가가 주시는 마음이.. (사석에선 너무 학교/학생 얘기를 하니까 학교/학생 얘기하면 만 원씩 내고 얘기하자는 문화도 있었답니다. 그만큼 한빛을 애정하신다는게 뚝뚝떨어집니다ㅎㅎ)


일선의 학교에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상담하고 얘기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구요.. 하루의 많은 부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고 요즘과 같은 '워라밸'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이 중심을 잡기가 참 힘듭니다.. 더군다나 "교사"라는 직업이 주는 공적인 책임감도...


상대적으로 학생 수가 적은 한빛고에서조차 교사로 있는 시간동안 학생들과 소통하기 더 쉬웠을 텐데 오히려 더 가까이, 깊게 지내지 못했었습니다.. 사사로운 말들은 오갔었지만 뭔가 깊은 얘기를 잘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지나고보니 한빛고에서 재직하던 시절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조금만 일을 덜하고 같이 보낼걸..) 교사의 경력이 늘어나면서 교사라는 직업은 소명의식, 그리고 학생들과 만나면서 받는 그 에너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들더라구요.


그 중심엔 수업이 있었어요.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주고받는 대화도 너무 소중하지만 1학기, 1년 동안 선생님들과 호흡하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고 생각이 전달되고 이에 대한 피드백이 학생들로 올 때, 교사가 주도했던 대로, 때론 우연의 순간 그것이 보여지고 느껴질 때 "참 교사하길 잘했다" 라는 것을 느끼고 그 순간 힘이 나고 계속 교사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가끔씩 스승의날, 생일이되면 연락해주는 고마운 친구들에게 힘이 되고, 지나가다가 무심코 던진 "선생님 수업이 너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업이 너무 그리워요" 라는 이런 말 한마디가 하루하루가 힘들고 벅차더라도 다시 힘 나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어요.


그 원동력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계시는 한빛고 선생님들, 그리고 많은 졸업생 동료 교사분들. 당신들에게 경의와 존경을 이 시간을 빌어 보냅니다 :)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이 힘써주시길!



Dear. 한빛인들에게


🎤 :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한빛인들한테 하고 싶은 한마디 부탁드려요.

🧑🏻‍🏫 : 제가 졸업생 인터뷰의 스타트를 끊게 됐는데요. 사실 최대한 보잘것없는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누구나 가볍게 얘기할 수 있는 곳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


저는 여기서 이렇게 잘살고 있고요. 다음에 누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제 인터뷰가 당신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근데 그만큼 되게 재미있었고 오랜만에 옛날얘기를 할 수 있어 좋았어요. 사실 요새 이 '라떼는' 얘기하는 게 되게 좀 조심스러운데 되게 편하게 얘기했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니, 보시는 졸업생분들! 인터뷰 참여해주세요!

교생시절 아이들이 써줬던 롤링페이퍼를 여전히 간직하고 계신답니다!
🕵️우리 한빛 구독자들을 위한 '8기 명건희'님의 BONUS📮

🧑🏻‍🏫 : (이걸 보낼까말까 정말 고민했는데..) 한빛 고3시절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어요. (6기 정주혜 선배님의 대학과제를 빌미로) 이 때의 영상엔 예전의 한빛이 묻어있어요... 과거를 추억하는 졸업생들, 과거가 궁금한 재학생들, 그리고 예전모습이 그리운 선생님들 모두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입니다. (저작권이 6기 선배님에게 있을텐데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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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학기 초, 그 떨림을 200% 증가시키던 가족제! 지난 나의 가족들을 떠올려보아요 💭
ㄴ 도대체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
ㄴ 말도 꺼내지 말아주실래요?
ㄴ 우리 가좍 ... 💚 

가족제에 대한 여러 반응이 엇갈리는 가운데, 단 한 가지 모두가 일치하는 것은 바로 최고로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냈어야 한다는 것! ('우린 하나도 안 어색했는데? 바로 그냥 찐가족됐는데?' 하신 가족분들은 모든 가족구성원이 모인 2022 가족밥 사진을 보내주세요. 추첨을 통해 상품을 드립니다.🙄) 

한빛인은 어색한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요? 댓잎레터가 스몰톡을 위한 질문 목록을 만들어 봤는데요. 우리도 이제 슬슬 가족이 되어가고 있으니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돌아온 '제 2회 댓케이트 : 가족제를 위한 스몰톡 편 📋' 함께해요!
☑️ 이달의 알림
📌 댓잎레터 [프롬한빛]에서 삶을 나눠주실 인터뷰이를 구합니다. 한빛고 졸업생이라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한빛고 시절의 기억을 나눠주실 분, 함께 진로를 고민하실 분, 한빛인들에게 인생경험을 들려주실 분 등등 모두 환영합니다! 언제든지 여기로 찾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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